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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예리 Nov 03. 2023

마음에 하늘나라가

4. 오일 장날

1969년 여름 바캉스철 어느 오일 장날

나는 갑촌 오일 장날에는 여느 날 아침보다 일찍 일어나 지곤 한다. 이동 장사꾼들이 장날마다 어떤 물건들을 가져올까 호기심에 들뜬 마음에서다. 샘터에서 아버지의 푸짐한 세수 소리가 들린다. 할머니는 여느 날 아침처럼 별채 돼지 막에 가신 모양이다. 안방 쪽문에서 아버지 어머니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여왔다. 아버지가 쪽문으로 나오시는데 장에 가는 옷차림새다.  어머니는 아버지 등을 향해 '갔다 오셔요' 한다. 어머니는 전방 대들보 기둥 왕문짝 상단 틈새에 끼워놓은 강목을 빼낸다. 그리고는 문짝의 안쪽 손잡이를 살짝 들어 올려 하단을 오른발로 툭 차 문지방 밖으로 떼낸다. 


펌프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할머니가 별채에서 돌아오신 모양이다. 할머니는 아침에 기상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별채 돼지 막에 가시는 일이다. 안채 샘터 하수구 어귀에 놓아둔 적색 고무 바케스 구정물 통 표면에 뜬 맑강물을 하수구에 쪼옥 딸궈버리고 걸쭉한 건더기만 들고 별채 샘터로 간다. 똑같은 별채 샘터 수챗구역 어구에 놓아둔 적색 고무 바케스 표면에 뜬 맑강물을 쪼옥 수채구역에 딸궈 버리고 걸쭉한 건더기를 안채 샘터 구정물 바케스 통에 쏟아부어 별채 안뜰과 꽃밭 사잇길을 지나 돼지우리로 다가가는 할머니 발자국 감지한 꿀꿀이가 벌떡 일어나 돼지 밥통 앞에서 꿀꿀하며 할머니를 맞이한다. 

'벌써 일어나 있던 겨.' 할머니는 꿀꿀이에게 아침 인사하며 구정물 바케스를 돼지 밥통에 '싸악' 쏟아붓는다. 꿀꿀이는 허겁지겁 밥통에 입을 풍덩 넣어 잠수 탄다. 할머니는 옆 곳간 사료포대에서 두 종그래기 사료를 밥통에 얹어준다.  꿀꿀이 얼굴은 밥통에 잠수 타 건너기 한가득 입에 넣으려 숨이 차는지 헐레벌떡 얼굴 들어 쩝, 쩝, 쩝 소리 내 꿀꺽 삼키고는 다시 밥통에 풍덩 입을 넣고 잠수 탄다. 할머니는 외양간에서 바삭바삭 소리 나는 짚푸라기 한 아름 돼지우리에 넣어준다. 그리고는 돼지우리 모퉁이에 세워놓은 긴 자루 달린 똥바가지로 돼지 밥통 옆 땅속에 묻은 돼지 오줌통에 가득 고인 돼지 오줌 한 바가지 두 바가지 퍼 우리 앞 덤탕 퇴비 위에 버린 다음  별채 뒤뜰과 텃밭을 쭈욱 둘러보고 안채로 돌아와 아침 통근 밥을 짓는다.


나는 잠자리에서 나와 윗목 모퉁이 반닫이 옷장 위에 벗어놓은 원피스를 입고 건넌방에서 나온다.   

'오늘 괭일 아녀? 좀 더 자지.'

'오늘 장날이야 할머니.'

'원, 아이두.'

'장날인데 아버지 어디 가시나 봐요.'

'조치원장 보러 간겨. 어제 공장에서 뭔 경사가 났는지 공장 사택 사람들이 생선이랑 과일 모두 떨이해 가서 오늘 장 볼 물건 하러 간 겨.

'네에.'

                                  ..................................


늦은 오전.

'순딩아, 역전에 아버지 마중 나가자꾸나.'

'녜에.'

'엄니, 순딩이 데리고 역전에 가유. 전방은 성복이가 봐요.'

'그려.'

어머니는 바깥채 7번 가구 앞  자투리 공간에 세워 받쳐 놓은 리어카 끌고 별채 쌍대 문으로 나오는 동안 나는 대문 밖에서 기다린다. 어머니는 앞에서 나는 리어카 맨 끝자락에 손을 잡고 신작로를 이용하는 어머니의 발걸음에 맞춰 뛰듯 걷는다. 

역 광장에 도착한 어머니는 역사 양쪽으로 박힌 말뚝 울타리 오른쪽 은행나무 아래에 리어카를 받쳐 놓는다. 잠시 어머니는 매미 우는 소리가 정신 사납다며 역전 대합실로 들어간다. 나는 하늘 향해 검정 칠한 화살촉 말뚝 울타리 앞에 서서 아버지가 타고 올 열차가 플랫폼 앞뒤 어느 선로로 들어올까 바라본다. 그런데 시커먼 화물열차가 플랫폼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곧 열차가 들어올 시간에 꼼짝도 않는 걸 보면 무슨 변고가 있는 모양이다. 짙은 남색 우아기와 바지의 작업복 차림의 선로반 서 너명 인부가 시커먼 화물차 사이로 연장을 들고 뭔가 열심히 하고 있다. 화물차가 고장이 점검하는구나 생각하며 화살촉 말뚝에 달랑 말랑 늘어져 일렁이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니 눈까풀이 스르르 감긴다. 


