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닿을 것 같은 뾰족한 산봉우리 아래 구불구불 춤추며 흐르는 금강 물 따라 아름드리 버드나무들이 쭉쭉 뻗은 강변의 드넓은 평야는 온통 푸른 땅콩 줄기로 덮였다. 평야 저만치 산등성을 등지고 자리한 플라스틱 공장은 고요히 흐르는 금강물를 시샘하듯 미끄럼 타는 장비가 '쿵-웅!'하고 내리치고는 '드르륵 올라가 덜커덕!' 걸치고는 다시 드르륵 내려와 쿵'웅! 드르륵... 사뭇 그렇게 오르락내리락한다. 거대한 공장의 굴뚝에서 연실 뿜어 오르는 뭉게구름의 회색 연기는 바람을 기다린 듯 허공에 잠시 머뭇거리다 서서히 산등성으로 사라져 갔다.
그곳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맞은편 구릉지에는 '공장 사택가' 라 부르는 가장 높고 전망 좋은 8층짜리 독신자 아파트와 웅장한 석조건물의 성결교회가 우뚝 서 있다. 주변에는 외지에서 온 간부급 가족이 입주한 단독주택과 공장 직원 가족이 거주하는 다섯 가구 형태의 주홍색 기와지붕의 하얀 단층 주택들이 계단식으로 아담한 뜰과 무성한 개나리꽃 덩굴이 울타리를 이루웠다. 봄날 저편 기찻길에서 바라본 이곳 공장 사택가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지금도 나는 그때의 봄 풍경을 스케치북에 그릴만큼 선명하다.
나의 고향은 그 옛날 금강의 소금 배 종착지 내륙지방의 관문인 포구로 이름이 높았던 곳이다. 초사흘과 보름에 한 번씩 지내는 배 고사떡만 얻어먹고 살 수 있을 정도였으며 배들이 싣고 온 해산물이 넘치게 많아 조기로 부채질을 하고 미역으로 행주를 삼았으며 명태로 부지깽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던 옛 통신수단과 왜적의 침입에 대비했던 봉수대가 약 300m 되는 토 축성의 '노고산성' 또는 '애기 바위성' 능선의 산등성 아래 천연 약수로 유명했던 충청북도 청원군 갑촌리 마을이다.
나는 갑촌리 마을 시장통에서 식료품 장사하는 부모님의 2남 5녀 중 세쨋 딸로 태어났다.
여섯 살이던 1969년 갑촌리 시장통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 성화 소리와 다양한 사물소리로 삶의 풍성함이 넘쳤다. 언제나처럼 떡방아 찧듯 플라스틱 공장에서의 가동 소리와 이른 아침 갑촌역에 정차하는 경부선, 호남선의 통근 완행열차, 하루에도 몇 번씩 휙휙 쏜살같이 달려가는 특급열차, 우등 열차, 새마을호 열차 소리, 새벽녘 성당에서 들려오는 심오한 종소리, 시장통 상인들과 장꾼들과 오가는 소리, 오일장 날이면 이웃마을과 타지방에서 온 이동 장사꾼들과 장꾼들의 아우성 소리, 월요일이면 아침 조회 시간에 마이크 타고 흘러나오는 갑촌 초, 중학교에서의 애국가 반주 소리, 중간 시간이면 녹음기 방송 타고 흘러나오는 신세계 리듬체조 구령 소리, 매월 15일이면 반공 훈련 사이렌 소리, 여름철 아침에 면사무소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지면 동네 사람들은 싸리비 들고 나와 힘차게 내 집 앞길을 '싸악, 싸-악' 소리 내 쓸었다.
우리 집은 시장통 중심이자 골목길 가새에 자리한 전방과 살림집을 겸비한 안채를 따라 안쪽으로 빗장 대문과 연결된 안마당을 중심에 두고 바깥채와 별채로 둘러져있다. 동네 사람들은 서로 맞주 보는 전포 가게들 사이로 길이 나있다 하여 '시장통이라 부른다.
시장통에 위치한 가게들을 소개합니다. 우리 집 가게를 중심으로 왼쪽에 자리한 가게로는 고지 백이 땜쟁이네, 양은그릇 집, 엄씨네 닭집, 박씨네 담배 집, 석이네 정육점이 자리하고 있다. 오른쪽으로는 신밧드 신발가게, 갑촌 양복점, 오 약방, 영순네 옷집, 종호네 쌀집, 신나라 자전거포 집, 갑촌 문방구점이 있다. 우리 집 맞은편 좋은 돌 가게 왼쪽으로는 육씨 할머니 대폿집, 임씨네 가게, 강식이네 정육점, 영풍이네 정육점, 조씨네 가게, 갑촌 정육점, 국숫집, 철물점, 이발소, 포목집, 못 집, 갑촌 국숫집, 떡방앗간, 쌀 짐이 자리하고 있다. 오른쪽으로는 돼지네 대폿집, 샛탈말가게, 풍년상회, 펭귄 아이스께끼 집, 유니나 미장원, 고물상 겸 엿집, 동명 상회, 신발가게, 영흥 전파사가 자리하고 있다.
갑촌 시장통을 중심으로 원경 200미터에는 영단 방앗간, 한전 소, 성당, 소전, 면사무소, 목재소, 양조장, 감촌초등학교, 중학교, 지서, 우체국, 가발공장이 자리한 평지보다 지면이 높은 갑촌역에서부터 플라스틱 공장 길 어귀까지 400미터 직선의 비포장도로 '신작로'가 펼쳐있다.
역 광장 주변으로는 역전다방, 진미 상회, 역전 중화요리점, 갑촌 여관, 수다방, 돌체다방, 역전 이발소가 자리하고 있다. 역 광장 신작로 왼쪽가에는 역전 사진관, 신진 여인숙, 역전 술집, 상해 중화반점, 구멍가게, 미미 양장점, 형제당 제과, 아모레 화장품점, 복 다방, 철공소, 장로교회, 구멍가게, 연탄집, 국숫집, 싱싱 자전거포 집, 광동 중화요리, 홍 약방, 문방구점, 세탁소, 만두집, 쌀집, 갑촌 극장, 구판장, 조일 양복점, 신화 약국, 현미용실, 만화가게, 사천중화요리, 갑촌 의원이 자리하고 있다. 신작로 오른쪽으로는 신진 여인숙, 하숙집, 과자 도매집, 주산학원, 분식점, 청주시내버스정류장, 식품점, 안제 의원, 유리 집, 부광 약국, 책 서점, 로마 양장점, 서울약국, 자연 사진관, 소주 도매집, 산냇끼 꼬는 집, 안성 상회, 현숙 미용실, 서울 양행, 명시당, 소금 우표집, 노의원, 조치원 시내버스정류장, 용포 막걸이 집, 기와공장, 신사 이발소, 나드리 양장점, 문방구점, 갑촌초등학교 문 앞 길이 위치하고 있다. 문방구점 앞으로 청주로 가는 비포장도로가 펼쳐있고, 갑촌초등학교 주변 동네 저편으로 공장 사택가와 플라스틱 공장이 위치하고 있다. 공장 뒤편으로는 그 옛날 문전성시를 이뤘던 비둘기 장(비둘기라는 동네 이름 붙인 오일장) 이 섰던 비둘기, 검시, 금호 마을로 가는 뿌연 횟가루 덮인 공장 길이 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