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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주 Nov 16. 2023

주님의 덕

15년 전, 가을이 깊어지는 어느 날이었다.

 나와 아내는 각자의 직장에서 연차를 받아 새벽 일찍 일어나 원주의 공군체력단련장에서 정년퇴직한 선배 부부와 골프를 즐기고 있었다. 모처럼 야외에서 상쾌한 공기를 마시면서 좋은 사람들과 같이하는 골프는 즐거웠다. 

원주공군체력단련장


3~4홀 지나고서 그늘 집에서 간단한 아침을 먹고서 다음 홀을 향하여 가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린다. 작은 딸 나리에게서 온 전화다. 안 좋은 생각이 든다. “나리야 왜?”하면서 전화를 받으니, “아빠 어떡해! 나 이제까지 잤어. 지금 시간이 몇 시야?”한다. 시계를 보니 10시 반이다. “아니 10시 반인데 왜 이제까지 늦잠 잤어?” “엉엉엉, 어제 3시까지 공부하다가 알람 맞춰놓고 잤는데 지금까지 잤어. 엉엉엉.” 

어젯밤, 고3으로 수능시험이 얼마 안 남은 나리에게 “낼 아침 엄마 아빠 일찍 나가야 되니까, 늦잠 자지 말고 식탁에 밥 차려 놓을 테니 꼭 먹고 가렴.”하고  이야기해놓고서 우리는 골프장에 나왔던 것이다. ‘어휴 전화를 해서 일어났는지 확인을 해 봐야 했는데...’ 아찔하였다. 1차례의 결석이나 지각을 해도 바로 내신 점수에 반영이 되어 진학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는 사실에 아찔하였다. “아니 나리가 지금까지 늦잠을 자도록 하면 어떡해?” 옆에 있던 아내에게 신경질을 부리니, 아내도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한다. 

나와 아내는 공을 치는 둥 마는 둥 홀을 돌았다. 선배 부부도 우리의 눈치를 보면서 라운딩을 하니 썰렁하고 어색한 분위기로 바꿨다. 나는 그들에게 미안함을 표시하였지만, 골프장을 돌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다. 아내는 뒤에서 *1단 묵주를 꺼내 들고 묵주기도를 시작한다. 나는 그러한 모습에 짜증이 나서, “아니 이런 판국에 묵주기도 한다고 사태가 해결이 돼?”하였다. 아내는 짜증을 내는 나를 힐끗 쳐다보며 아무 말 없이 간절히 기도를 하면서 따라온다. 나리와의 통화 후 3홀을 돌고서 다음 홀로 향하는 중에 다시 나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주: 묵주란 구슬이나 나무 알을 열 개씩 구분하여 다섯 마디로 엮은 것에 십자가가 달려있는 성물(聖物)이며, 이를 사용하여 성모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를 묵주기도라 한다. 1단 묵주란 상기 다섯 마디의 묵주를 1마디로  만들어 십자가를 달아 간편하게 소지하고서 기도를 하는 묵주를 말한다. 

5단 묵주와 1단 묵주


나리는 머리도 제대로 빗지 못하고 집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안에는 가끔 얼굴을 마주쳤던 아주머니가 타고 있었다. 그 녀가, “너 왜 이제야 학교 가니?” 하고 물어봐서, 나리는 흐느끼면서, “늦잠 자서 이제야 갈려고요.” 하니, “어휴 그래, 내가 차로 학교로 데려다줄 테니 빨리 가자.” 하고서 학교까지 바래다주었다. 

조회 때, 평상시에는 출석 체크를 하시던 담임 선생님은 그날따라 학생들에게 전달 사항이 많아 이를 하지 않았으며, 그사이에 들어온 두 과목의 선생님들도 출석 체크를 하시지 않았단다. 극히 드문 경우였다.  “친구들은 내가 학교에 오지 않은 것을 선생님들에게 말하지 않아서 지각으로 걸리지 않고서 평상시처럼 학교생활을 하고 있어요.”라는 연락을 받고서 침울하였던 분위기가 반전될 수 있었다. 


아내의 간절한 묵주기도 동안에 이런 아름다운(?) 일이 일어났다. ‘아주머니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와 천사 같은 친구들 덕에 나리는 큰 위기를 벗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의 묵주기도를 힐난하였던 일이 미안하여 나는 아내의 손을 살포시 잡으며 “미안했어!”하고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니 아내는 살짝 눈을 흘기면서 말을 한다.

“주님의 덕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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