'어!' 나는 감겼던 눈을 번쩍 뜨고 보니 시야 앞에는 곧 도착할 열차에서 승객들이 내려 개찰구로 나오는 통로를 떡하니 가로막고 있던 시커먼 화물차를 두 쪽으로 갈라져있는 것이다. 조금 전 선로반 인부들이 화물차 칸 이음새 떼는 작업을 했던 모양이다. 기차 경적소리가 저만치에서 들려왔다. 나는 곧 플랫폼에 도착할 열차가 어느 선로로 들어올까 궁금해했다. 양쪽 발을 말뚝과 말뚝 사이에 걸치고 올라섰다. 개찰구 앞에서 한 손에 깃발을 다른 한 손에는 나팔 모양의 스피커를 들고 대기하던 역무원 아저씨가 플랫폼으로 걸어간다. 시커먼 화물차가 턱 하니 가로막고 있어 역무원 아저씨가 어느 쪽으로 가는지 볼 수가 없다. 왼쪽 저만치 역 소화물 창고를 통과해 달려오는 열차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곧 열차의 기관석이 플랫폼에 들어서자 시커먼 화물열차에 가려 긴 열차의 지붕만 보인다. 이때 플랫폼 어느 쪽에서 '삐-잇! 삐-잇!' 신경질적인 호루라기 소리와 플랫폼으로 내리라는 역무원의 툭 명한 목소리가 방송을 타고 흘러나왔다. 이어서  정차한 화물차 쪽으로 내리지 말라며 역무원 방송이 흘러나왔다. 


플랫폼 안쪽으로 쏟아낸 승객들을 포함하여 아버지가 어느 쪽으로 내리셨는지 화물열차에 가려 종잡을 수가 없다. 몇몇 승객이 선로반 인부들이 작업하던 쪽으로 내려 개찰구로 뛰어가는 광경을 보고 역무원이 호루라기를 연발 불어댔다. 이때 급행열차가 '쐐-엑!' 하고 지나가기라도 한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엄마는 다소 성가스런 표정으로 평소 아버지가 열차가 정차해 내리실 준비하는 열차의 화물칸 앞 칸에서 내렸을 것처럼 역 소화물 쪽을 향해 바라본다. 기관사가 간헐적으로 경적을 울리는 것도 거대한 기관석에서 검은 팔각 모자의 턱 줄로 받쳐 쓴 멋진 기관사 아저씨가 창문으로 내밀고 플랫폼을 확인하는 것으로 보아 열차는 여느 때 정차 시간보다 출발을 지연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잠시 후 역무원은 플랫폼 어딘가에서 기관사와 출발 신호를 주고받으며 세차게 호루라기를 불고는 깃발을 흔들어준다. 그러자 기관사는 경적을 울려 역무원에게 출발 대답을 한다. 출발하는 기관석 바퀴가 온갖 힘을 다해 움직이듯 멋진 기관사 아저씨가 창문 밖 역무원에게 다시 한번 거수경례를 한다. 속력 내 달리는 열차는 어느새 저편 갑촌 터널 속으로 사라져 갔다. 


열차가 플랫폼에 쏟아낸 인파는 우르르 개찰구로 몰려나오고 있다. 나는 누가 이동 장사꾼이고 피서객인지 구별할 수 있다. 등에 물품을 메어 구부러진 어깨와 허리 그리고 양손에 든 장사꾼들은 모두 땅바닥에 시선을 두고 걸어 나온다. 어느 아주머니는 머리에 똬리 받친 양은 다라을 이고 입에 짚푸라기 끈을 물고 나오며 또 어느 아주머니는 짚푸라기와 수건을 똬리 형체로 꼬아 받쳐 고무 대야 이고 나오는 장사꾼 여인네들임을 알 수 있다. 맑은 햇살로 눈이 부시는 진분홍, 노란색 한복 차림의 여인네의 짧은 파마머리와 희뿌연 분 딱지에 시뻘건 뺀 지 바른 입술과 조화를 이룬 빨간 장구를 어깨에 맨 여인네는 손가락으로 북편을 튕기며 콧소리를 흥얼거리며 앞서 개찰구로 통과해 나오는가 하면 그물과 낚싯대를 어깨에 질 머진 금강물놀이 온 피서객들로 역 광장은 난리 북새통이다. 

'순딩아, 아버지 저쪽으로 나오신다. 여기에 있거라.'

엄마는 리어카를 끌고 소화물 쪽으로 재촉해 걷는다. 역 광장 한쪽에는 낚싯대와 그물을 들고 매고 금강에 물놀이 가는 피서객들이 모여 있다. 다른 한쪽 은행나무 그늘 아래 약수터를 지나는 청주행 시내버스 기다리는 약수터 정자 놀이 가는 여인네들이 이 홉 돌이 두꺼비 표 소주병을 비닐 컵에 주거니 받거니 마신다. 

흥이 돋는 모양이다. 여인의 무리는 얼씨고~ 절씨고~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양손을 펼쳐 어깨를 들썩거리며 덩실덩실 춤을 춘다.  


갑촌 약수터는 축  늘어진 수양버들 나무와 잘 어울리는 세 개의 팔각 정자와 5층짜리 약수장 건물로 정기 깃든 노고산 아래 자리하고 있다. 약수터 계곡물이 5층짜리 약수장 시멘트 기둥골조 밑으로 흘러 약수장 인공호수와 산기슭의 정자 아래 도랑을 따라 산기슭 위 기차가 달리는 거대한 굴 속을 통해 금강으로 흐른다. 인공호수가 정면으로 보이는 5층짜리 약수장 건물 왼쪽으로는 울창한 상수리나무, 자귀나무 숲 산기슭에는 수 십 채의 정자가 계단식으로 자리을 하고 있다. 자귀곷을 진달랠 철쭉꽃으로 알았던 여름날의 약수터 산기슭은 온통 분홍빛으로 물든 한 폭의 풍경화도 같다. 나는 아직도 그때의 약수터 전경이 내 머릿속에 깊이 박혀있다.


