부슬비에 머리가 젖었다. 숙소에서 나올 때에는 쌀쌀한 공기에 몸을 떨렸는데 언덕을 오르다 보니 후덥지근했다. 패딩이 거추장스러워 들고 걸었다. 빗물이 스며서 무거워진 건지도 몰랐다.
멀리서 길가를 어슬렁거리는 개가 보였다. 문방구 앞에서는 고양이 두 마리가 비를 피하며 가르랑거렸다.
튀르키예에 온 후로 하늘은 좀처럼 맑은 날씨를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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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목적지는 피예르 로티 언덕. 끝내주는 전망을 볼 수 있다는 말에 혹해 길을 나섰는데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김이 샜지만 그래도 길을 나섰다. 달리 갈 곳도 없다.
시내에서 벗어나 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이동했다. 중심지에서 약간 벗어났을 뿐인데 느낌이 전혀 다르다. 전망대까지는 20분 정도를 더 걸어 올라야 한다. 빵집과 세탁소, 약국, 문구점... 친숙한 풍경에 웃음이 나왔다. 사람 사는 마을에 온 것 같다. 버스를 잘못 탔을까 봐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내려서 찬찬히 걸으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귀여운 고양이들
이게 바로 천국의 계단?!
표지판이 가리키는 쪽으로 향하니 엄청난 경사의 계단이 나온다. 반신반의하며 계단을 오르고 나니 눈앞에 펼쳐진 건 공동묘지다. 전망대라면서 웬 묘지? 잠시 당황했지만 구글 지도가 가리키는 건분명히 이 길이 맞다. 둥그런 한국의 묘지와는 달리 화단 같은 모양새여서 무섭기보단 신기했다. 구경을 하며 계속 걸었다.
그중에서 특히 내 눈을 사로잡은 건 꽃이 심어진 묘다. 어떤 사람이 묻혔을까. 생전에 꽃을 좋아했을까. 고인이 누운 자리를 아름답게 꾸며놓은 마음이 애달프고 짠했다. 나중에 죽는다면 수목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싶었는데 묘지에 꽃을 심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까악-까악- 까마귀 우는 소리를 배경으로 한참 더 묘지를 가로질렀다.
아는 분의 소개로 나갔던 소개팅 자리가 생각났다.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면서 하는 일에도 만족한다던 그는 '서른이 넘어가니 예전보다 모든 것에 감흥이 덜하다'라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는 죽음을 생각해 보라고 대답했다.
"죽음이요? 그걸 왜...?"
떨떠름한 기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표정으로 상대가 반문했다. 당시에 나는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세상은 묘지 위에 세워져 있다]라는 제목의 책을 읽고 있었고, 아름다운 마무리에 관심이 많았다. 나름대로 설명하려고 애썼는데 대화가 매끄럽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소개팅은 싱겁게 끝났고 두 권의 책도 큰 감흥을 남기지는 않았다. 동생이 듣더니 누가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냐며, 미쳤냐고 했다. 뭐, 어때.
어느 순간부터 죽음이 궁금했다. 나에게 죽음은 인식되기보다는 감각되었다.
어린 시절 보았던 시커멓고 기다란 장의차, 작은 아들의 부고를 듣고도 내색하지 않다가 모두가 잠든 밤에 숨죽여 울던 할머니의 모습, 쓰러질 것 같은 상태의 유족들이 내는 한 서린 곡소리, 5월마다 광주 거리 곳곳에 보이던 흑백사진들, 망월동 공동묘지, 베트남 전쟁박물관.
가슴 한가운데 박힌 젓가락 길이의 수술자국도 자꾸만 죽음을 떠올리게 했다. 미숙아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 있다가 심장 수술을 한 끝에 겨우 살아났다는 탄생 설화(?)를 듣고 나서 나는 생각했다.
'덤으로 얻은 인생이니까 제대로 살아야 해. 그래야 날 살려준 사람들에게 보답할 수 있어.'
삶을 알게 될수록 죽음에도 강하게 끌렸다. 그것을 생각하고, 두려워하고, 상상하고, 체험했다. 죽음을 머릿속에 각인시킬 때마다 내가 자란 것 같았다. 그래야만 자랄 수 있을 것 같았다.
교사가 된 후에는 매년 아이들과 죽음 수업을 진행했다. 감정을 쏟아내는 아이들을 진정시키느라, 장난스러운 말썽쟁이들을 다독이고 진지한 분위기를 만드느라 애먹기도 했지만 마지막을 떠올리며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훌쩍이며 유언장을 읽는 아이들과 그 후에 서로 끈끈해진 모습들이 죽음 수업을 계속하게 했다.
어떤 죽음은 사회를 바꾸고 시스템을 움직이기도 했다. 무감각한 세상에 돌을 던지는 것처럼 아픈 죽음도 많았다. 작년에 쏟아진 동료들의 부고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다. 그들을 떠올리면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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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분 더 헤매다 전망대에 도착했다. 빗방울이 마르지 않은 상태였지만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춰 하늘이 밝아졌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 땀을 식혀주었다.
"와!"하고 감탄이 나왔다. 바쁘게 숨 쉬는 도시와 고요하게 잠든 묘지가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표현하지 못할 감정이 몰려왔다.
죽음과 삶, 햇빛과 비구름, 어둠과 밝음, 정적과 활기, 끝과 시작을 함께 품고 있는 전경이 진리를 보여주는 단서처럼 느껴졌다. 평생 골머리 앓던 문제의 답을 한 번의 실험으로 알아낸다면 이런 기분일까? 얼떨떨했다.
아마도 내가 죽음이라는 동굴을 그토록 집착적으로 파내는 까닭은 잘 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은 언젠가 죽음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하기에 더 아깝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박경리 선생님의 말처럼 슬픔도 기쁨도 얼마나 찬란한가. 또 죽음도 삶도 얼마나 귀중한가! 여행에서 발견한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