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사는 이들이 진정 와닿게 읽을 수 있는 가이드북을 쓰고자 했고, 평범하게 정보를 나열해서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론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정보보다 가지런히 전하는 각자의 삶이 더 위로가 될 수 있다고 믿어 가이드북에 그를 담고자 했습니다. 각자의 사정으로 지친 ‘혼삶러’ 민성, 동현, 지은, 그리고 그들을 조심스레 덥혀주는 주인장, 어지러운 세상에 홀로 서있는 모든 이를 응원하며, 이 책이 그들의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달래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민성
‘돈’은 분명 현대 사회,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없는 요소이지만, 꼭 돈이 ‘많아야지만’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적게 소비하지만, 그래도 스스로 분명히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생활과 삶. 그것을 소망하는 분들이 공감할 수 있고, 또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을 작성하고자 하였습니다. 당신의 ‘저소비로도 행복한 혼삶’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기를 소망합니다. -동현
안내서×소설은 꽤나 이질적이고 오묘한 조합이지만, 이를 통해 1인가구로 살아가는, 혹은 1인가구를 희망하지만 걱정이 많은 개개인의 이야기에 더욱 귀기울일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또한 매력적인 혼삶은 젊은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기에, 혼삶의 문제점이 특히나 크게 다가올 노년층에게 그들 역시 혼삶을 조화롭게 누릴 수 있다는 용기를 주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보았습니다. 이 글이 저에게 그러했듯 여러분들께도 이해와 용기의 촉매가 되면 좋겠습니다. -지은
좋은 위로를 찾기 힘들어진 요즘입니다. 그래도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수단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노래, 공연, 그림, 글, ... 이 글은 속깊은 대화와 따뜻한 요리로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혼삶에 들어서려고 하는 여러분에게도 주인장과 세 손님이 전하는 위로가 닿아, 여러분을 포근히 안아줄 수 있길 바랍니다. 글에서 말하는 혼삶이 전형적인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나름의 삶이 있듯이, 나름의 혼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있겠죠. 그래도 생각보다 닮은 구석이 많은 우리들이니, 글에서 이야기하는 혼삶이 여러분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혼삶식당에서 좋은 시간 보내시길. -우진
하나. 주인장 우진은 신림동 골목길에서 <혼삶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혼자 이것저것 다 해보면서 혼삶에 정통한 인물. 손님들의 혼삶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따뜻한 혼밥과 조언을 건넨다.
두울. 첫 손님 지은은 은퇴를 앞둔 61세 고등학교 교사. 딸의 독립과 퇴직을 앞두고, 제2의 삶에 대한 고민이 많다. 나이는 들었지만 돈과 건강이 있기에 여전히 앞날이 창창할 예정이다. 혼삶이 궁금하지만, 고독사는 무섭고 요양원은 싫다.
세엣. 두 번째 손님 동현은 34세 저소득 직장인. 월소득 150만 원 미만, 학자금 대출과 월세로 빠듯하여, 개인적으로 쓰는 돈이 한 달에 50만 원이 되지 않는다. 이 상황은 좀처럼 나아질 것 같지 않고, 지금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삶, 행복한 삶이 아닌 그저 생계를 위한, '살기 위해 사는 삶'에 이미 지쳤다.
네엣. 세 번째 손님 민성은 22세 인문대 휴학생. 글을 쓰겠다는 막연한 꿈을 갖고 군대도 미룬 채 휴학을 했다. 자취방에서 항상 작업과 잠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관계밖에 남지 않은 인간관계에 지쳐 고독을 택했지만, 이젠 그 외로움에 지쳐간다.
차가운 혼밥보다는 따뜻하게 즐거운 혼밥이 좋겠죠.
- 2020년 어느 날, 혼삶식당 주인장 왈.
신림동의 네 골목길이 만나는 작은 교차로. 거리는 조용하다. 낮의 더운 공기는 점점 사라지고 찬바람이 빈자리를 메운다. 하나 둘 걷거나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지나간다.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양파며 무가 담긴 상자를 낑낑대며 안고 와 교차로 한구석 작은 건물의 문을 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황빛 조명이 열린 창문 너머로 따뜻하게 새어 나온다. <혼삶식당>이라고 음각으로 적힌 나무 간판이 빛난다. 남자는 가게 안에서 여유롭게 움직인다. 거리의 적막을 깨고 존 콜트레인이나 빌 에반스의 음악이 가만가만 흐른다. 향긋하거나 구수한 냄새도 함께다. 이따금 가게 주인장의 그림자가 창문 틀 위에 드리워 손님이 오는지, 거리에 누가 넘어져 있지는 않은지 두리번 두리번 살핀다.
불이 켜진 지 20 분이나 지났을까, 어느새 가게 문 앞까지 다다른 옅은 노을과 함께 오늘의 첫 손님이 들어선다. 흰 머리가 희끗희끗한 손님은 주인장과 꽤나 잘 아는 사이인 눈치다.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까딱 목례를 하더니 가게 안으로 들어온다. 작은 가게 안에는 조리대에 바로 연결된 니은 형태 – 한쪽 선분이 훨씬 길다 - 식탁 앞에 세 개의 의자가 놓여 있다. 오늘의 첫 손님이자 가게의 첫 단골이었던 지은 씨는 어김없이 맨 안쪽 의자에 자리잡는다.
“오셨어요?”
“그래요, 오늘은 날씨가 조금 추워! 따뜻하게 부탁해요.”
웃으며 끄덕이는 주인장 뒤로 가게 문이 열리며 같은 건물 4층 원룸에 사는 동현 씨의 모습이 보인다. 주인장과 안면은 있지만 그닥 친하진 않은 듯, 짧게 인사하며 문 쪽 자리에 앉는다.
“안녕하세요.”
“네 어서 오세요.”
“…혹시 여기 메뉴판이 어디에…”
눈치를 보던 두 번째 손님이 조심스레 묻는다.
“여긴 정해진 메뉴가 따로 없어요, 주인장 제멋대로야.”