약수장 꼭대기층 복도 창가 앞으로 내려다 보이는 인공호수와 거대한 갑촌 터널(굴다리) 위로 상, 하행선 열차가 달리는 광경과 저만치 공장 사택가와 갑촌리 전경이 한눈에 볼 수 있다. 늘어진 수양버들 가지가 한들거리는 약수터 인공호수에는 백조와 오리 떼가 노닐며 그에 질세라 피서객의 화려한 색깔의 야산을 받쳐 들고 노 젓는 나룻배 약수터 광경은 클로드 모네 그림을 보고  더 생생하게 떠오른다. 산기슭 정자마다 다른 고장에서 놀러 온 한복 차림의 유흥객들 어깨에 빨간 장구를 가로 질어 매고 북채를 치며 취기의 기운을 발산하듯 흰 버선 발바닥이 시커멓도록 춤춘다. 아이스케끼 장수도 덩달아 어깨에 하늘색 아스케끼 통을 질 머지고 정자마다 배회하며 '아이스케끼! 아이스케끼!' 리듬까지 넣어 외친다. 약수터 겨울 풍경은 화려한 여름철 풍경과는 달리 산기슭 벌거벗은 나뭇가지에 하얀 눈꽃의 도도함을 넘어 고독의 신비감을 준다. 인공호수는 썰매 스케이트장으로 변한다.

계곡물은 약수터 인공호수 앞으로 펼친 모자이크 논 평야 도랑을 타고 산등성 모서리 거대한 암흑의 터널 속으로 흘러 내려와 주변 동네 여인네들 빨래터로 유명한 신새 도랑으로 흐른다. 개울가 양쪽 경사진 둑방 시야 앞으로 갑촌역에서 플라스틱 공장까지 1킬로 거리의 철길이 나있다. 광산의 시커멓고 뚜껑 없는 화물차가 운행하는 광경을 나는 가끔 본다. 이 단선 철길 중간지점에는 신새 도랑물이 흐르는 열여덟 개의 철목(침목) 다리가 놓여있다. 그곳에서 도랑을 내려다보면 절벽 같다. 이 철목 다리는 동네 아이들과 누가 빨리 건널 수 있나 '용기 시합' 겨루는 장소다. 일곱 살 소심한 나는 그야말로 헉소리가 절로 나오는 곳이다. 나는 예전에 이모네 집 감나무에서 떨어진 경험이 있음에도 한 계단 한 계단 딛고 오르는 알 수 없는 그 느낌, 가령 우리 집 다락방 계단이나 개울가 빨래터 둑 돌계단 밟고 오르고 내리는 반복으로 이끈다. 철목 다리 아래 도랑물이 흐르는 어질어질한 높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건너고자 하는 알 수 없는 마음이 나를 재촉한다.


초등학교 2학년, 어느 봄 날인지 초여름날인지 희미하다. 한 날, 나는 벼르고 벼르던 그 철목 다리를 꼭 건너겠다고 마음을 굳힌다. 정작 철목 다리 앞에 섰을 때는 아찔함에 사로잡혀 열여덟 개 철목 다리가 백팔십 개의 거리로 보였다. 다리 아래 시냇도랑은 나이아가라 폭포수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온몸의 힘이 쏙 빠져 양다리가 후들후들거렸고 심장은 주체 없이 뛰었다. 한참을 깊이 숨을 드리 마시며 허리와 무릎을 안전한 자세로 갖춘 나는 철목 다리 아래 흐르는 도랑물을 번갈아 내려다보며 침을 꿀꺽꿀꺽 삼키고 마침내 첫 번째 철목에 발을 옮기고 두 번째, 세 번째... 한 발, 한 발, 그렇게 갓난아기 발돋움처럼 양손으로 균형 잡으며 열여덟 철목 다리를 건너자 모자이크 논 평야와 거대한 굴뚝에서 뭉실구름이 뿜어 오르는 플라스틱 공장과 노란 개나리꽃으로 덮인 공장 사택가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갑촌 오일 장날마다 다른 지역의 이동 장사꾼들이 요번 장날에는 어떤 물건들을 가져올까? 궁금해하며 흥미로움에 가슴이 부푼다. 타 지역의 이동장 사군들은 저마다 등짝에 용기를 매고 양손에 들고 머리에 이고 어깨에 걸머지고 역 개찰구를 나와 서둘어 장이 펼치는 시장통 골목길과 소전 옆 공터 향해 서둘어 걷는다. 우리 집 전방 쌀가게 외벽을 등지고 펼친 시장통 골목길에서 생선장수가 장을 펼치고 맞은편 신밧드 신발 집  앞으로 우뚝 선 원통 시멘트 전봇대에 등을 기대고 번데기와 다슬기 파는 아주머니와 옆으로 나란히 오 돌게와 앵두 파는 아주머니가 자리을 한다. 생선장수 최 씨 아저씨는 자릿세와 우리 집 바깥채 변소 담벼락 향해 보관하는 생선대 굴죠에 필요한 널빤지와 확고 짝 보관료를 지불한다. 


최 씨 아저씨는 역전에서 내려오자마자 생선대에 필요한 골조와 궤짝으로 골조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널빤지를 올려놓는다. 그런 다음 양동이에 담아 온 일부 생선을 진열한다. 그리고는 먼저 샘터에서 한 양동이 물을 받아와 생선대 밑에 준비해 놓고는 널빤지 표면에 비닐을 깔아 반질거리는 물명태, 고등어, 꽁치, 갈치, 물오징어 등을 진열한다. 다른 한쪽으로는 두 마리씩 끼어 소금에 절인 고등어 손을 나란히 진열해 놓는다. 그다음에는 각각 비닐 속에 담긴 깡통에 종류의 굴젓, 새우젓 까두리 젓 등 생선대 아래 한쪽 골조 옆으로 작은 테이블을 만들어 생굴, 멍게, 소라 그리고 형체만 봐도 덥석 움츠려 드는 거무튀튀하고 우중충하며 물컹하니 끈적이며 울퉁불퉁 큰 늠, 중간 늠 작은 해삼 순으로 진열해 놓는다. 


