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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Feb 27. 2024

[나의 20대 분투기]1 군대와 결혼- 1편?  

 나는 전국민이 국뽕을 맞아 취할 수밖에 없었던 2002년 월드컵해에 군입대를 했다.

알고보면 한국의 월드컵 4강에 가장 놀란 사람은 히딩크 자신이 아닐까도 의심해보지만

여하튼 히딩크는 전세계를 놀라게 해주겠다는 호언장담을 정말로 실현해버렸고

전 국민은 붉은 티셔츠를 입고 서울광장에 뛰어나가 모르는 사람들과 서로 얼싸안고

나뒹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에 GOP 철책선 초소에서 선임에게 열심히 갈굼당하고 그 어느때보다 서러웠던 시기였다. (물론 당시 군대가 지금보다는 빡세다고 해서 월드컵중계도 통제하고 그러지는 않았다. 막사에 근무가 끝나고 쉬는 분대는 특별히 밤늦게까지 월드컵 시청과 응원이 가능했고, 초소에 나가서도 상황병이 라디오중계를 틀어줘서 초소에서조차 실시간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전국민이 기뻐할 때 휴전선에 근무하던 우리도, 나도 같이 기뻐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희소식이 내 군생활의 희소식은 아니지 않은가. 선임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월드컵 4강을 함께 기뻐했던 30분 전 상황은 30년 전일이 되어버린 것처럼 이미 초소에서 그 선임에게 갈굼당하던 그런 시기였다. )

몇강전인지 기억은 가물가물한데 전방에는 분명 비가 추적추적 오는날이었다. 나도 막사에서 응원을 했었는데 태극전사의 승리에 기뻐함도 잠시 , 근무시간이 되어 비오는 어둠속으로 판초우의를 질척거리며 뒤집어 쓴채로 전선으로 투입되는 기분은 참 묘했었다. 티비에는 아직도 응원하던 국민들은 축제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는데 나는  근무라는 명목으로 선임에게 갈굼당하러 가는 그 기분이 참 그랬다. (나중에 알았는데 지금의 아내는 바로 그 날 그 티비가 비추고 있었던 광화문 광장에서 붉은악마 티셔츠를 입고 응원하고 있었다고 한다. ㅠㅠ 이것도 인연인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교회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다 아는 그 찬송.

늘상 교회에서 젊은 청년들과 함께 활동했기에

나는 내가 당연히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왔다.(생각해보면

진짜 운좋게 태어난 거다. 그때는 몰랐지만)

여튼 난 군대 이등병 생활을 하면서야 내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 그 의심이 처음으로 들었다.

욕먹기 위해 태어난 건가??? 싶을 정도로 군생활 잘할 줄 알았는데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여튼,

나는

2002년 1월 15일

102보충대로 입소(왜 102인지는 늘 궁금했지만,103이면 안되는 이유가 있는가? 101보충대는??)

그러다 12사단이라는 곳으로 배치받아

강원도 인제군 원통리에 있는 12사단 신병교육대에서 신병훈련을 설날 연휴끼고 7주를 받았다.

그리고 2024년 현재,

그 12사단 신병교육대 바로 옆에

내 처가댁이 있다.

처가가 뭐냐고?

내 아내의 부모님이 사는 곳? 혹은 아내도 자란 그곳???

그렇다.

난 아주 특이하게도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로 유명한

그 부대에서 군생활 오지게 빡세게 하고 나서

정작 처가댁을 내가 신병훈련 받으며

콧물질질 흘리면서, 구보할 때마다

'와 저기 민가는 누가 사는 거지?' 라고 하면서 궁금해했던

바로 그 곳을 처가로 얻었다.

무슨 월세방 얻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여튼 그렇다.

난 내가 나온 신교대옆에 처가댁을 얻었다.

대체 어떻게???

아내를 군대에서 만났다.

그게 가능하냐고?

응 가능하다.

설마???

니다. 그런 설마.

난 군대에서도 열심히 기독교 종교활동봉사에 힘을 썼고,

그래서 일요일이면 부대 바깥에 있는

작은 마을 교회 '독수리교회'라고 불리는 곳에서 종교활동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냥 1시간짜리 예배만 드리고 바로 부대복귀하는 거라면 지금의

아내와 연결될 인연조차 없었겠지만

나는 대 기독교군종과 함께 토요일도 외출을 나가서 교회청소 및 일요일 예배준비를

도울 수 있었고, 일요일에도 예배 후에 성가대 연습 등 점심까지 먹고 올 일이 많았다.

하긴 생각해보니 그래도 인연은 인연이다.

아내는 그 동네에서 어릴적 부터 자랐지만

이미 사회생활을 시작하여 인천에서 일자리얻었었다.

그런데 하필? 내가 군대말년생활을 보내던 그 때쯤 어떤 사정에 의해

잠시 일을 쉬고 고향으로 돌아와

고향 동네 교회에서 청소년부 아이들 교사로 봉사하고 있었다. (청소년부라고 해도 5명 정도?)

즉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난 군교회에서 지금 아내를 처음 만났고,

아내는 강원도 산골처녀라고 생각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내 눈에는

세련되고 이뻤다.

반면 나는 인생 최대 굴욕기라 할만큼 강원도 칼바람에 망가질대로 망가져

강원도 산골이라는 편견의 시선으로만 본다면 서울출생인 내가 오히려 강원도 산골총각이고

아내가 서울의 새침한 처녀로 보였다.

여튼 나는 군교회봉사로, 아내는 지역교회 청소년부 교사로 봉사하다가

만나게되었고, 그렇게 인연이라는게 생겼다. (인연이라고 했지 잠자리라고 안했다. 괜히 읽으면서 음란마귀가 들어온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쫒아낼지어다. 아멘)

사실 아내와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한 것은 제대 후였다.



흠.... 군생활 다 끝내고 사회에서 아내와 어떻게 만나게 되고,

어떻게 신림동에 들어가고

어떻게 첫째까지 나았는지 다 쓸 생각이는데

생각보다 길어졌다.

다음편으로 잘라서 간다. 1-1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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