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우연히 동사무소에서 만난 졸업생을 통해서 몇몇 제자들과 연락이 닿았다.
어느 날 누가 칠판에 '선생님 바보'라고 써 놓았는데 내가 화를 내지 않고 '이걸 어떻게 알았지?'라고 응수를 해서 모두 깔깔대고 웃었던 이야기, 초코파이 생일잔치 때 책받침에 돌려가며 쓴 글이 너무 짧아서 누구는 서운했다는 이야기, 연구수업 때 갑자기 내가 영어로 수업을 진행해서 킬킬대고 웃었던 이야기, 일찍 등교해서 칠판에 'Early birds catch the bugs.'를 써 놓고 나에게 칭찬받아서 좋았다는 이야기, 나에게 주려고 산에서 밤을 줍다가 모기에게 뜯기고 뱀에게 놀란 이야기, 같이 서울의 대학교 구경 갔다가 오히려 좌절했다는 이야기, 짝 축구를 하다가 누구는 좋아하던 누구랑 짝이 되어서 기뻤는데 막상 상대방은 싫어서 손가락 끝만 잡았다는 이야기, 꼴찌를 해서 나와 나머지 공부하던 누구는 사실은 큰 식당을 물려받게 되어 있어서 공부를 잘할 필요도 없었다는 이야기 가출한 친구 설득하려 잠복했던 이야기, 누군 어느 대학 가고 누군 어디 취직했다는 등등... 모두들 자신들이 기억하던 학창 시절의 추억을 나누다 보니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들이 그들에게는 잊지 못할 소중한 삶의 한 조각이었고 나 역시 그때를 회상하며 잠시 행복에 잠겼다.
어려울 때 찾아갈 수 있는 존경하는 스승이 일생에 하나도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동안 내가 큰 인물을 만들어 내거나 누군가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어주지는 못했을지라도 이렇게 많은 제자들에게 작은 추억과 행복을 만들어 준 것만으로도 큰 일을 했다는 뿌듯한 보람도 느꼈다.
맞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 있지만 이처럼 천사도 디테일에 있다. 인생의 불행과 행복은 거창한 명분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일상 속에 숨어있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하지만 서운한 말 한마디에 상처를 입기도 하고 라디오에서 우연히 좋은 음악을 들었을 때, 쉬는 시간에 커피와 함께 먹는 모카 빵의 달콤한 향기, 일을 마치고 하는 가벼운 수영, 하이킹 후 마시는 시원한 물 한 모금, 저녁노을이 예뻐서 생각났다며 걸려온 벗의 전화... 이런 작은 행복들을 별 것 아니라고 지나치면 삶 전체의 의미와 행복과 가치를 놓치는 것이다.
인생은 어쩌면 모래시계와 같다. 한쪽에는 과거의 추억이 담겨 있고 다른 한쪽에는 미래에 대한 계획과 희망이 담겨있다. 시간의 모래는 미래에서 과거로 흘러가고 갈수록 희망은 줄어들고 추억이 쌓이는 것이다. 그래서 늙는다는 것은 나이가 많은 것이 아니라 희망보다 추억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삶의 의미와 행복은 희망에도 추억에도 있지 않고 흘러가는 지금 이 순간의 모래 하나하나에 어떤 색깔을 입히느냐에 있는 것이다.
인간은 생존욕구에 따라 움직이는 다른 생물과 달리 꼭 최종 목표를 달성했을 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 그 자체에서 보람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이는 상상력으로 장기계획과 협력을 가능하게 한 뇌 진화의 결과로 우리에게는 엄청난 축복이다. 즉 우리는 삶의 매 순간순간 사소한 성취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매 순간순간 성취감을 느끼고 다른 사람과 교류를 통해 행복을 주고받으며 삶을 풍요롭게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잘 돌이켜 보라. 음악, 음식, 옷, 집, 책, 호수에 비친 햇살, 영화, 휴대전화 등등 이 순간 내게 행복을 주고 삶을 풍요롭게 한 그 모든 것들에 자연과 다른 사람들의 손길과 정성이 담겨있지 않은 것이 단 하나라도 있는지... 그러니 감사하라...
그대가 있어 나 지금 행복하다고...
그리고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원한다면 소소한 일에 성실하고 작은 것을 소중히 하고 내 주변을 세심하게 보살펴야 한다.
(참고문헌;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2015, 김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