오후 한나절이 지나자  진열해 놓은 해삼 앞에서 흥정하는 장꾼들이 모여든다. 최 씨 아저씨는 즉석에서 다듬어 초고추장과 곁들여 손님에게 준다. 시커멓고 흐물흐물 물컹거리는 벌레 같은 해삼을 초고추장에 찍어 쩍 벌린 입에 넣고는 우물우물 씹어 먹는 장꾼들 모습을 보고 오만 상우 찌푸린 나의 표정을 최 씨 아저씨가 본 모양이다. 그 뒤 최 씨 아저씨는 장날마다 해삼 하나를 번쩍 들어 쩍억 벌린 아저씨 입에 넣으려는 시늉과 엄지손가락까지 치켜세우며 나를 유혹한다. 나는 매번 고개를 젓는다.


그런 어느 오일 장날 (지금 생각하면 그날 저녁 상차림에 올라온 국이 아욱국으로 기억된다) 언제나처럼 침묵 속의 우리 집 식사 시간이 듯이 나는 음식에만 집중하며 한 숟가락 밥을 입에 넣고 국대접에서 국물을 뜨는데 뭔가 뭉툭한 것이 수저에 잡혀 건더기를 헤집어보았다. 순간적으로 눈에 보이는 생김새를 설명하면 딱히 검은 고무지우개 같았다. 별의별 상상이 되면서 심장이 주체 없이 뛰었다. 비명 지를 놀람에도 나는 아버지 앞에서는 내색도 못한 체 밥알이 톱밥 같았다. 평소 할머니는 김칫국에 물오징어을 넣는다. 아욱국에 물오징어 넣은 걸까? 하고 위로하다가도 별의별 상상은 안절부절 성가스럽게 했다. 얼핏 본 형체는 마치 뜨거운 물에 데친 붉은 물오징어 썰어놓은, 아니 거무틱틱하니 울퉁불퉁 오그라져 뭉툭한 생김새가 딱히 새-생쥐.. 겁에 사로잡힌 나는 질끔 눈을 감았다. 게다가 억지로 먹는 시늉이 얼마나 곤역스러운지 고개 숙인 체 눈동자를 굴려 분위기를 살폈다. 누구도 이상한 기색이 없는 것이다. 나는 혹시 끓여 놓은 국솥에 새-생쥐가...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두려움도 내색하지 못한 체 수저로 그것을 아욱국 건더기 속에 꼭꼭 숨겨놓고 국물 떠 마시는 시늉 하며 저녁상 물릴 때까지 나는 그렇게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 


아침내 수 십 시간이 걸린 것 같은 저녁식사는 부모님 마시는 숭늉으로 끝났다. 부모님은 바로 전방으로 나간다. 나는 부엌으로 쏜살같이 나가 식사 내내 내색하지 못한 감정을 할머니에게 쏟아낸다. 

'하-할머니! 내 국대접에 버-벌레가 들어가 있어. 그것도 이만한 게요. 아버지 무서워 놀란 내색도 못하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흥분된 목소리로 할머니에게 항변하듯 부뚜막에 물린 밥상에서 내 국대접을 들고는 수저로 헤집어 할머니에게 보여준다.  

'여-여기, 이-이것 봐요. 할머니. 내 국대접에 벌레가 울퉁불퉁 으-으..!'

나는 일그러진 얼굴과 몸을 움츠리며 좀체 가시지 않는 흥분으로 항변을 한다.

'순딩아, 그거 해삼이여.'

저녁식사 내내 공포에 떨게 했던 빌어먹을 해삼이라는 할머니의 말에 나는 김 빠진 고무공처럼 기분이 푹 가라앉고 말았다.

'하하하!'

최 씨 아저씨는 박장대 소을 하고 웃었다.

'아저씨, 왜 자꾸 웃으세요?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그렇게 우리 집 해삼 국 사건 이야기를 들은 후 최 씨 아저씨는 오일 장날마다 나에게 해삼을 번쩍 들어 먹는 시늉을 하며 골렸다. 지금도 시장이나 마켓에서 해삼을 보면 그때 거무튀튀한 아욱국 영상이 선하게 떠오른다. 


맞은편 신밧드 신발가게 앞에는 원형의 시멘트 골조 전봇대가 우뚝 서 있다. 함 씨아 주머니는 등을 전봇대에 지고 앉아 두 개의 연탄 화로에 불을 지핀다. 그 위에 번데기와 다슬 기을 담은 허옇게 달아 낡은 양푼을 올려놓는다. 그런 다음 준비해 온 헌 책을 한 장 한 장 뜯어 고깔을 만들며 '뻐-언! 뻐-언!' 외친다.  얼마 후 두 양푼에서 하얀 김이 가물가물 오르는 광경을 바라보고 서 있는 나에게 함씨아주머니가 묻는다. 

'오늘은 순딩이, 어떤 늠 먹을 거야?'

'다슬기요.'

함씨아주머니는 다슬기 양푼에서 한 숟가락 떠 종이 고깔 집에 담아 내게 준다. 돈은 지불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핀치기에서 딴 머리 실핀과 여분의 크고 작은 몇 개의 오핀과 빽곡하게 끼워 치마 허리선에 자랑하듯 차고 다닌다. 큰 오핀 하나를 빼낸다. 오핀 촉으로 다슬기 속 하나하나 빼내어 오핀 끝으로 모아 촉까지 꽉 차게 걸어놓고 한 번에 몽땅 입 속에 넣어 쭈욱 빼먹는다. '오도독! 오도독!' 씹히는 감각과 소리를 나는 좋아한다. 이번에는 하나씩 다슬기 입에 넣고 쪽 빨아먹다가 급속히 목청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기침으로 툭 튀어나온다. 함씨아주머니 옆자리에서 앵두와 오돌게 파는 달미아주머니는 이번 장날에도 보이지 않는다.