껄껄 웃으며 단골손님이 답한다.
손님이 온 것 치고는 한가하게 있던 주인장도 웃으며 말한다.
“대신 뭐든 맛있게 해드려요 안 그래요?”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는 지은 씨. 동현 씨는 갸우뚱하며 묻는다.
“그럼 여기는 오마카세 같은 식당인가요? 음… 그러면 요리가 나오는 기준이 뭐예요?”
“굳이 따지자면 가정식?”
주전자에서 삑삑 소리가 들리자 대답하던 주인장은 급히 몸을 튼다.
지은 씨가 동현 씨 뒤편을 가리키며 부연한다. “저 안내판을 보라구요!”
그제야 고개를 주억이는 동현 씨.
“하하, 무슨 이야기를 들려드려야 하나…”
그때 가게 문이 다시 한번 드르륵 열리고, 어느새 어둑어둑해진 거리를 뒤로 하고 대학생 한 명이 들어온다. 어색한 표정으로 먼저 앉아 있던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는 민성 씨. 세 번째 손님은 세 자리 중 남아 있는 가운데 자리에 앉아, 역시 눈으로 메뉴판을 찾는다. 눈을 마주치자, 뒤쪽 안내판을 손으로 가리키는 동현 씨. 안내판을 읽은 민성 씨는 소리없이 ‘오-’ 입모양을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자자, 다들 어서 오세요. 이건 웰컴 드링크입니다. 매실차에요.”
주인장은 김이 나는 차 세 잔을 손님들 앞에 내려놓는다. 작게 감사합니다, 하고는 차를 홀짝이는 민성 씨, 어색하게 손을 뻗어 - 주인장이 찻잔들을 놓은 곳에서 제일 먼 자리에 앉았기에 - 찻잔을 가져가서는 손 안에서 굴리며 온기를 느끼는 동현 씨, 그들보단 편하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차향을 맡는 지은 씨다. 그들을 보며 빙그레 웃는 주인장.
“오늘은 누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하시려나? 여긴 전기포트도 있고, 오븐도 있고, 스토브도 많아요. 차가운 이야기, 슬픈 이야기, 씁쓸한 이야기 모두 따뜻하게 요리해 드릴 테니, 편하게 말씀하세요.”
주인장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민성 씨 쪽에서 확실한 꼬르륵 소리가 들린다. 어색하게 웃는 민성 씨, 입을 우물우물 하더니 “제가 먼저 얘기해볼까요?”하고, 이야기를 꺼낸다.
민성 씨는 사실 타인과의 대화에서 항상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고민하는 습관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그다지 듣고 싶지 않을 거라는 짐작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먼저 입을 뗀 것을 후회하며 잠깐 망설인다. 하지만 밥은 먹어야지 않겠는가? 게다가 어차피 (높은 확률로) 또 만날 일도 없을 사람들,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에 덜어내지 않고 말하기로 했다.
“저는 요 앞 자취방이 잔뜩 모인 곳에서 벌써 2년이 넘게 혼자 살고 있어요. 대학에 입학한 후로는 계속 살고 있네요. 2학년쯤 가려던 군대도 꿈을 핑계로 미루고 벌써 3학년 나이가 된 채 여기 앉아있네요. 여기 있는 분들 앞에서 할 말은 아닌 듯하지만, 시간 참 빠른 거 같아요.”
‘너처럼 어린 나이에 그게 무슨 말이냐, 나는 벌써…’와 같은 말이 나오진 않을까 싶어 민성은 잠깐 하던 말을 멈추고 주변의 표정을 둘러봤다. 그런 기색은 없었다.
“어떤 꿈이었나요? 실례가 아니라면 듣고 싶은데.” 조리대 위에 손을 얹은 채 민성 씨의 말을 듣던 주인장이 싱긋 웃어 보이며 물었다. 민성은 이런 얘기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생각하다가도 말을 꺼낸다.
“조금 부끄럽지만,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에 글을 읽고 쓰고 있어요. 온종일 집에서 글만 보고 있자니 눈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성한 곳이 없네요. 가끔은 밤을 꼴딱 새우기도 하고, 또 언제는 온종일 누워있기도 해요. 음… 말하면서 생각해보니 오늘처럼 제대로 된 끼니를 먹으러 나온 것도 오랜만이네요.”
“대학생이라면서요? 모임 같은 것도 잦지 않나요?” 민성 씨는 자신보다 열 살 남짓 많아 보이는 동현 씨의 질문에 씁쓸한 웃음을 보이며 답했다.
“신입생 때야 사람들도 자주 만나고 했죠. 근데 2학년에 들어서부터는 그런 만남이 부쩍 줄었어요. 아무래도 다들 바쁘고 그렇다 보니 말이죠. 술자리에, 학생회에, 동아리에… 참 바쁘게 살았었는데 다 지나고 난 지금에야 생각해보면 모두 잠깐의 꿈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그런 추억 좋네요. 전 너무 옛날의 일이라 잘 기억도 안 나는데, 즐거우셨겠어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지은 씨가 말을 얹어주었다. 즐거웠나? 민성은 잠깐 고민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흠흠, 사실 저는 휴학을 했어요. 아까는 꿈 때문이라고 했지만 어쩌면 사람에 지쳐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꽤 스트레스였던 거 같아요. 많은 사람과 부딪히며 지낼 땐 역시 신경 쓸 부분도 많았고, 때론 즐겁지 않을 때도 즐거운 듯 시늉했어야 했거든요. 그래서인지 휴학을 하고 완전히 혼자 살면서 편안함을 느낄 때가 많아요. 방학 때마다 가던 본가도 이런저런 핑계로 안 가면서 더욱 그런 거 같네요. 보장된 자유로움이란 느낌? 비슷한 거 같아요.”
민성은 본인답지 않게 많은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매실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어느새 주인장은 어떤 요리라는 말도 없이 음식 준비를 시작했다. 손을 바삐 움직이면서도 민성 씨의 얘기는 계속 듣고 있는 듯,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이전보다는 더 나은가요?”
