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을 위한 미라클 모닝은 기적을 가지고 왔다.
창세기에는 이삭의 우물 이야기가 나온다.
이삭이 힘들게 우물을 파면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흙으로 메우거나 자기네 것이라 우긴다.
누가 봐도 억울한 상황이지만 이삭은 다투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서 다시 땅을 판다.
그곳에서 물이 터지면 또다시 쫓겨나고, 또다시 판다.
최근 나의 정신적 방황을 지켜보던 교회 장로님은 이삭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어릴 때부터 알고 있던 내용이지만 제때 떠올리지 못했던 나에게 지금 꼭 필요한 이야기였다.
어릴 때는 이삭이 그냥 착한 사람이라 양보한 거라고 이해했다.
하지만 사업을 하며 그 의미는 다르게 느껴졌고, 지금은 아주 뼈저리게 다가온다.
이삭에게 중요했던 건 '우물'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디서든 물이 터지게 만들 수 있는 능력 그 자체였을 것이다.
나에게는 우물을 빼앗긴, 춥고 긴 겨울이 참 많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우물]
2000년대 초반, 스무 살.
IMF의 여파와 집안 사정으로 나의 신용은 무너졌다.
사용할 수 없는 카드라는 음성을 듣고 알게 된 신용불량자의 삶.
나는 그저 대학을 1년 다녔을 뿐인데
써보지도 못한 30,000,000원의 빚.
그리고 20,000,000원의 이자.
시급 3,000원으로 감당할 수 없었던 나는 투잡, 쓰리잡으로 해결해 보려 노력했지만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당시 아빠는 새엄마와 과일을 파는 장사를 했다.
내 신용을 삼켜버린 트럭을 몰고..
"너도 장사 한번 해볼래? 중고 트럭 한 대 사줄 테니까."
장난처럼 던진 아빠의 한마디를 붙들었다.
아빠는 91년식 중고 포터 한 대를 50만 원 주고 샀다.
그렇게 스물한 살이 되던 해의 나는
어쩌다 보니 트럭 속 사장이 되었다.
-어떤 과일이 어느 지역에서 나오는지?
-얼마에 물건을 가져와 얼마에 팔아야 마진이 남는지?
-사람들이 차를 세우고 과일을 살만한 장소는 어디인지?
-하루 중 언제 오픈해서 언제 마감하는 게 가장 매출을 높일 수 있는지?
-과일을 몇일만에 팔아야 상품 가치가 유지되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시작한 장사였다.
구리도매시장을 본진으로 삼고
마늘은 전라남도 고흥으로,
개구리참외는 경상남도 진영으로,
사과는 경상북도 문경으로,
딸기는 경상북도 고령으로,
면허를 따자마자 전국유랑단이 되어버렸다.
덕분에 운전 실력은 빠르게 향상되었다.
물건 하러 지방을 다녀오면 잠을 못 잔 채로 바로 장사를 시작했다.
하루를 쉬어버리면 과일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기 때문에 시간이 곧 돈이었다.
처음에는 아빠가 선정해 주는 자리에 트럭을 세우고 물건을 내렸다.
물건을 내리는 도중 검은색 SM5 한 대가 내 트럭 뒤에 멈췄다.
그리고 아저씨 한 분이 내리셨다.
"아이고~ 젊은 양반이 열심히 사시네~"
"어서 오세요~"
"아니 근데, 그건 뭐예요? 처음 보는 과일이네?"
"개구리참외라고 참외랑 멜론의 중간 형태? 그런 거예요."
참 어설픈 대사였다.
누가 나를 장사꾼이라고 생각했을까?
"그건 어떻게 해요?"
"5개에 3만 원이요."
"어휴~ 그렇게 비싸요?"
차 안에 있던 사모님의 큰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그냥 가자. 집에 과일 많아."
그때의 난, 손님을 잡을 능력도, 물건을 파는 능력도 제로였다.
그때 아저씨는 지갑을 꺼내 만 원짜리 지폐를 꺼냈다.
"3만 원어치 주세요."
"감사합니다."
개구리참외를 검은 비닐봉지에 담는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서비스는 없나?"
아저씨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직 진열하지 않은 작은 사이즈의 개구리참외 2개를 비닐봉지에 같이 넣어드렸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참외니까 맛있겠지 ㅎㅎㅎ. 장사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죠?"
"네 뭐 그냥."
"열심히 사는 모습 이뻐 보여서 사는 거예요. 많이 팔아요~"
"감사합니다."