오일 장날 극장 앞 광장에는 쌀, 보리, 콩, 밀, 조, 참깨, 들깨, 수수, 기장, 마른 고추를 포함하여 종류의 곡물이 펼치는 싸전이 열린다. 극장 뒷골목길 어귀에서는 아주 작은 키의 왜소한 체구와 냉랭한 아기 목소리를 가진 할아버지는 몽땅 빠진 치아로 입술이 복주머니처럼 조여 오그라졌다. 몇 가닥 남은 허연 머리에는 흠집 난 밀짚모자를 쓰고 있다. 누렇게 바랜 러닝셔츠와 검은 나일론 칠부바지 차림의 낡고 헐렁한 검정 고무신을 신은 할아버지가 다른 오일 장날처럼 로켓 형체의 시커먼 쇠 덩어리를 설치하고 있다. 먼저 흙땅 바닥에 두 짝의 쇠 받침대를 앞뒤로 세운다. 그 위에 시커먼 로켓을 안전하게 올려놓는다. 세워 놓은 로켓 옆 땅바닥에는 장꾼들이 미리 갖다 놓은 강냉이 자루가 줄지어 있다. 할아버지는 운전대 모양의 둥근 로켓 쇠뚜껑을 열어 카키색 미제 강통에 담아놓은 강냉이를 둥근 쇠뚜껑에 넣고 쇠뚜껑을 닫고 고리에 쇠파이프 끼워 꽉 조인다. 그런 다음 로켓 쇠덩이 중간에 미리 불씨 지펴놓은 연료통을 받쳐놓는다. 할아버지가 나무토막 의자에 앉는다.  할아버지 옆에는 나무토막과 잘 마른 솔방울이 보이는 낡은 자루가 있다. 할아버지는 목장갑 낀 오른손으로 둥근 쇠뚜껑에 나침반처럼 한 온도계가 설치된 운전대를 돌리며 왼손으로 솔방울 하나씩 하나씩 연료 용기에 넣으며 이따금 온도계를 주시한다. 나는 뻘겋게 변한 솔방울에서 튀는 불꽃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로켓에서 김이 오르더니 '뿌-우, 치-이익!' 방귀를 켠다. 할아버지 얼굴은 인디언 추장처럼 시커먼 재가 묻어있다. 할아버지는 돌리던 운전대를 멈추고 연료용기를 한쪽으로 꺼내 놓는다. 굽은 허리를 찬찬히 세우며 일어나 투박하고 뭉툭한 에스키모 장갑을 낀다. 할아버지의 왜소한 체구가 더 작아 보인다. 단단히 죄어 놓은 둥근 로켓 쇠뚜껑에 거대한 철사 그물망 주둥이를 드리 대고는 쇠뚜껑에 쇠꼬챙이를 끼운다. '뻥이요-뻥!' 외치는 동시 로켓이 터졌다. 희디 흐니 뭉실구름이 공주로 피어올랐고 티 밥은 땅바닥에 떨어져 여기저기 흩어져 하얀 꽃밭을 이루었다. 둥그런 멍석 바구니에 쏟아낸 하얀 티 밥에서 김이 모락모락 오른다. 지나는 장꾼이 땅바닥에 떨어진 티 밥을 주워 입에 넣자 마른 낙엽 으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할아버지는 티 밥 주인이 가져온 쌀자루에 담아 주둥이 모아 묶어 한쪽 모퉁이에 보관한다. 깡통에 다음 자루를 쏟는다. 강냉이와 썰어 말린 흰떡과 말린 누룽지가 섞여있다.  


극장 뒷골목에 위치한 아이스케끼 집 옆으로 한 평 될까 말까 한 조금 한 가게가 있다. 가게 앞으로 늙은 호박 덩어리 만한 돌덩이 롤 받쳐 세워 놓은 드럼통 사이로 지핀 장작불에서 검은 끄름과 김이 오른다. 창호 아저씨가 드럼통에 까만 염색물을 긴 나무 막대기로 이쪽저쪽 젓고 있다. 옆으로 늘어진 빨랫줄에는 검은색 우 아기와 바지가 걸쳐있다. 창포 집에서 세 발자국 떨어진 골목길 어귀에는 '뚝딱! 뚝딱!' 망치 두드리는 건장한 체구의 할아버지가 앉아있다. 호랑이 눈처럼 할아버지 눈에서 부리부리한 빛이 났다. 길고 숱이 많은 할아버지의 회색 눈썹은 눈두덩이까지 덮였고 날아가는 기러기 모습처럼 한 콧수염을 간혹 손으로 치켜올린다. 그리고 나의 귀보다 세 배, 다섯 배는 되는 할아버지 귓불에는 긴 털이 숭숭 뻗쳐있다. 머리에는 쫑긋 묶어 올린 상투머리에 검정 갓을 쓰고 누런 모시 바지와 저고리 겸 두루마기 차림은 허리선 가지 가지런히 말아 올려 천으로 허리에 묶어 매고 손질된 사각형 강목에 앉는다. 할아버지의 낡은 검은색 가죽구두는 파리도 낙성할 만큼 윤이 반들거렸다. 할아버지가 앉은 등 쪽에는 손질 잘 된 보물 궤짝처럼 한 구두통이 놓여있다. 옆으로는 수선해 놓은 켤레의 구두와 검은 고무신이 놓여있다. 할아버지가 망치로 구두 안창을 톡 톡 두드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를 흘끔 치켜본다. 그 순간 할아버지의 눈빛이 호랑이 얼굴로 각인되어 그를 '호랑이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할아버지, 이거, 이거(머리에 쓴 검은 갓) 왜 안 벗는거애요?' 하고 갓 창을 손으로 살짝 만진 내게 '허-허-으음- 때끼!' 큰 헛기침으로 인기척 하던 할아버지가 오늘은 아무 말이 없다. 할아버지의 망치질이 자꾸 빗나갔다.   