잘 모르겠다. 민성은 사실 혼자 살게 된 이후로 ‘충만’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본인이 자고 싶을 때 잠들고, 작업하고 싶을 때 맘껏 작업하는 삶을 바랐던 건 맞지만, 지금의 삶은 바라던 모습과는 달랐다. 자고 일어나 작업할 자신만의 방이 주어진 민성에게는 거실이 없었다.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민성 씨는 웃었다.
“하하 아니요, 아무래도 아니네요. 이렇게 되고 나니 제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제가 원하던 건 적당한 거리감과 고독을 누릴 수 있는 삶이지, 외로움은 아니었나 봐요. 적당히 혼자 사는 삶을 사는 건 참 힘드네요. 사람을 만나지도 않으니 밥도 매번 편의점 아니면 배달 음식이고, 가끔 푸념을 늘어놓고 싶을 때 술 한 잔 하자며 불러낼 친구도 없어요. 자유로워서 좋다가도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지쳐간다는 생각에 혼자 살기는 참 힘들다는 생각도 해요.”
민성 씨가 고개를 숙여 매실차를 바라본다. 영 식어버렸다고 생각할 때, 주인장이 주전자를 들이밀며 잔을 채워주었다.
“감히 어떤 감정일지 가늠은 안 되지만, 그럴 땐 여행이라도 떠나보는 게 어떨까 싶네요.”
주인장은 민성 씨를 배려하는 듯 말을 건넸지만, 그라고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여행도 다녀와 봤죠. 근데 등록금 내기도 벅찬 통장 사정에 월세와 공과금까지 내고 나면 생활비도 빠듯하더군요. 블라디보스토크라는 곳으로 여행을 갔었어요. 큰맘 먹고 다녀온 여행도 잠깐은 너무 좋았지만, 다녀온 후에 통장 잔액을 보며 더 힘들기만 하더라고요. 해외여행은 이제 꿈도 안 꿔요.”
“그렇죠, 혼자 사는 대학생에게 해외여행 갈 여유가 어딨겠어요. 근데 국내 여행으로 눈을 돌리면 꼭 그렇지도 않더라구요.”
동현은 배려심에 말을 건넸지만, 민성에게 국내 여행은 뻔한 여행지에 돈과 시간만 쏟는, 관광객 사이에서 더욱 피곤해지는 그런 것이었다. 탐탁지 않아 보이는 민성 씨의 표정에 동현은 자신이 이전에 국내 여행을 즐겁게 다녀온 경험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한국관광공사에서는 청년들이 국내 여행지를 다녀와서 직접 해당 관광지를 어떻게 홍보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제안할 수 있도록 하는 ‘상상하는 여행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요. 여행 경비를 포함해서 콘텐츠 제작에도 지원이 이뤄지니까 한번 찾아보면 좋겠네요. 아, 글을 쓰는 직업이 꿈이라고 했나요? 어쩌면 관심사랑도 맞을지 모르겠네요”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지은 씨는 무언가 떠올리고는 싱긋 웃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번에 휴가를 내고 혼자 여행을 떠났던 적이 있어요. 고작 이틀의 여행이었지만 바다를 보는 동안은 모든 게 가라앉는 듯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죠. 생각보다 돈도 적게 들었어요. 조금만 잘 둘러보면 적은 경비로 다녀올 수 있는 여행지가 많답니다.”
민성은 살짝 모아둔 통장 잔액을 떠올리며 여행을 갈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렇다 해도 여행도 혼자, 돌아와도 혼자라는 게 참 걸리네요. 떠나있는 동안은 잠깐 좋을지 몰라도 돌아오면 결국 똑같은 일상이 기다리니까요.”
주인장은 요리를 계속하며 골똘히 할말을 정리했다.
“민성 씨 말을 듣다 보니 혼자 사는 사람에게 혼자 떠나는 여행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여행에 관한 제가 좋아하는 말이 하나 있는데, 우리는 질문을 가진 채 여행을 떠나고, 기존의 질문과는 전혀 다른 질문을 얻은 채 돌아온다는 말이에요. 지금의 삶과 여행을 다녀온 뒤의 삶이 겉보기엔 똑같을지라도, 어쩌면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다녀와보는 건 어떨까요? 민성 씨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 했으니까 어쩌면 혼자 집에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혼자 여행해 보는 게 더 풍부한 글을 만들어내는 양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주인장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민성 씨다. 주인장은 미소 지으며, 어둡지만 오랜 정이 담긴 듯한 색깔의 나무 쟁반을 민성 씨 앞에 내려놓는다. 쟁반에는 세모난 주먹밥과 국, 반찬들이 놓여 있다.
“호두하고 표고버섯을 다져 넣은 현미주먹밥에 들깨배춧국, 연근전하고 당근 샐러드, 고추하고 명이나물 장아찌에요. 이 주먹밥 되게 간단해요. 호두하고 버섯하고 다져서 볶은 다음에 현미밥에 볶은 거 넣고 간하고 깨 뿌려서 뭉쳐 주면 끝! 어디 하루 이틀 여행 갈 때 이런 거 김으로 포장해서 만들어 가면 출출할 때마다 먹기 딱 좋습니다. 혼자라도 주먹밥이 함께 있으니 전혀 외롭지 않아요. 저도 많이 해먹었어요.”
“연근은 오랜 시간 진흙에 묻혀 맛을 쌓아가는 뿌리에요. 감칠맛, 단맛, 쓴맛, 고소한 맛… 다른 어떤 재료도 따라할 수 없는 맛이 쌓여 있죠. 계속 쌓아가다 보면 민성 씨 글에 담긴 맛도 알아 봐주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겁니다. 연근은 결에 흔들리면서, 진흙 속으로 나아가면서 한 가지 두 가지 점점 맛이 깊어진다는 점도 기억해주세요.”