장사의 시작과 동시에 나타난 개시 손님.
그 아저씨에 대한 고마움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 아저씨가 그날 그 도로를 지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언제쯤 개시를 할 수 있었을까?
한 번씩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마늘 장사를 할 때였다.
장사할 만한 곳을 찾다가 어느 교회 앞 도로에 장사하는 트럭 2대가 보였다.
그 뒤에 차를 세우고 물건을 만지작 거리던 사장님께 다가갔다.
"저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혹시 여기서 장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나를 빼꼼 쳐다보던 사장님이 말했다.
"장사를.. 본인이 직접 하는 거예요?"
나는 바로 뒤에 정차 중인 내 트럭을 가리켰다.
약간 난감해하던 사장님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이 길이 내 소유도 아닌데 그걸 뭘 나한테 물어봐요. 하고 싶으면 해요."
내가 직접 픽 한 장소는 그곳이 처음이었다.
그 도로에는 내가 처음 말을 건넸던 옷장사 아저씨,
그리고 천냥백화점(지금의 다이소)에서 팔 법한 물건을 파는 20대 형이 있었다.
그 장소는 매출을 많이 올리지는 못했으나, 정말 큰 배움이 있었다.
옷장사 아저씨는 처남이 중국에서 물건을 보내면 한국에서 노점으로 판다고 했다.
앞으로는 외국어를 잘해야 한다며, 영어는 기본이고 중국어랑 스페인어 공부를 해두라고 했다.
매번 나보다 먼저 장사를 시작하던 아저씨는 손님이 없을 때 책을 읽고 계셨다.
그분은 대기업에서 부장으로 일하다 IMF때 회사를 나왔다고 했다.
그래도 늘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하고 계셨다.
천냥 형은 28살이라고 했다.
대학을 입학하고 IMF가 터져 바로 군대에 입대했다고 한다.
졸업해봐야 예전처럼 취직이 쉽지도 않고, 직장인 월급은 뻔하니 장사를 하기로 결정한 것.
자본금이 없으니 트럭 한 대 사서 천냥을 판다고 했다.
"이거 얼마에 가져온 줄 알아요? 400원 ㅎㅎㅎ 정말 땡잡았죠?"
"400원이면 괜찮은 가격이에요?"
옷장사 아저씨가 대화에 입장하셨다.
"이 사람아 400원이면 마진이 60%야. 자네가 파는 마늘은 마진이 얼마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대답을 못하는 나에게 아저씨는 원포인트 레슨을 무료로 해주셨다.
고흥 농협직판장에서 가지고 온 가격.
내가 파는 마늘 한 접의 가격.
왔다 갔다 차비와 식대.
한 차를 몇일만에 팔아치우는지.
교회 앞 보도블록 위에서 대기업 부장 출신 아저씨에게 듣는 경영학개론 강의.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다.
아저씨는 회사를 다니든, 노점을 하든, 점포를 운영하든,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내용이며, 사장이라면 자는 걸 깨워서 물어봐도 대답할 수 있을 만큼 내 사업에 대해 빠삭해야 한다고 하셨다.
나의 마진은 30% 수준이었다.
마진뿐 아니라 시기마다 지역별로 장사가 잘 되는 곳을 알려주셨다.
덕분에 전라북도 남원에서 열리는 춘향제에 가서 엄청난 매출을 올려보기도 했다.
아빠를 설득해 경기도에 막 생기던 신도시에 들어가 마늘 한 차를 하루 만에 팔고 나오기도 했다.
겨울에는 딸기를 팔았는데, 이게 아주 상전이었다.
딸기를 팔기 위해 호루차를 탑차로 바꾸었다.
하우스나 실내 보관 장소가 없으니 밤 사이 비싼 딸기가 얼지 않도록 살펴야 했다.
작은 난로를 켜두고 아빠와 한 시간에 한 번씩 교대로 난로 위치를 바꾸러 다녀왔다.
딸기는 마진이 괜찮았다.
대신 앞으로 남고 뒤로 빠진다는 말의 현실판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판매 속도는 생각보다 많이 느렸다.
딸기 컨디션이 나빠질수록 내 몸 컨디션도 나빠졌다.
빨리 그 겨울이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봄이 왔지만 나는 계속 추웠다.
트럭 가지고 옮겨 다니는 것도 큰 일이었다.
나는 지식이나 근거는 잘 모른다.
그냥 직감을 믿고 시작한 일이 잘 될 때가 많았다.