시끌벅적한 돼지네 대폿집에는 씨앗 사러 온 장꾼, 농산물 매매하러 온 장꾼, 면사무소에 볼 일 있어 나온 장꾼, 소전에 나온 장꾼, 소 발굽 바꾸러 대장간에 온 장꾼들로 꽉 차 있다. 볼그레한 얼굴의 장꾼들 손에는 주거니 받거니 막걸리 주전자와 술대접을 들고 꿀컥꿀컥 들이키고는 소매로 쓰윽 입가를 닦는다.

'장에 소 발굽 바꾸러 나왔어. 그런데 줄이 기네요. 소전에 들렸다 장에 나온 김에 막걸리로 목도 축이는규.'

하며 한 대접, 한 대접이 한 주전자를 마시고 있다. 장 꾸는 산 넘고 너머 십 리의 거리를 술기운으로 걸어갈 모양이다.             


대장간 골목길 허름한 나무 전봇대에 묶어 놓은 누렁이들은 새 발굽 맞추려 기다리고 있는 반면 대폿집에 퍼질러 앉아 마시고 있는 주인을 마냥 기다리는 누렁이가 '으-매에! 으-매에! 덥고 갈증도 나고 배도 고파요 주인님' 하고 외치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땅바닥에 '퍽!' 하고 빈대떡을 붙여놓는다. 대장간 사 씨아 저시는 누렁이 고삐를 이끌고 앞 양쪽 뒤 양쪽 사각 말뚝 틀로 데려간다. '워-어! 워-어!' 누렁이 엉덩이를 토닥거려 반듯한 자세로 직사각형 말뚝 틀에 인도해 놓는다. 위 옆 앞 뒤로 늘어진 쇠사슬로 우람한 누렁이를 고정한다. 먼저 말뚝 쇠사슬에 누렁이 뒷발을 감아 고정한다. 사 씨 아저씨는 나무토막 의자에 앉아 기다란 집게로 낡은 뒷발 굽을 빼낸다. 그런 다음 빼빠 같은 끌로 매끄럽게 다듬어 새 발굽으로 이 짝 저쪽 맞춰본다. 딱 맞는 발굽으로 결정한 발굽에 못을 대고 '톡오-톡! 톡오톡!'망치질을 한다. 한편 사 씨 아저씨의 큰아들은 대장간 내벽 불구덩이에서 달근 발굽을 긴 쇠 찌게로 집어 옆 물통에 넣는다. '칙-이익!' 물소리와 동시 하얀 뭉게구름 같은 김이 솟아오른다. 잠시 식힌 발굽을 얼른 꺼내 쇳돌에 올려놓은 아들의 얼굴은 벌겋게 달았고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게 쇠망치로 '텅-텅-텅 두들기며 발굽 모형을 뜬다.


나는 우리 집 별채 담벼락을 따라 난 행길 오른쪽에 자리한 한전 소와 영단 방앗간 쪽으로 향한다. 한전 소에서 몇 발자국 위쪽으로 가면 소전이 자리하고 있고 그곳에서 몇 발자국 더 위쪽으로 가면 토끼풀이 풍성한 넓은 뜰을 갖춘 유럽의 작은 마을의 성당 건축물의 미사홀과 미국 신부님 사저가 들어앉아있다.

소전 앞 장터에는 과일, 채소, 햇병아리와 닭, 양은그릇과 플라스틱 용품, 보따리 옷장수, 솜과 이불, 종류의 신발, 참기름, 들기름, 산나물과 찐 고구마 등 산골마을에서 또는 외지에서 온 장사꾼들이 바쁘게 장을 펼치고 있다. 장터 한복판(행사장)에는 약장수 쇼 흥행 장소로 사용한다. 장터 주위에 사는 동갑내기 복순네는 오일 장날에만 장사하는 술과 국밥 장사를 한다. 복순네 집 앞 골목길 모퉁이에는 오일 장날마다 흰 천막을 치고 떡장사들이 해 온 종류의 떡을 판다. 떡판에는 혀가 감칠 만큼 윤이 자르르 흐르는 쑥떡 절편, 보송보송한 콩고물에 입힌 따끈한 인절미, 보기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가는 꿀떡, 솔잎의 송편,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시루 팥떡 그리고 그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약밥이 있다. 장꾼들이 앉아 먹을 수 있는 폭의 기다란 낮은 목재의자와 테이블 사이로 떡장수 아주머니와 장꾼들이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지난 오일 장날 약장수가 열렸던 공터 행사장에는 작은 꽃무늬 달린 덧버선과 양말과 타월 등으로 펼쳐놓는 장꾼, 꽃장식의 종류의 머리핀을 가지런히 진열하는 장꾼이며 좀약, 오핀, 똑딱단추, 실과 바늘 및 이불 호창 꿰매는 실타래를 가지런히 진열하는 몇몇 새로운 얼굴의 장꾼들 모습이 바빠있다. 지난 오일장은 약장수가 오는 날이었다. 작은언니와 부랴부랴 이곳에 왔을 때는 장꾼들로 둥글게 띠를 이루고 있었다. 구경꾼 사이를 비 짓고 적당한 자리에 들어가자 원숭이 묘기 시작 전이었다. 풍작 풍작 연주하는 아코디언 악사와 등에 큰 북을 메고 북채와 연결된 오른발 줄을 앞으로 차 '덩-덩-덩' 울리며 하모니카 연주하는 악사 두 명이 흥을 돋우고 있었다.  