환하게 미소 짓는 민성 씨. 즐거워 보인다. 주먹밥을 한 입 베어 물고는, 우물우물 씹으며 “맛있어요!” 외친다. 주인장 얼굴에도 환하게 웃음이 퍼지고, 민성 씨의 머릿속에는 어느새 ‘어디로 떠나볼까?’하는 생각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을 봉평, 너른 바다가 물결치는 제주, 시끌벅적 온정이 넘칠 다낭… 민성 씨가 생각만 하던 여행지들이 뭉실뭉실 떠오른다. 혼자 여행하는 게 대수인가, 즐겁게 마음이 부풀 수 있는 삶이면 그만이지. 민성 씨는 생각한다.
주인장은 ‘이제 여러분 차례에요’하는 듯이 빙긋이 웃으며 동현 씨와 지은 씨를 바라본다. 똑같이 웃어주는 지은 씨. 멋쩍은 듯 웃음짓는 동현 씨다. 주인장은 그런 그들의 잔에 매실차를 한 잔 더 부어준다.
“다음엔…제가 얘기를 해볼까요.” 이번엔 동현 씨가 조용히 말문을 연다. “저도 슬슬 배가 고파졌기도 하고… 왠지 여기 있는 여러분들은 제 얘기를 잘 들어주실 것 같아서, 괜시리 얘기가 하고 싶어지네요. 하하.”고개를 끄덕이는 주인장과 지은 씨, 먹던 전도 내려놓고 귀를 기울이는 민성 씨다.
“그냥 제가 어떻게 사는지…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얘기를 어디 가서 꺼내본 것도 거의 2년만이라. 음. 뭣부터 얘기드려야 좋을까.”동현 씨는 머뭇머뭇, 이야기를 시작한다.
“일단 저는…주인장님도 이미 아시다시피, 이 건물 4층에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 동현 씨는 괜히 멋쩍게 주인장을 향해 웃어 보인다. 주인장은 이에 화답이라도 하는 듯, 싱긋 웃어 보인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지는 오래되었지만, 여기 온 지는 6개월이 채 되지 않았지요. 지금까지 서울에서 살아본 곳만 손에 꼽아도 한 10개는 넘을 거 같습니다. 서울은 여기나 저기나 매년 월세 가격이 올라가서, 감당하기 어려워질 때마다 계속 거처를 옮겼거든요.” 매실차를 홀짝이는 동현 씨.
“사실 여기도 1년이나 채우고 떠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월세가 더 올라간다면, 다음달이라도 영락없이 떠나야 되겠지요…허허. 저는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는데, 이게 크기가 작은 기업이다 보니 아무래도 월급이 그렇게 넉넉하지가 않거든요. 시절이 좋으면 한 150만원? 사실 월세만 낸다면 어느 정도 살 만할 텐데, 아직 학자금 대출도 마저 갚지를 못해서… 하다 보면 언젠가는, 월세를 부담 없이 낼 만큼의 여유는 생기겠지, 언젠간 생기겠지…하면서 일은 하고 있습니다만, 좀처럼 여유가 생기지를 않네요.” 그러면서 동현 씨는 하하 웃어 보인다. 조금은 씁쓸해 보이는 웃음이다.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하지만 저도 대출을 빨리 갚고 조금이나마 숨통을 트고 싶어서, 별다른 수가 없으니 소비를 줄이고 있어요. 하루에 두 끼 정도만 먹으려 하고 한 끼는 꼭 가격 싼 인스턴트 식품이나 라면으로 때우고 있죠. 가능한 집에서만 모든 것을 처리하려고 하고요.”
“아이고, 그러면 안 돼요,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젊을 때 잘 먹어 둬야지…” 쯧쯧, 하고 지은 씨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혀를 차며 말했다.
“하하,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맞아요. 지금은 그래도 젊으니까 이렇게 살아도 큰 문제 없지만, 나이가 들면서도 계속 그럴 수 있을지… 그건 저도 걱정스러워요. 그래도 문제 없는 데까지는 해봐야죠.”감사의 표시로 지은 씨에게 살짝 목례를 하고, 동현 씨는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래서 의식주 외에 소비를 할 생각은 거의 하지를 않고 있어요. 사실 혼자 사니까 일하고 와서 식사, 빨래, 청소 같은 기본적인 살림만 해도 잘 시간이 되어서, 소비를 한다고 해도 막상 할 시간도 없지만요.” 동현 씨가 다시 씁쓸한 웃음을 보인다. 매실차를 홀짝이려 잔을 들었지만, 이미 매실차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게 야속해서인지 아닌지. 동현 씨는 조금 슬퍼진 목소리로 얘기를 잇는다.
“그러다 보니 여행이나 공연이나 그런 돈이 급작스레 많이 드는 것들은 꿈도 안 꾸죠. 음악, 만화 그리기, .... 원래 대학교 때는, 독립하고 제가 돈 벌어서 쓰는 때가 되면 시도해보고 싶은 게 참 많았는데, 살림도 그렇고 벌이도 그렇고 혼자 다 하다 보니까 해볼 만한 여유가 없네요. 시간적으로든, 심적으로든요. 돈 벌어서 하고 싶은 것 하는 데는 하나도 못 쓰고, 정말 살아가기만을 위해서 돈을 벌고 있는데, 이렇게 사는 게 맞는지 요새는 좀 의심도 가고 그러네요. 행복하게 살아가려고 사는 게 아니라, 정말 살아가기 위해서만 사는 생활이라는 게…” 이야기를 끝내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는 동현 씨. 가게 안에 잠시 정적이 흐르고, 주방의 소리만이 들려온다.
“하하, 너무 암울한 얘기였나요? 분위기를 너무 죽인 것 같아 조금 죄송스럽네요.”그때 가방에서 무언가를 찾던 지은 씨가 명함 하나를 동현 씨에게 건넨다.