나는 아빠에게 여름이 오면 생과일주스를 팔아보자고 했다가 거절당했다.
자본이 조금만 있다면 밀어붙이고 싶었지만 그럴 돈도 없었다.
그리고 그 해 여름.
생과일주스는 대박이 났다.
멘털이 무너지고, 현타가 심하게 찾아왔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사업은 흐지부지 정리가 되었다.
[두 번째 우물]
나의 30대는 병원이 전부였다.
그 안에서 일하고, 그곳에서 만난 아내와 결혼하고, 아이들 육아하며 출퇴근한 기억뿐이다.
두 아이 모두 어렸지만 둘째 육아가 참 힘들었다.
딸이라서 그런 건지, 미숙아라 그런 건지, 예민하고 많이 울고 엄마에게만 매달려 있었다.
우리 부부에게 최악의 시기였던 그때.
원장님의 배려로 나는 육아휴직을 시작했다.
그리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치료를 시작하고 상담을 받으며 약을 처방받고 운동을 하며 다시 살기 위해 애를 썼다.
정신적으로 치유가 시작된 건지, 나는 한동안 잊고 살았던 단어가 떠올랐다.
"꿈"
지금 내가 노점 장사를 할 수는 없지만 지금 시대에 맞는 사업을 해보자!
이런 마음을 먹고, 이런 이야기를 하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네가 무슨 사업을 해?
요즘 경기도 안 좋은데 그냥 직장이나 잘 다녀, 딴생각하지 말고.
장사는 아무나 하는 줄 알어?"
그러나 그들의 공통점이 있다.
장사를 해 본 경험이 없으며, 꿈도 없고 노력도 그다지 하지 않는..
그저 누군가의 꿈에 불이 붙으면 즉시 소화기를 뿌리는 역할에 충실한..
예전 트럭 장사 시절이 떠올랐다.
그땐 뭘 알아서 시작했나?
시작하니까 하나씩 알게 되었던 것들.
노점상은 결국 실패했다.
하지만 장사를,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그때 배운 것들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삭이 우물을 빼앗겨도 새로운 우물을 계속 팠던 것처럼..
내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침잠이 아주 많은 사람이다.
군복무 시절에도 지각을 했을 만큼 아침이 힘들다.
그런 내가 새벽 4시 정도에 꼭 눈이 떠졌다.
알람도 없었고 깨우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스위치 on 버튼을 누른 것처럼 정신이 맑게 깨어났다.
뭔가 시작하라는 신호였다.
온라인을 활용한 사업.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
무작정 탈잉, 클래스 101 등 강의 플랫폼에서 여러 강의를 수강했다.
필요한 교육은 서울까지 올라가서 수강했다.
책도 쓰고 싶은 마음에 책 쓰기 수업도 수강했다.
그중에서도 마케팅 강의에 가장 많은 자금을 투입했다.
2019년 초부터 2020년 가을까지의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지금도 운영 중인 회사를 설립했다.
직원은 나 혼자였다.
매출은 없지만 고정 지출은 계속 흘러나갔다.
내가 사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원장님이 많은 응원과 지원을 해주셨다.
하지만 코로나 시대였던 2020년은 새로운 거래처 확보를 위한 미팅 자체가 너무 어려웠다.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무료 봉사도 많이 했다.
특히 예산이 부족한 학회의 행사 촬영을 무료로 해드리고 편집 영상까지 제공했다.
몇 년을 다니다 보니 학회에 참석하는 메인 교수님들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인사를 하셨다.
어떤 이득을 바란 것도 없었다.
그저 내가 좋아서 따라다녔을 뿐인데
감사하게도 지금은 그 학회의 메인 홍보회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사업은 나의 뿌리이자 본진이다.
큰 성장세도 없고 어마어마한 매출을 발생시킬 수 있는 아이템도 아니다.
하지만 꾸준하게 베이스라인을 깔아주는 가장 중요한 사업이다.
생존을 위해 시작한 미라클모닝은 진짜 기적을 가지고 왔다.
[세 번째 우물]
세 번째라고 표현하지만 두 번째 우물보다 시작 시점은 먼저였던 아이템이다.
병원에서 일하며 원장님과 선의로 시작한 일이었다.
해외에 나가는 환자, 해외에서 국내로 들어오는 환자분들의 요청으로 시작된 일.
상당한 행정력이 소비되고, 시간과 에너지 투입이 많이 필요했다.
