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도박
새벽부터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거렸다. 배탈이 난 탓이다. 요란하게 물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지금 여기에 송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한다. 조심성 있게 움직여야 하겠지. 그녀는 잠귀가 밝다. 나는 친구를 깨우지 않기 위해 살금살금 물을 내리고 살금살금 손을 씻고 소리 나지 않게 화장실 문을 닫은 후 닌자처럼 움직여 이부자리로 돌아왔을 것이다. 불면증이 있는 친구를 소음으로 괴롭히고 싶지 않다.
아, 혼자 와서 다행이다.
다시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다. 속을 비운 탓인지 오히려 배가 고프다. 결국 일어나서 냉장고를 뒤적인다. 어제 먹다 남은 꿀과 카이막, 토마토와 치즈가 있다. 부시럭거리며 꿀과 카이막을 덜고, 토마토를 썰고, 치즈를 전자렌지에 돌린다. 새벽에 잠들어 늦게까지 자는 송이 있었다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게다가 그녀는 아침을 먹는 타입의 인간이 아니다.
아, 혼자라서 편하다.
점심에는 튀르키예의 채식 맛집에서 따끈한 민트 스프와 슴슴한 야채 피자를 먹었다. 채식이라니. 누군가와 함께 왔다면 꿈도 못 꿨을 일이다. 나와 같이 다니는 사람들 중에 채식을 즐기는 사람은 없다. 남자친구와 '현재와 같은 기후위기 상황에서 채식을 하는 게 옳다.'를 주제로 강렬하게 논쟁한 이후로, 다른 사람에게 선뜻 채식을 제안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혼자 먹는 식사에서 메뉴 선택권은 온전히 나에게 있다. 설명할 필요도, 설득할 필요도 없다.
아, 혼자니까 가능하다.
오후에는 또다른 언덕을 찾아갔다. 전날 피예르 로띠 언덕을 올라 튀르키예의 전망을 감상한 게 마음에 들어서였다. (나... 언덕을 꽤 좋아하는지도...?) 지하철을 타고 부둣가로 가서 페리를 타고 건너편 지역으로 간 다음 다시 버스를 타고 걸어 올라가는 고생스러운 길이다. 게다가 숙소에 돌아가려면 다시 왔던 길을 반복해야 한다.
언덕을 오르려고 이렇게까지 한다고?
효율적인 동선을 추구하는 보통의 여행자라면 가지 않을 길이다. 중간에 버스를 잘못 타 엉뚱한 곳에 내렸고, 예상했던 것보다 한참 더 걷느라 온몸은 땀범벅이 됐다.
그래도 괜찮다.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혼자 다니는 맛이 이런 건가?
정상에 올라 구경을 하고 돌아가는 길. 언덕을 내려가는 버스를 놓쳐 한참이나 기다렸고, 교통 정체 때문에 다시 한참이나 도로에 갇혀있었다. 그래도 괜찮다, 혼자니까. 내가 저지른 일이니 내가 책임지면 된다.
잠깐, 숙소 쪽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배가 몇 시였더라? 생각보다 빨리 끊겼던 것 같은데... 도로에 꽉 찬 차들은 빠져나갈 생각을 안 하고, 어느 새 주변은 어두워졌다. 똥줄이 타기 시작했다. 페리를 못 타면 어떻게 건너가지? 하필 구글 지도가 빙글빙글 돌며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촘촘한 이방인들 속에서 남은 시간을 계산하며 속을 태웠다.
출발 5분 전,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죽어라 달렸다.
떨리는 손으로 페리 표를 끊고 아슬아슬하게 마지막 배에 올랐다. 입에서 쇠맛이 났다. 숨을 고르며 보는 이스탄불 야경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한바탕 걸고 내기에 이긴 기분이었다. 게다가 배에서 내려 항구를 걷다 기막힌 노점상을 만나 끝내주는 고등어 케밥을 먹었다. 전력질주하고 난 다음이라 그랬는지 맛이 더 기깔났다.
혼자 하는 여행은 혼자 사는 삶과 닮아있다.
신경 쓸 것도, 눈치 볼 필요도 없다. 내가 머무는 시간은 나의 선택으로 채워지고, 내가 머무는 공간은 오롯이 내 취향을 담아 꾸며진다. 쉬고 싶을 때 쉬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난다.
대신 혼란과 위기도 내 책임이다. 어느 정도까지 감수할지, 어디까지 나아갈지는 오롯이 나에게 달려있다. 내 손으로 택해 내가 만드는 삶. 레디메이드 아닌 핸드메이드 인생.
장강명은 '5년 만의 신혼여행'이라는 책에 이렇게 썼다.
인간은 자기 인생을 걸고 도박을 하는 순간부터 어른이 된다. 그러지 못하는 인간은 영원히 애완동물이다.
동행하기로 했던 친구가 여권 때문에 출국하지 못했다.
혼자라도 갈 것인가, 여행을 포기할 것인가?
"나는 가겠다"라고 답한 그 순간부터 계획도 없고 대책도 없는 열흘 간의 도박이 시작됐다.
어른도 모험이 필요하다. 아니, 어른이 되려면 모험을 해야 한다.
그럭저럭 열심히 학교를 졸업하고, 그럭저럭 열심히 취직을 해서, 그럭저럭 적당하게 적응하고, 그럭저럭 직장인이 되어, 그럭저럭 평범하게 일하다가 갑자기 떨어진 낯선 땅은 다시 나에게 요구하고 있다.
어른이 되라고.
안전지대에서 벗어나 다시 한번 혼자가 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