“음? 이게 뭔가요? ‘함께하는 건강계 보험’?” 명함 오른쪽 아래에는 자그마하게 누군가의 이름과 연락처가 적혀 있다. “학생, 아니 학생이 아니지. 그럼 선생? 선생도 아니고… 그럼 뭐라 불러야… 그냥 동현 씨라고 부를게요.”
“하하, 그렇게까지 젊게 봐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네, 편하신 대로 불러주세요.” 동현 씨가 오랜만에 크게 웃는다.
“저는 당장 얘기를 듣자 하니 동현 씨 건강이 제일 걱정돼요. 그렇게 먹고 다니다가 어디 건강에 크게 문제 생기면 어쩌려고 그러시는지… 근데 그렇다고 제가 뭐 밥을 해서 먹여드리거나 할 수는 없고. 제가 드릴 수 있는 도움 중에선 그나마 이게 괜찮은 거 같아서 소개해드리려고요. 사실 그런 건강 걱정은 비단 동현 씨만 하는 게 아니라 혼자 살면서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생활비도 빠듯한데 보험료도 따로 내려니 부담되고 그렇잖아요? 그래서 거기 명함에 적혀있는 그 분이, 주변에 같은 고민을 가진 사람들을 몇 모집해서, 함께 돈을 모아 놓고 누가 급한 건강 문제가 생기면 모금에서 돈을 빌려주는 식으로,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도와주는 ‘함께하는 건강계 보험’을 만들었대요. 처음엔 이혼한 전 남편이 소개해줘서 알게 되었는데, 저는 지금까지도 계속 참여하고 있어요. 혹시 동현 씨도 참여할 생각 있으면 여기로 연락 해보세요. 혼자 살고는 있으시지만, 혼자서 이겨내기에 버거운 것들이 있다면, 우리끼리 도와가면서 함께 이겨내는 것도 분명히 한 좋은 방법이니까요.”
‘함께 어려움을 해결해 보자!’라고 말하는 지은 씨의 눈에서 자신감이 느껴진다.
“오오…이런 것도 있었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동현 씨가 감사하다며 목례를 하자, 이어서 주인장이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주거비를 상당히 부담되어 하시는 거 같은데, 그렇다면 셰어하우스 같은, 공동체주거 생활을 해보는 것도 고려해보시는 건 어때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그런 데가 있는데. 거기서 혼자 살고 있는 제 친구 얘기를 듣자 하니 괜찮은 거 같더라고요. 우선 주거비 걱정은 무조건 덜고 들어간대요. 그 정도로 주거비가 꽤 합리적이고… 함께 사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생필품 살 때도 같이 공동구매 해서 쓸 수도 있고, 밥도 많이 하면 다른 사람한테 나눠주고, 적게 했을 땐 좀 얻어와서 먹고. 그러면서 여러모로 소소하게라도 쓰는 돈은 줄이면서 괜찮은 생활을 할 수 있는 거죠.” 주인장은 국자를 들고 보글보글 끓고 있는 무언가를 후후룩, 맛을 보며 말을 이어 나간다.
“물론 다른 사람들과 그렇게 가깝게 함께 사는 게 잘 안 맞으시는 분도 계시지만, 만족스러워 하시는 분들도 많대요. 뭐, 혼자 살 때만큼 막 자유롭게 지내지는 못하겠지만. 만약 동현 씨가 어떤 부분에서의 자유로움 등등 어떤 혼자 사는 삶의 이점을 공동체생활에서는 잃어버리게 될까 꺼려진다고 하면, 동현 씨처럼 느끼는 사람들과 함께 산다면 분명 그 부분을 서로 존중하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요? 하하. 그러니까 한 번 고려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고개를 끄덕이는 동현 씨. 이번엔 민성 씨가 말을 이었다.
“우선,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다른 건 대학생인 저로서는 아직 겪어보지 못한 것이라 잘 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 살고 있는 게 맞는지, 또 하고 싶은 것을 어떻게 해나가면서 살 것인지에 대해서는 저도 비슷한 고민을 오랫동안 하고 있었어요. 저도 그다지 돈을 많이 벌 수 없을 거 같은데, 그러면서도 하고 싶은 것들을 어떻게 하면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지... 그러다가 찾은 도움이 될 만한 곳이 있어요. 혹시 ‘청지트’라고 들어 보셨어요?”
“청지트? 아뇨. 저는 처음 들어보네요. 그게 뭔가요?” 동현 씨가 갸웃하며 물었다. “청년 지갑 트레이닝센터의 줄임말이에요. 청년들 대상으로 재무 상담을 해주는 곳인데, 여기의 재무 상담은 다른 곳과는 목적이 달라요. 돈을 더 벌 수 있는 방안을 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돈을 써나가야 각자가 원하는 것을 충분히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지, 그런 목적으로 돈의 운용 방안을 찾아주거든요. 상담자가 어떤 삶을 살고 싶어하는지를 충분히 숙지한 뒤에 그를 중심으로 돈을 쓰는 방법을 알려주어서, 삶을 돌아보는 데에도, 앞으로의 방향성을 잡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되더라고요. 동현 씨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할 방법을 그 사람들과 함께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오~’하는 입모양으로 또 고개를 끄덕이는 동현 씨. 민성 씨가 잠시 갸웃하더니 말을 잇는다.
“아, 그리고 잠깐 깜빡했는데 아까 하고 싶은 것이 많이 있다고 하셨었죠? 음악, 만화 그리기… 아마 다들 시작하시려면 갑자기 돈이 필요하실 수 있어요. 그럴 때엔, ‘청년연대은행 토닥’에서 대출을 한 번 고려해 보세요. 담보나 경제 능력과 상관없이 필요하다면, 최대 100만원까지 돈을 빌릴 수 있거든요. 저 같은 경우엔 취미로 미술을 시작하려 했을 때 초기 장비비를 위해 급하게 돈이 필요했을 때나, 생활비가 떨어졌을 때에 큰 도움이 되더라고요. 아무쪼록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정말 큰 힘이 될 거 같아요. 회사일도 잘 안 되고, 편의점 음식도 점점 물려서 홧김에 여기로 들어왔는데, 살아갈 지혜와 힘을 얻어가네요. 너무 값진 걸 얻어가는데요. 이거 돈 더 내야 하는 거 아닌가? 하하하!” 식당에 온 뒤 가장 환한 표정으로, 동현 씨는 웃어 보인다. 이를 보고 누구는 싱긋, 누구는 호호, 누구는 하하. 손님 세 사람은 다 같이 웃는다. 역시 빙그레 웃으며 나무 쟁반을 동현 씨 앞 식탁에 내려 놓는 주인장.