특히 해외의 의료기관은 검증된 곳을 보내야 하는데 누가 가겠는가?
나와 원장님이 직접 방문해 확인하고 검증했다.
해외 의료기관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국내에 직접 방문해서 시설, 의료진, 시스템 등 많은 부분을 확인했다.
9년.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아가며 의료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수요가 증가하고, 인력은 과부하 상태에 돌입했다.
"플랫폼을 만들자"
원장님의 아이디어는 간절함에서 나왔다.
그리고 앱 개발을 위한 투자를 받아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우리는 환자를 위한 앱을 생각하고,
투자자는 비즈니스 모델과 수익에 포커스를 맞추니 성사가 되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정부지원사업에도 도전하고, 사업계획서를 발전시켰다.
결국 니즈의 공통분모가 있는 회사를 만나 투자유치에 성공했다.
그리고 지금은 성공적으로 앱 출시도 마쳤다.
이 글에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어떤 사람 A.
그는 아주 오랜 시간 같은 편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사람이다.
나도 그를 매우 좋아했고, 의지하기도 하고, 선배 사업가로 존경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우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공격의 시작은 원장님을 향했다.
그다음엔 우리 멤버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향했다.
이런 일은 가진 것 없이 살아온 나에게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나를 상당히 흔들었다.
잘하는 게 없어서 인정받기 어려웠던 내가 처음으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일이었기 때문일까?
정신적으로 피폐할 만큼 망가뜨려버렸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우물을 빼앗긴 이삭도 이런 감정이었을까?
한 달의 시간 동안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하기 싫었다.
14년 만에 처음으로 아내와 추석 연휴를 통째로 쉬며, 강원도 여행을 다녀왔다.
그곳에는 20대 시절 무용하던 내가 있었다.
그때의 선생님을 만나 추억을 나누며 내 생에 가장 열정적이었던 시간을 다시 소환했다.
그랬다.
나는 꿈 많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직장 생활과 결혼, 육아로 현실에 충실해야 하는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투자받은 회사에서 팽 당해주었다.
그가 부탁해서 6개월간 돈과 시간을 투자했던 컨설팅 업무는 돈 한 푼 받지 않고 손을 뗐다.
그리고 14년간 애정을 담았던 병원을 퇴사했다.
퇴직금은 없었으며, 자의로 빚을 안고 나왔다.
원장님은 고맙다고 했다
나도 고맙다.
직장 생활을 10년 넘게 할 수 있게 해 주었고,
결혼과 육아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진짜 사업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고,
내가 가장 힘든 시기를 지탱해 주었고,
살면서 만나기 힘든 분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결정적으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었다.
[네 번째 우물]
사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이 사건들로 인해 정신적으로 가장 피폐했던 날이다.
안장 없는 자전거.
꼭 나를 표현하는 문장 같았다.
안장이 없다고 멈춰있을 수는 없다.
이삭이 다시 삽을 들고 우물을 팠던 것처럼,
나는 나만의 도구를 활용해 다시 나아간다.
안장 없는 자전거를 연재하며
이 연재를 통해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한 생각을 했다.
놀랍게도 어제 네 번째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얼마 전 떠오른 아이디어의 구상을 마치고 사업계획서 초안을 작성했다.
작년 이맘때도 사업계획서 작성으로 많은 밤을 잠못이루었다.
하지만 모니터 속 깜박이는 커서를 보며 웃음이 났다.
내가 대단하지는 않지만 작년보다 조금은 단련되었다는 게 느껴졌다.
네 번째 우물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엉거주춤한 자세로 페달을 돌려야 할 것이다.
남들이 볼 때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다.
다리가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손목에도 무리가 갈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다양한 알바 현장에서 얻은 경험,
트럭 위에서의 경험,
무용을 하며 쏟아냈던 열정,
결혼생활과 육아로 다져진 멘털,
새벽 4시를 지켰던 성실함,
깨지며 배운 사업에 필요한 자잘한 잔기술들,
그리고 가장 강력한 필살기.
14년 동안 하나둘씩 내 옆에 다가온
귀한 사람들!!!
빼앗긴 들에 봄을 심는데 가장 큰 힘!
[에필로그]
지난해. 10살이었던 아들과 함께 안장 있는 자전거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일요일 아침 즉흥적으로 떠났습니다.
"아빠랑 자전거 타고 싶어요."
아들의 한마디로 시작된 대장정은 부산에서 밀양까지 왕복 60km가 넘는 거리를 달렸습니다.