'저-저런, 시원찮게 먹이를 준겨, 워째 새싹 말라서  보기도 딱한데 실수까지 했으니 저걸 어쩐디야? 연습도 엄청 시켰을 텐데.'

구경꾼 무리 속에서 웅성웅성 안쓰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신사숙녀 여러분!  원숭이가 재주 부리다 나무에서 떨어진 광경을 보셨습니다. 원숭이는 자신이 나무에서 떨어질 줄 꿈에도 상상 못 했을 겁니다.'

'난쟁이 똥자루 만한 키에 두리뭉실한 체구의 악사 등에 질 머진 큰 북 옆구리 북채와 오른쪽 발목으로 연결된 줄을 앞으로 덩! 덩! 연속 두 번을 찬다.

'거기, 꼬마 학생!'

약장수 호명에 지레 겁먹은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동시 뒤 걸음 질을 쳤다.

'거기, 똘똘하게 생긴 남학생 말이여.'

약장수는 우리 옆에 선 사내아이를 지목했다. 

'저-저요?'

'역시 똘똘한 학생이여.'

'학생, 원숭이 노래 알지?"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슈?'

'그러니까 똘똘하다는 겨. 한 번 불러봐! 자, 여기 마이크 있으니까 힘차게 사나이답게!'

'........'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면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면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면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면 높아, 높으면 낙하산,

낙하산은 떨어져.'

'그렇습니다. 여러분, 절대 그럴 리 없을 거라 걱정 붙들어 놓았던 이 원숭이가 떨어진 광경을 보셨습니다. 존경하는 신사숙녀, 숙녀 신사 여러분!'

이때 등에 큰 북 맨 악사가 '덩덩덩덩!' 북채를 울리자 아코디언 악사가 '오동추야~ 오동동, 오동동' 노래 연주가 울려왔다. 앞 가름 마선 탄 머리에 얼마나 기름을 발랐는지 마이크 잡은 약장수의 모양새는 족제비 같았다. 악사의 연주가 끝나자 약장수는 양손으로 마이 크을 꽉 움켜쥐고 입가에 바싹 대고 침이 튕기도록 목에 핏대 세워 열을 올렸다.

'자아, 여러분! 제 말을 잘 들어보십시오. 어느 날 밥맛이 없고 매사에 의욕도 없어 얼굴이 창백해 마치 황달에 걸린 사람처럼 얼굴이 누렇게 뜬 사람, 이 신비의 '쏙쏙이 표 회충약" 한 번만 잡숴봐! 마른버짐 핀 아이, 한 번만 먹어봐! 하루가 다르게 콩나물 자라듯 쑥쑥 자랍니다. 여러분, 이 신비의 쏙쏙이 표 회충약으로 단 한 번 에쏘 옥 뽑아내 봐! 밥맛은 꿀맛이요 누런 떡잎처럼 뜬 아이들 얼굴이 복숭아 빛으로 뽀송뽀송 오르는 이 쏙쏙이 회충약 달짝지근해 자근자근 씹어 먹기도 좋습니다.' 

약장수 연설이 끝나자 악사가 '덩덩덩~' 북채를 울린다.

'여러분, 여기 이 사내아이에게 쏙쏙이 회충약을 먹여보겠습니다.'

또 한 번 덩덩덩 북채를 울린다. 회충약 복용하는 사내아이는 왠지 먹기 싫어 어적어적 씹는 표정이었다. 마지못해 삼킨 사내아이는 입을 딱 벌려 구경꾼에게 보여준다. 꾀죄죄한 옷차림에 부스스한 사내의 얼굴, 머리칼은 반 곱스에 숱도 많아 더 심란해 보이는 아이의 머리는 새 집이 따로 없었다. 개구스런 사내아이의 밝은 표정은 어디 한 곳 볼 수 없었다. 구경꾼들은 약장수 흥행 열기에 우왕좌왕이었다.

자, 신사숙녀 여러분, 단 한 번에 쏙 뽑아낼 여기 이 쏙쏙이 회충약 효과를 여러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이 사내아이를 잘 보십시오.'

약장수의 자신만만한 멘트가 끝나자 어깨가 딱 버어진 조수가 한쪽으로 조금 전 회충약 먹인 사내아이를 무슨 볏단 들듯 휙 들어 상체 복부를 어깨에 엎쳐 올리고는 아이의 아랫도리를 확 까내리는데 빤스도 안 입었는지 바로 사내아이의 흰 엉덩 살이 보였다. 지렁이인지 지렁이 비슷한 걸 사내아이 항문에 붙여 꿈틀거리는 건지 뭉티기로 꿈틀거렸다. 약장수 어깨에 둘러 엎친 사내아이 엉덩이를 빙도 아가며 구경꾼에게 보이는 것이다. 

'아이고, 징그러워라.'

우리 옆에 선 아주머니가 일그러진 표정과 몸을 움츠리며 질색이었다.

'헉! 언니, 보는 거야?'

나는 양손으로 얼굴 가린 손가락 사이로 엿보며 물었다. 

'어-어.'

작은언니는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나처럼 양손으로 얼굴 가리고 보고 있었다. 점점 쏙쏙이 회충약 선전이 절정에 이르자 악사들이 볼륨 높여 연주를 하고 구경꾼들이 여기저기에서 수군거렸다. 

'거기 여보 슈! 여기 나도 하나 줘 봐요?'