“감자밥에 뭇국, 된장가지구이하고 고추장아찌, 매실장아찌, 백김치에요. 혼자 먹는 라면은 너무 자극적이고 금방 식어버리죠. 뭇국은 안 그렇습니다, 돈 없어서 슬픈 날이든, 추운 날 덜덜 떨고 들어온 날이든 숭덩숭덩 무 대파 잘라 넣고 끓인 국은 우리 몸에 들어오면 쉽게 식지를 않아요. 속도 마음도 따뜻해집니다.”
뭇국은 한 숟갈 떠먹어보는 동현 씨. 주인장의 말이 맞다는 듯, 끄덕이며 미소 짓는다.
“그리고 가지구이는 되게 재료도 간단하고 쉬워요. 프라이팬도 좋고, 불에 바로 굽는 것도 좋고, 가지를 반토막 내서 뒤집어 가며 노릇노릇하게 굽다가 미소 소스 발라서 꾸덕꾸덕해질 때까지 구워 주면 끝입니다. 편의점 도시락만 찾지 말고, 가지 요새 싸니까 사다가 한번 해먹어 보세요. 술안주로도 좋습니다.”
동현 씨는 끄덕이며, 가지도 한 입 베어문다.
“맛있죠?” 물어보는 주인장.
“네, 맛있고 따뜻하네요.” 우물우물하며, 크게 미소 짓는 동현 씨다.
마음이 후련해진 듯 미소를 띄고 한 입 한 입 음미하는 민성 씨와 동현 씨와 달리, 지은 씨의 얼굴에는 점점 근심의 기색이 짙어졌다. 평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마지막 순번으로 음식을 기다리는 것도, 그로 인한 배고픔까지도 늘 즐겨왔던 지은 씨였는데도. 주인장은 그런 지은 씨를 보며 궁금 반, 걱정 반인 얼굴이 되었다.
“지은 씨,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학교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던 건가요?”
매실차를 다시 한번 따라주며 주인장이 묻는다. 지은 씨는 고개를 저었고, 빈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니고, 젊은 친구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참 대견하다 싶기도 하고 부럽기도 해서...”
허허 웃으며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런저런 해결책도 제시해주었던 지은 씨의 고민에 손님들은 조금 놀란 듯했다. 지은 씨는 놀란 표정들을 보더니 특유의 웃음소리와 함께 다시 말을 꺼냈다.
“음…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구요. 이제 은퇴를 앞두고 있는데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바뀔지,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조금 생각이 많네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지은 씨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진 씨는 아시겠지만, 저는 지금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그동안 많은 아이들이 저의 인생에 함께했는데 이제 이런 삶도 2년 후면 끝이 나네요. 제가 벌써 정년 퇴직할 나이가 됐다는 게 저는 실감이 나지 않는데, 돋보기 안경을 벌써 세 번째 맞추고 있더라구요. 게다가 비디오를 보면서 새천년체조를 엉성하게 따라하던 저희 딸이 다음 주에 결혼을 해요. 집에 있던 짐들을 하나둘 싸면서 이사 준비를 하는 걸 보면 정말 새로운 삶이 다가오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지금까지 늘 누군가와 함께 살아온 저에게 혼자만의 삶이라는 탄산이 생기면 어떨까.. 하고 고민하게 되네요. 아직 제 몸도 튼튼하고, 저축예금 들어놓은 것도 있고, 사회보장 연금도 있으니 그냥 저냥 살다가 때 되면 좁은 요양원 들어가서 재미없게 늙어가고 싶지는 않아요.”
옆에서 듣고 있던 민성 씨가 물었다.
“따님이 집을 떠나시면 혼자 살게 되시는 건가요?”
지은 씨는 확실치 않은 듯 갸우뚱하다가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아뇨. 지금은 딸이랑 둘이 살고 있었어요. 전남편이랑 이혼한 후에 계속 둘이서만 살아왔는데, 딸이 떠나고 혼자 살게 되는 건 괜히 걱정돼서 애인과 함께 살려고 계획하고 있었거든요. 저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함께 하면 너무 즐거운 저의 소중한 사람이라서 노년의 부부들이 흔히 그렇듯 함께 살까 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굳이 그래야 하나 싶기도 하네요.”
동현 씨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지은 씨 말씀을 듣다 보니까 요즘에 LAT가 많아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게 떠오르네요. Living Apart Together라고, 서로 진지한 관계를 맺는 커플이지만 따로 사는 사람들이래요. 결혼하지 않은 커플은 물론이고, 결혼한 커플들도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는 유지하되 각자의 공간에서 혼자 사는 삶의 자유로움을 만끽한다고 하더라구요. 물론 비자발적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따로 사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특히 노년층부부들 사이에서 요즘 각광받고 있다고 하더라구요. 음... 물론 저는 두 분의 관계를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지은 씨의 상황을 잘 아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노년 부부들은 다 그렇지. 함께 사는 게 자연스러운 거지.’라는 생각으로 의무감에 함께 사실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주인장과 민성 씨는 고개를 끄덕이는데, 지은 씨도 고개를 끄덕이다가 무거운 마음으로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러네요. 생각해보니 관계의 깊이와 주거 공간은 별개일 수도 있겠네요. 같이 살아야만 깊은 관계인 건 아니니까.”
잠시 머뭇거리는 지은 씨.