평소 운동을 하지 않은 탓에 엉덩이도 아프고 다리도 아파 너무 힘들었습니다.
10살짜리 아들의 별명은 태릉인입니다.
아주 다행인 건 저의 저질체력을 물려받지 않았다는 점!
아들과 앞뒤로 자전거 도로를 달리며 휴게 매점에서 간식도 사 먹고, 화장실도 들르며 추억 한 장을 찐하게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삼랑진 시장에서 팔토시도 사주고, 카페에서 시원한 음료도 마시고, 차로 다닐 땐 눈에 보이지 않았던 풍경들을 담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들은 중간중간 벤치에서 저를 기다려주었습니다.
마치 아들이 어릴 때 속도를 맞춰주던 저의 모습을 기억하는 것처럼 여유로운 표정이었어요.
그렇게 달리다 보니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며 밤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문득 이 글의 시작점이 떠올랐습니다.
안장없는 자전거를 타고 한강 다리를 건너며 해가 뜨는 풍경을 바라보던 이십 대 초반의 나.
20년이 흘러 멀쩡한 자전거를 타고 10살짜리 아들과 자전거도로를 함께 달리고 있다는 생각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그날은 서러움과 원망의 눈물이었고,
이날은 행복함과 뿌듯한 눈물이었습니다.
밤 9시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다리가 터질 것 같고 내일은 몸살을 예약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녹초가 된 저를 보며 아내는 말합니다.
"또 정신 못 차리고 자기가 20대인 줄 알지. 내일 출근 어떡할라고 거기까지 갔다 왔어."
귀여운 잔소리가 싫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직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 둘째의 모습도 보입니다.
"내년에는 넷이서 안동까지 가보자!"
샤워하던 아들이 큰소리로 대답합니다.
"네~ 좋아요. 꼭 가요. 안동까지"
아내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합니다.
"못 산다 정말. 전기자전거면 생각해 볼게"
샤워를 마치고 나온 아들이 말합니다.
"엄마! 그건 반칙 아니에요? ㅋㅋㅋ"
우리는 모두 1인용 자전거를 타고 인생을 달립니다.
수많은 갈림길을 마주하게 되고 계속된 선택을 이어나갑니다.
모두가 1등이 되어야 한다는 교육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천천히 달려도 괜찮다고,
때론 멈춰도 괜찮다고 말해주며 어설픈 질주를 계속 이어가려고 합니다.
저는 제가 아는 최고의 힐러니까요^^
브런치 작가가 되고 연재한 첫 브런치북 [안장없는 자전거]에
라이킷과 정성스러운 댓글, 그리고 구독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쓰다 보니 10회가 훌쩍 넘어가고 몇 회까지 쓸지 고민하던 끝에 드라마처럼 16부작으로 마무리를 하려다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20회까지 연재하는걸로 결정했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만큼 부족함도 많습니다.
저는 유독 저에게만 엄격한 기준을 제시하며 살아왔는데요,
별거 아닌 사람이 별일 아닌 경험들을 늘어놓은 글을 다시 읽어보니..
저,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었네요^^
앞으로 제 자신을 잘 다독여주고 칭찬도 많이 해줘야겠습니다.
드라마 막내 스태프로 여의도에서 안장없는 자전거를 타고 한강 다리를 건너던 20대 초반의 저는 오늘 영상회사를 운영하며 촬영을 위해 차를 타고 여의도를 지나며 아침 해를 바라봅니다.
같은 장소, 같은 태양, 그러나 다른 시간..
이 글의 시작점을 돌아봅니다.
힘들고, 안풀린다고 불평도 하고, 넘어지며 나만 불행한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러지진 않았더니 오늘에 이르렀네요.
잘하는 게 하나도 없던 나도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글을 투고하려고 처음 쓸 때 제목으로 생각했던 문장입니다.
별거 아닌 사람이지만 짧은 제 경험과 버텨온 이야기에 단 한분이라도 힘이되고 희망을 얻으신다면 글쓴이로써 참 행복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막을 내리는 안장 없는 자전거 덕분에 저는 글의 페달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부족한 글에 소중한 댓글을 남겨주셨던 분들 정말 복 받으실 겁니다!!
브런치 작가님들의 글을 읽으며 많은 부분을 배웠습니다.
그동안 초보작가 첫 연재 [안장 없는 자전거]에 관심 가져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다음 연재도 많은 관심 부탁드리며,
안장없는 자전거 운행은 여기서 종료하겠습니다.
- 로건 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