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를 꿈꾸던 나는, 아직도 배우고 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야. 평생"
해군부사관 시절 외과군의관이 해준 말이다.
그분은 동기들보다 다섯 살이나 많았다.
그 5년은 의대 입시에 4번이나 떨어진 시간이었다.
의대에만 가면 인생이 많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 막상 의대에 들어가니 10년 넘게 공부만 해야 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 깊은 한숨은 누구나 각자의 짐을 지고 사는 거라고 느껴졌다.
그때부터였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라는 말이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한 건.
나는 어릴 적부터 해보고 싶은 게 많았다.
과학자, 학원강사, 가수, 작곡가, 의사, 방송작가..
그러나 언제나 발목을 잡는 건 돈이었다.
꿈을 꾸려면 돈이 필요했고,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했다.
일을 하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없으니 실력은 늘 제자리였다.
나는 언제나 그 어정쩡하고 애매한 중간 어디쯤에 머물러 있었다.
고1 겨울방학, 방구석에서 <접속>, <편지>, <8월의 크리스마스>를 연달아 본 날이었다.
실제 상황도 아닌 허구의 이야기에 내 감정이 널뛰며 혼자 대성통곡을 했다.
화면을 통해 타인의 감정을 좌지우지하는 배우들의 힘이 경이로웠다.
그날 나는 배우라는 꿈을 선택했다.
방법을 몰라 무작정 종각역으로 향했다.
종로서적, 영풍문고, 교보문고 대형 서점을 돌며 연기 관련 책을 읽었고
<나도 연극영화과 갈 수 있다>라는 책 한 권을 붙들고 발음부터 대사 연습까지 독학을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본 드라마 엔딩크레디트의 'MTM' 문구를 보고 학원을 찾아갔지만, 비싼 수강료 앞에 다시 한번 좌절할 뿐이었다.
결국 벼룩시장을 뒤져 하교 후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시급 3천 원. 적은 금액이었지만 내 꿈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했다.
그마저도 한 달을 채우자마자 사장은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며 해고를 통보했다.
처음 약속한 조건과 다르게 12시간 일하는 직원의 월급 3분의 1로 계산하는 기적의 논리로 나온 30만 원의 급여는 보름이나 지나서야 받을 수 있었다.
학원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전단지를 돌리며 악착같이 돈을 모으던 어느 날,
나를 내쫓았던 사장에게 연락이 왔다.
"너 돈 안필요하냐? 내일부터 다시 나와서 일해라."
나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시급 3천 원에 영혼까지 팔아먹는 선택을 했다.
어떤 달은 제때, 어떤 달은 기약 없이 월급을 기다리며 마음을 졸였다.
쉬는 날이 없으니 학원 등록을 할 수가 없고, 그만두자니 수강료 마련이 막막했다.
돈을 벌기 위해 꿈을 미루고, 꿈을 좇으려니 돈이 없어 멈춰 서는 모순.
진퇴양난의 늪에서 내 삶의 질서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해군부사관 합격자 발표까지 6개월 남았던 2005년 초, 방송반 모임에 나갔다.
그 자리에는 현업 CF 촬영감독인 10년 선배가 있었다.
배우 지망생이라는 내 소개에 선배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래서 너는 지금 어떻게 준비를 하고 있는데?"
"지금은 그냥 강남에서 배달 일하고 있어요."
"강남에서 무슨 일을 하는데?"
"배우가 꿈이라면서 왜 배달 일을 해? 그게 연기력 향상에 도움이 되니?"
집안 형편과 나의 신용불량 스토리를 길게 늘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선배의 질문은 집요했다.
"오디션은 보고 있고?"
사실 오디션은 당연히 보러 다녔다. 다만 제대로 된 회사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더 사실적으로 말하자면 준비되지 않은 나를 뽑아주는 제대로 된 회사가 없었던 것이다.
"중요한 건 네 선택이야.
빚이든 군대든 배우를 하고 싶으면 거머리처럼 그쪽에 달라붙던가.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일 해.
이유를 달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
세상에 생각보다 할 일 많다."
나도 알고 있기에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한 내 선택의 모순을 꼬집는 질문들..
칼에 베인 듯 쓰라렸다. 벌거벗겨진 기분이었다.
내 꿈이 부끄러운 건지, 나 자신이 부끄러운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선배의 눈에 비친 나는, 꿈을 핑계로 현실을 도피하는 나약한 청춘이었을지 모른다.
결국 나는 입대 전까지 일을 하며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다 도망치듯 군대로 떠났다.
꿈이 질긴 건지, 내가 미련한 건지..
복무 중에도 나는 꿈을 놓지 못했다.
"그때 해볼걸"
나중에 나이 들어 이런 후회를 하기 싫은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었을까?
당시 인기 드라마였던 <베토벤 바이러스> 속 강마에의 대사가 뼈를 때렸다.
"꿈? 그게 어떻게 네 꿈이야? 움직이질 않는데.
그건 별이지. 하늘에 떠있는, 가질 수도 없는, 시도조차 못하는. 쳐다만 봐야 하는 별.
네가 뭔가 해야 될 거 아니야.
조금이라도 부딪히고 애를 쓰고 하다못해 계획이라도 세워봐야 거기에 네 냄새든 색깔이든 발라지는 거 아니야?
그래야 니 꿈이다 말할 수 있는 거지 아무거나 갖다 붙이면 다 네 꿈이야?"
그 시절 나에게 배우라는 직업은 꿈이 아니라 그저 바라만 보던 '별'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때의 선택은 실패였다.
나는 배우가 되지 못했으니까.
나는 20대 끝자락에 선택한 병원 일을 14년 동안 해왔다.
나의 30대를 갈아 넣어 원장님과 함께 키운 병원을 얼마 전 퇴사하고, 나의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 여전히 돈을 벌어야 한다.
하지만 이제 나는 예전의 나처럼 안장 없이 페달을 열심히 돌리고 계시는 영세 자영업자, 막 출발선에 선 신생 기업가들의 자전거를 뒤에서 밀어주는 일을 한다.
배우 대신 선택한 길이었지만 이 또한 내 인생의 소중한 선택들이었다.
꿈은 하나여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마흔이 넘어서야 겨우 알았다.
인생에 완벽한 자전거는 없다는 것을.
때로는 바퀴에 바람도 빠지고, 체인이 풀리지만 결국 고쳐 쓰고 다시 달리면 그만이다.
과거의 내가 엉망진창인 자전거를 타고 어떻게든 달릴 수 있었던 건,
묵묵히 뒤를 밀어주던 수많은 손길 덕분이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내 곁에는 항상 넘어진 자전거를 일으켜 세워주고, 고장 난 자전거를 고쳐주는 '귀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안장 없는 자전거를 끌고 가면 손잡이를 잡아주고, 체인이 끊어지면 기름때를 묻혀가며 함께 고쳐주던 사람들 말이다.
정작 번듯한 자전거를 타고 달릴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들은 곁에 없다.
도움만 받고 갚지 못한 미안함이 크지만,
모든 인연에는 시절이 있기에 현재의 인연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그 빚을 갚으려 한다.
이제는 내가 누군가의 안장이 되어줄 차례다.
비록 화려한 조명 아래 서는 '배우'가 되지는 못했지만,
나는 인생이라는 거친 무대 위에서 삶을 온몸으로 겪으며
매일 '배우'고 있다.
넘어진 자전거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법을,
그리고 누군가의 흔들리는 안장을 잡아주는 법을,
그렇게 배우를 꿈꾸던 나는, 오늘도 인생을 배우고 있다.
다음 편은 안장 없는 자전거의 마지막 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