신바람 난 약장수는 정사각형의 납작한 회충약 각을 수북이 한 아픔 품에 들고 와 여기저기서 달라는 장군에게 건네주며 돈 받는 기쁨에 악사 두 명의 반주 템포가 점점 빨라졌다. 

'언니. 나아 이젠 변소 못 갈 것 같아.'

'순딩아.'

'응.'

'내년에 너 초등학교 입학하면 어느 날 선생님이 대변 봉투라는 걸 줄 거야.'

'대변 봉투! 그게 뭔데?'

'일명 '똥 봉투'라는 건데 크기가 가로세로 5-6cm 규격의 흰 봉투 안에는 작은 비닐봉지가 들어있거든. 담임선생님이 어느 날 우리에게 흰 대변 봉투를 나눠준다. 그러면 먼저 흰 대변 봉투 앞면 기재 난에 이름, 학년반, 나이을 적어 놓고 변소 땅 다리에 싸든 덤탕에 싸든 싼 똥을 나뭇가지나 나무젓가락으롤 콩알만큼 찍어 비닐봉지에 넣고 다시 하얀 대변 봉투에 넣어서 밥풀이나 풀칠로 밀봉해서 책가방 공책이나 교과서 책장 갈피에 끼어 놓았다기 선생님이 가져오라는 날 등교해 교단 앞에 준비해 놓은 5킬로짜리 비닐봉지에 넣어 복도에 놓으면 보거소에서 나온 사람이 다 가져간다. 그리고 몇 주 지나면 조회시간에 담임선생님이 색색의 종류별 회충약과 복용 대상 명단을 가져오거든. 학급 당번이 물주전자와 쟁반에 꽉 찬 뻘건 플라스틱 컵에 모두 담아놓으면 선생님이 배 속에 회충 있는 사람 이름을 호명하면 교단으로 나간다. 그러면 선생님이 보건소 명단에 누구는 간디스토마, 누구는 십이지장충으로  표시된 회충약을 골라주면  학급 아이들 보는 앞에서 복용해야 해. 근데 그 회충약 한 알이 얼마나 크던지 구슬 만한 거 있지. 손바닥에 받아 놓은 알약 보고 구토하는 아이도 있고 어떤 아이는 한 줍먹이나 되는 회충약을 한 알, 한 알 독약 먹는 표정을 하고는ㄴ 눈물까지 흘리면서도 먹는 아이도 있어. 반면 우리 반에서 제일 등치 큰 사내아이 득수는 한 주먹이나 되는 알약을 한꺼번에 입에 왕창 털어 넣고 한 모금의 물에 꿀꺽 삼키고는 무슨 영웅이라도 되는 냥 급우들에게 입 딱 벌려 확인시켜주는 거 잇지.'

'어-언니는?'

'어-어, 그-게 말이야. 얘는 가스활명수도 못 먹는 내가 회충약을 어떻게 먹냐? 나는 내 배 속에 회충이 없다고 자신하거든. 매일 할머니가 해준 삼시 세 끼 음식에 어떻게 회충이 있겠어? 학교에서 이 혐오스러운 걸 해오라닌까 마지못해 하는 거지. 매년 얼마나 짜증 나는데 게다가 회충약 안 먹으려는 생각에 신경이 예민해져 잘 나오던 똥도 똥 봉투에 담아 오라면 안 나오는 거 있지. 사실 그래서 말이야 어떡하면 회충약 안 먹을까 꾀를 섰는데 그게....'

'꽤! 무슨 꽤?;

'우리 별채 돼지막 앞 덤탕있잖아.'

작은언니 설명에 나는 심각하게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덤탕.'

'덤탕에서 똥을 찍어냈거든.'

'뭐어? 돼지똥을!'

'운도 지지리도 없지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는 거야.'

'그럼 어떡하냐. 돼지똥으로 냈습니다 할 수는 없잖아. 선생님이 빨강, 노랑, 하얀. 초록, 분홍 완전 총천연색으로 주는데 토할 것 같았어. 선생님 앞에서 더 이상 뜸 들일 수 없어 당번이 따라 놓은 물컵을 들고 한 알, 한 알 입에 넣으려니까 헛구역질이 나는 거야. 나도 큰언니만큼이나 약이라면 진절이를 치잖니.'

그렇다. 큰언니는 날씬해 보이려 매일 교복 입기 전  올인원과 씨름하느라 통근 밥을 걸을뿐더러 점심 도시락은 반도 더 남겨오면서 저녁식사는 식구챙이냥 게걸스레 먹고 체한 적이 여러 차례였다.

'큰언니는 신작로 약방에서 활명수 구입해 와서 아버지 앞에서 마셔야 했잖아. 그런 큰언니는 아버지 앞에서 긴장돼 마실 수 없어 샘터에서 마시고 보이겠다며  샘터에서 가서는 활명수가 무슨 독한 양주라도 되듯 입술에 되고는 갖은 인상과 몸서리를 치며 꾀를 부렸잖아.'

'무슨 꾀?'

'마신 척 입 속에 활명수 냄새만 풍기고는 샘터 수챗구역에 다 쏟아버리고 빈 활명수병만 보여준 거 있지. 나중에 아버지가 알아버렸지만 말이야.'

약이라면 나도 큰언니만큼 진저리 치잖니. 내가 삼킨 회충약이 목구멍에 걸려 교실바닥에 토해내고 말았어.'

'그-리고는 어땠어? 봐-았어?'

'무-얼?'

'어-엉덩이, 언니 엉덩이 말이야.'

'으-으응, 아, 그럼. 애는 당연히 봤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엉덩이 드는 동시 천천히 고개 들어 아주 천천히 숙이는데 구불구불한 것이...'

'아-아!'

자지러지는 나의 비명소리와는 달리 작은언니는 낄낄 웃는다. 그날 이후 나는 변소 공포증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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