“그런데 노년에 혼자 사는 게... 괜찮을까요? 혼자 살게 되면, 인생에서 거의 처음으로 남들 눈치 안 보고 집에서 마음껏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어서 좋을 것 같긴 하지만, 독거 노인의 고독사가 사회적으로 이렇게 큰 문제인데 그 소식의 주인공이 제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 너무 무서워요. 심지어는 독거 노인의 자살 시도율이 15% 정도라서 노인부부가 같이 사는 경우나 자녀들과 자는 경우보다 높다고 하더라구요. 자살 시도한 독거노인 중 20%가 외로움으로 자살을 선택했다고 하구요. 혼자 살면 갑작스러운 사고도 대비하지 못 할 것 같고, 너무 외로워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시도조차도 무섭네요.”
잠깐의 침묵이 흘렀고, 주인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맞아요. 혼자 산다는 게 사실 민성 씨랑 동현 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 어려움이 있기도 하고, 안전 같은 부분에서 걱정하시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음… 지은 씨. 그럼 혹시 시니어 코하우징은 어떠세요?”
지은 씨는 고개를 갸우뚱했고, 동현 씨가 이제야 떠올랐다는 듯 주인장의 질문에 대신 대답했다.
“오! 시니어 코하우징 좋네요! 저도 몇 년 전에 EBS 다큐로 접했었는데, 나중에 나이가 들면 저도 저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상 깊었어요.”
지은 씨는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지은 씨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본 주인장이 찬찬히 말을 꺼냈다.
“시니어 코하우징은 50대 이상인 분들만 입주할 수 있는 쉐어하우스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세대 간 코하우징과도 비슷하지만, 유아 놀이방 대신 편안한 회의실이 있고, 아가들을 위한 안전장치 대신 욕실이나 복도에 안전 손잡이가 있는 식이죠. 주택 자체가 노인분들을 위해 설계됐고, 다른 분들과 함께 자유롭게 교류하실 수 있어요. 안전은 하나도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지은 씨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주인장의 말이 끝나자 약간은 갸우뚱한다.
“음… 약간 요양시설 같은 느낌인데요? 우진 씨,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간호사실이 중간에 있고 좁은 방에 여러 명이 부대끼는 곳에서 수발을 받고 싶지는 않아요. 하하, 죄송해요.”
지은 씨는 조심스럽게 조곤조곤 말했고, 동현 씨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유 아니에요 지은 씨. 그런 요양 시설이 아니에요. 다들 같이 살긴 하지만, 말 그대로 같은 건물 안에 함께 살 뿐이에요. 크진 않지만 다들 각자의 집에서 살고, 식당이나 회의실, 티룸 같은 공간을 공유하면서 자신이 원할 때에만 함께 하는 거예요. 그리고 요양시설처럼 수발 드는 의료시설이 전혀 아니고, 오히려 각자가 무엇을 도와줄 수 있는지 명확하게 정해두더라구요. 이웃으로서 옆집 친구가 아플 때 밥 먹으라고 챙겨주거나 병원에 태워다줄 수는 있지만, 아프다고 목욕시켜주는 건 할 수 없는 일에 속해요. 온전히 유대의식에서 기인하는 도움이 있을 뿐이라서, 자발적이고 정해진 도움만 제공하는 거죠.”
주인장이 부연했다. “네 맞아요. 요양시설에 들어가시라는 말씀이 아니라, 혼자 사는 삶의 자유로움과 공동체 생활의 풍요로움을 모두 만끽할 수 있는 방법이라서 추천 드리고 싶었어요. 혈연 외의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나가면서도, 거주자들이 공유하는 공간과 각자의 공간이 분리되어 있어서 프라이버시를 보호할 수 있어요. 같은 세대의 사람들이 함께하는 공간이다 보니 서로에게 정서적으로 지원하고, 상부상조하니까 삶의 질이 확 좋아질 거예요.”
웬일로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계속 휴대폰만 보고 있던 민성 씨가 갑자기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와, 방금 잠깐 찾아봤는데 스웨덴에 있는 둔데르바켄(Dunderbacken)은 거주자들 평균 연령이 70세인데, 욕실이랑 부엌, 침실이 갖춰진 개인집에 살면서도 식당, 독서실, 취미실을 공유한다고 하네요. 특히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 꾸려나간다’는 원칙이 있어서 노인분들을 돕는 직원을 따로 고용하지 않고 거주자들이 돌아가면서 식사당번과 청소 당번을 맡는 자율 형태로 운영된다는 점이 새로워요! 인생 선배들이 따로, 또 같이 사는 집이라고 생각하니까 너무 멋있는데요...!”
주인장이 미소를 띄면서 답했다. “그죠. 저는 시니어 코하우징에 사시는 분 인터뷰를 하나 봤는데, 인터뷰어가 ‘가까운 이웃의 죽음을 계속해서 지켜보는 게 고통스럽지 않냐’고 여쭤봤더니 뭐라고 하셨게요?” 지은 씨를 포함한 모두가 어깨를 으쓱했다. “‘달력을 만들어주었던 한 친구가 죽었을 때 모두 와인을 들고 1층에 모였다. 달력을 넘기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까지 식사 준비와 청소를 스스로 했다. 이곳은 인생이란 달리기의 ‘마지막 동반자’를 만들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고 하셨대요.”
지은 씨는 그 따뜻한 이야기에 미소 지었고, 주인장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시니어 코하우징은 사실 1987년에 덴마크에서 처음 시작돼서 지금은 핀란드, 스웨덴, 미국에서도 많이 생겼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실버타운이 그나마 시니어 코하우징과 유사하긴 한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소득 격차가 입주에 너무 큰 영향을 미쳤고 ‘외로운 노인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해져서 좋은 이미지는 아닌 것 같더라구요.”
