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이윤수

이국의 낯선 하늘을 가득 채우며 하얀 눈이 내린다. 흰 눈을 밟으며 누군가는 미끄러질까 두려워하고 누군가는 교통체증에 짜증을 내며 누군가는 애인과 멋진 데이트를 계획하고 나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시골 역에서 보따리를 들고 눈을 맞으며 기차를 기다리던 장면을 기억한다.

아직 삶을 돌아볼 때는 아니지만 나는 군인과 회사원, 은행원, 운전기사, 교사로 지금까지 평생 어디에서든 단 한 번도 결근을 하지 않고 나름 열심히 살아왔고 그중에서도 교사로 가장 오랜 기간 일을 하면서 단순한 지식 전달자가 아니라 제자들의 삶에 긍정적 변화를 이끄는 스승이 되고 나아가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려고 노력을 했지만 후세들이 변화하는 멋진 사례를 보기란 쉽지가 않았고 오히려 같은 잘못을 반복해서 저지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꾸만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자조를 하게 되고 전교조 활동을 통한 사회변혁도 권력과 이권을 목적으로 삼아 정치가로 출세한 옛 동료들에 의해서 본질이 왜곡되는 것을 보면서 내 삶이 이룬 것이 과연 무엇인가 회의감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헤겔의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이행법칙'과 지눌의 頓悟漸修에 그 해답의 실마리가 있음을 알았다.

인류 특히 과학의 역사는 혼돈의 세상 속에서 규칙과 법칙을 찾아내려는 노력이었고 그를 통해서 문명과 진보가 이루어졌으며 그 법칙은 곧 미래를 예측하는 기술이 되어 성공의 방편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인과법칙과 인본주의, 실용적 합리주의는 근대 이후 모든 학문과 사회제도의 근간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특히 근래 카오스 이론의 등장과 빅 데이터의 활용은 인간의 무지로 인해 우연으로 보였던 영역까지도 통계적 추론으로 분석하기에 이르렀고 뇌 과학의 발달로 인간의 감정과 행동의 동기를 파악하고 통제하며 CRISPR 유전공학으로 생명체의 본질까지도 조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인간의 과학과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반면에 양자물리학은 전혀 예측할 수 없으며 합리적이지 않은 모순이 또한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 모순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엔트로피 증가 법칙과 붉은 여왕의 가설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멸 혹은 변화하지만 그 변화를 인과관계로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또한 일대 일로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모든 현존의 내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양적 변화의 축적이 있어야만 본질과 구조에 있어서의 질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르며 내가 어느 날 호숫가를 산책하다가 던진 돌 하나의 파문마저도 태평양 건너 태풍의 한 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인간의 판단으로 봤을 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내 삶의 매 순간의 노력과 족적이 무의미하지는 않은 것이다. 단지 우리는 그 결과를 보지 못할 뿐이고 그 결과는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수 없이 많은 다른 변수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종착점이 없는 끝없는 여로를 갈 뿐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사고와 인식과 판단과 행동은 각자의 유전과 경험과 환경에 의해서 철저히 구속을 받기에 개인의 자유의지에는 인류의 집단적 의지가 배어들어 있을 수밖에 없으며 그 행동의 결과마저도 각 개인이 예측하거나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각 개인이 자신의 의도나 행위의 결과를 인과론적으로 보겠다는 것이 잘못이고 어쩌면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생각 자체가 오만인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 인간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에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의 판단을 하고 변증법적 상호 수정 과정을 거치면서 정성을 다해 지속적인 노력을 하는 것까지이며 다만 그 과정 속에서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오늘을 가족과 또 이웃과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뿐, 그 행위의 결과는 오로지 다른 사람들(또는 자연과 신)에게 맡겨야 하고 그 평가에 대해서도 아무런 변명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도 인과의 고리를 끊으라며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 했고 예수님도 천국은 마음이 가난한 자의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완벽하게 비울 때 비로소 누구나 삶의 허무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천지에 온종일 눈이 내리고 아름다운 음악이 가득하다.

(참고문헌 ; 리처드 도킨슨, 이기적 유전자, 2006, 을유문화사

제레미 리프킨, 엔트로피, 2015, 세종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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