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에서 책상에 등지고 의자에 앉아 양발을 발걸이 의자에 걸치고 컴퓨터에 연결된 스피커에서 은은히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선 낮잠을 자고 있는 중, 세 돌이 아직 안된 큰손자 원이가 서재 문을 열고서 받침이 빠진 말을 한다.
어제 작은 딸이 사위, 두 손자와 함께 집에 와서 머물고 있는 중이다. 아침 일찍부터 거실유리를 통하여 보이는 놀이터에 나가자고 졸라대는 원에게 비가 오고 있으니 비 그치면 나가자고 약속을 하였다. 서재에 들어와 쉬고 있는 사이에 비가 그치기를 학수고대하다가 그치자마자 놀이터로 나가자고 원이가 졸라댄다.
“엉, 비 그쳤어. 그럼 나가야지”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서 손자의 손을 잡고 나가려니, 거실에서 작은 손자 호야를 돌보고 있던 사위가 달려와 원에게 양말과 신발을 신겨준다. 손자의 손을 잡고 앞의 놀이터로 내려갔다. 땅과 놀이터가 다 젖어있다. 회전 자전거에 올라타려다 “비다.”하면서 뒤로 물러난다. “원아, 저쪽 놀이터로 가자.” 생각나는 것이 있어 손자의 손을 잡고서 아파트단지 입구에 있는 놀이터로 향했다. 가서 보니 거기도 놀이기구는 다 젖어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놀이터를 둘러싼 오르락내리락 우드데크길이 있다. 뛰는 것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원이의 손을 잡고 그 길을 총총 뛰면서 여러 번 돌았다. “아 재미 따!” 하면서 즐거워하는 손자와 함께하는 뜀박질이 나름 즐거웠다. 오르막내리막 달리기에 자신이 붙은 손자는 내 손을 놓고, “하부, 가!”한다. “원이 혼자 뛸 거야?”하니, “엉”한다. 손을 놓아주니 혼자서 그 길을 뛰면서 매우 즐거워한다. 나는 데크길 밑에서 원이를 쫓아다닌다. 2~3바퀴만 돌다 그만두겠지 했지만 10여 바퀴 돌면서도 전혀 지루해하지 않는다. 따라다니다 보니 지쳐, “그만 돌고 다른 놀이하자.”하니 아쉬운 듯 데크길에서 내려온다. 미끄럼틀에 올려주니 바닥의 물을 보고서 “비다.”하고 타지 않고서 내려온단다. 다시 오르막내리막 길을 몇 번 더 돌다가, 단지의 중앙 길에 위치한 커낼(canal)의 분수대에서 물이 올라오니 커낼로 가서 손으로 물을 떠가면서 물장난을 한다. 사위와 딸이 좀 더 쉴 수 있도록 손자와 시간을 보내야 한다. 커낼의 옆에 있는 인도에 물이 고여 있는 곳으로 간다. 내가 "첨벙첨벙"하니 손자는 물 가운데로 들어가서 발로 물을 철벅거린다. 같이 물장난을 한참 하다 보니 원이의 신발과 바지가 다 젖었다. 감기가 들면 안 될 것 같아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니 안 가겠단다.
오르막내리막 우드테크 길을 달리는 손자
물장난하는 손자
“할아버지와 과자 사러 갈까?” 하니 “그래” 하면서 손을 내민다. 손을 잡고 동네 ‘*마트’로 가서 “원이 먹고 싶은 거 골라봐.” 하니 한참을 이 과자 저 과자를 만지면서 망설이다가 조그만 플라스틱 원통을 집어든 후 흔들어대니 ‘사각사각’ 소리가 난다. 그 소리가 마음에 들었던지 그것을 사겠단다. 보니 ‘롯* 초코시리얼’이다. 통의 표지에 ‘우유에 타먹는 시리얼’이라 적혀있다. 손자에게 단 과자를 먹이기 싫어하는 딸이 무어라 할까 걱정되었지만 카드로 지불하고 원에게 주니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과자를 들고 앞서간다. 떨어지기 시작하고 있는 낙엽을 밟으면서 시리얼통을 흔들면서 걸어가는 원이를 뒤에서 바라보며 기억의 타임머신을 타고서 60여 년 전으로 날아간다.
원이는 시리얼 통을 흔들면서 걷는다
초등(국민) 학교 2학년 때다.
당시 부모님은 2~3개월 전에 그토록 원하시던 여동생이 태어나 육아와 하시던 사업인 연탄공장의 운영에 정신이 없으시던 시절이었다. 다음 해에는 여동생이 또 태어나 6남 2녀의 대가족을 이루었기에 손자 6명을 돌보는 일은 오롯이 할머니의 몫이었다
그날은 할머니와 신발을 사러 전주 남부시장에 있는 신발가게에 가는 중이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다짐한다. “할무이, 이번에는 꼭 흰 고무신 사줘야 혀. 검정 신은 절대 안 살 거여.”
할머니는, “오야, 알았다. 일단은 가보잔 게.” 하신다.
신발 가게에는 남자 고무신과 여자 고무신을 구분하여 가지런히 정리하여 놓았다.
여자 신발은 가게의 왼편 바닥에 흰색 신과 꽃신으로 구분되어 놓여있고, 그 오른편에는 남자 신발이 넓은 바닥에 펼쳐져 있는데 공간 대부분을 검정 고무신이 차지하고 있고 안쪽의 한쪽 구석에 흰 고무신이 나란히 정리되어 있다.
나는 흰 고무신 있는 곳으로 가 내 발의 크기에 맞는 것을 고르고 있지만, 할머니는 검정 고무신 쪽에서 신발을 고르신다.
당시 검정 고무신은 고무를 한 틀에 넣어서 찍어내는 통고무신으로 여러 조각의 고무를 덧 대여 접착제로 붙여 만든 흰 고무신보다 값은 엄청 싸고 질기기는 2~3배였다.
내가 골라놓은 멋진 흰 고무신을 무시하고 검정고무신을 골라 값을 치르고 그 신발을 들고서 할머니는, “야, 용주야! 가자잉~” 하신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할머니가 들고 계시던 검정고무신을 뺏어 길거리에 내 팽개치면서, “아 x발, 난 다시는 할무이랑 신발 사러 안 온당게.”하며 울부짖는다.
할머니께서는 내 팽개쳐진 신발을 주우면서 나에게 소리치신다, “야 이 썩을 눔아, 니네 애비·애미가 심 들게 돈 벌어서 니네들 키우니라 애쓰는디 돈 함부로 쓰면 되것냐!”
나는 할머니 앞으로 휙 지나가면서 큰소리로 외친다.
“나, 진짜 앞으로 빠꿈이 할무이하고 신발 사러 다시 절대 안 올꺼여.”
검정 고무신
하얀 고무신을 신고 싶어 할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철없던 소년이 어느새 할아버지가 되어, 가슴 밑바닥에서 울컥 올라오는 감정으로 촉촉이 젖어드는 눈길로 손자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