동현 씨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을 꺼냈다. “어, 근데 얼마 전에 청약 알아보다가 봤는데 ‘고령자 복지 주택’이라는 게 생겼던데요? 2013년쯤에 시니어 코하우징으로 도봉구에서 ‘두레주택’을 공급했었는데, 지금은 아예 국토교통부에서 주거복지로드맵 중 한 사업으로 전국에 무장애(barrier-free)시설과 건강, 여가 등 사회복지시설을 갖춘 주택을 65세 이상 무주택 고령자에게 공급하더라구요. 이미 광교나 위례 같은 도시 11곳에 주택을 공급했고, 2025년까지 1만호를 공급하는 게 목표라고 했던 것 같아요.”
민성 씨가 빠르게 검색해보더니, 말을 꺼냈다. “그러네요...! 이미 그 열한곳은 입주까지 다 했고, 10월에 보령, 12월에 정읍 공고도 나와요. 그 이후로도 계속 울산, 서울, 평창 다 있으니까 한 번 알아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지은 씨!”
동현 씨와 민성 씨의 열성적인 어필에 지은 씨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여러분. 너무도 당연하게 누군가와 또 같은 집에서 함께 모든 걸 공유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여러분들 덕분에 제2의 삶이 시작되는 이 길목에서 다시 한번 방향을 고민해볼 수 있네요. 혼자만의 삶을 살 용기와, 그럼에도 누군가와 함께 사는 삶을 같이 누릴 수 있는 방법을 모두 얻을 수 있었어요. 아직 남은 준비의 시간 동안 더 고민하고 더 용기 내볼게요.”
지은 씨의 밝아진 얼굴에 답하듯이 모두가 미소지었다. 그때 주인장이 다시 한번 나무 쟁반을 지은 씨 앞 식탁에 내려놓는다. 이번에는 밥, 국, 그리고 온갖 나물이 놓여 있다.
“고구마톳밥에 미소된장국, 그리고 나물은 참나물, 민들레, 고들빼기, 매실장아찌입니다. 고구마톳밥은 고구마의 단맛과 부드러움이 있으면서도, 아직 아작아작한 톳이 씹히는 재미가 있죠. 보통은 고구마밥을 하거나 톳밥을 해서 한 쪽 식감만 살리는데, 사실 둘을 같이 밥에 넣어도 되게 흥미롭고 맛있어요. 참나물하고 고들빼기도 그래요. 한쪽은 참기름에 무쳐서 기름지고 고소하고, 한쪽은 양념 세게 무쳐서 쓰고 맵지만 밥에 이 나물 올렸다가 저 나물 올리면서 먹으면 두 나물이 그렇게 조화로울 수가 없죠.”
“제가 요리 공부할 때 많이 들었던 말 중에 하나가, 한 방향의 맛만 추구하는 요리를 고집하지 말라는 거였답니다. 물론 그것도 좋을 때가 있지만, 요리의 재미는 상반된 맛을 함께 한 접시에 냈을 때 만들어지는 조화라고 말이죠. 지은 씨의 삶도 그런 조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거에요. 그 마음을 담았습니다.”
활짝 미소짓는 지은 씨. “고마워요, 자네도 참 복된 사람이야.”
그렇게 모든 손님들이 각자의 요리를 받아 들었다. 잠시 대화는 끊긴다. 지은 씨는 고구마톳밥에 참나물을 올린 숟가락을 입에 가져간다. 동현 씨는 가지구이를 한 입 베어 물고는, 여전히 김이 나는 무국을 후후 불어 삼킨다. 민성 씨는 주먹밥에 연근전을 올려 아작아작 우물우물 잘도 먹는다. 각자 맛을 느끼고, 행복해하고, 몸을 덥히고, 따뜻해지는 간간이 다시 누군가가 말문을 튼다. 잠시 대화가 오가다가, 웃음소리가 들려오다가, 후루룩 냠냠 소리만 조용히 흘러나오다가, 다시 누군가가 이야기를 시작하고 누군가가 빙그레 웃음짓는다. 가게 조명이 은은히 새어 나와 밤거리에 퍼진다.
세 손님이 떠나고 나서도 가게 불은 늦은 밤까지 꺼지지 않는다. 노랫소리가 열린 창문으로 흘러 침묵하는 교차로에 즐거움을 더한다. 이따금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걸어가던 혼삶들이 하나 둘 씩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리고 또 나간다. 주인장은 들어오는 이도, 나가는 이도 반겨주며 무언가를 굽거나 데우거나 따뜻하게 한다. 새벽 2시가 넘어, 졸음이 밀려오는 주인장은 그제야 가게 문을 닫을 생각을 한다.
조리도구들을 정리하고, 쌓여 있던 설거지를 마치고, 남은 재료들은 냉장고에 넣거나 청소하면서 아작아작 씹어 먹는다. 그리고 가게 전등 스위치 앞에서 약간 고민한다. 키고 나갈까 아니면 끄고 나갈까. 이곳의 혼삶들을 사랑하여 밤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한편, 자연을 사랑하는 그는 미연의 범죄 방지와 전기 절약 사이에서 고민한다. 결국 그는 전등을 끄지 않기로 한다.
밖으로 나온 그는 비어 있는 세 개의 나무 의자와 주방 탁자들을 가게 창문으로 바라본다. 원래 훨씬 어둡거나 갈색 검은색 나이테가 져 있을 테지만, 주황빛 조명 아래 온도 높은 주황빛으로 모두 물들어 있다. 어제도, 오늘도 혼삶들이 왔다 갔다, 내일도 왔다 갔다 하겠지. 빈 가게를 지긋이 바라보던 그는 문득 자신이 혼자임을 느낀다. 그러나 금방 자신이 혼자가 아니었음을 생각한다. 오늘도 혼자가 아닐 것임을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도, 언제나 혼자가 아니게 될 수 있음을 생각한다. 어깨를 한번 으쓱, 하고는 주인장은 돌아선다.
주인장은 몇 분 정도 천천히 걸어가다, 가로수 앞에 멈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걷는다. 주인장의 너털웃음 소리가 듣기 좋게 길에 깔린다.
당신에게 따뜻하고 즐거운 혼삶이 찾아오길.
필자
김지은 나동현 이민성 이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