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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트 Apr 22. 2020

사이클

라이프 1

 매일 아침 8시 알람이 울리면 그냥 나는 죽고 싶다.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실내 사이클, 저걸 사는 게 아니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만 관심받는 현실을 자기도 아는지 그것은 내게 심리적 압박을 계속하고, 그럼 난 저기에 앉을지 아니면 한 시간 잠을 더 잘지, 어떤 선택지를 고르든 고통스러울 고민을 해야 한다. 정말 이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때면 비몽사몽 사이클에 앉은 뒤 리모컨으로 넷플릭스를 켠다. 그러고는 아무 영상이나 보며 열심히 페달을 돌린다. 한 시간에 30km. 그것이 내가 감당 가능한 최대 속도이고 그 이상으로 무리를 했다가는 출근이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골골대며 일할 수는 없지, 암 그렇지. 자기 합리화와 함께 운동을 끝내면 9시 10분. 이제 얼른 씻고 대충 얼굴에 무언가 찍어 바른 뒤 학교로 간다. 적어도 50분에는 출발해야 바삐 걸어 54분에 횡단보도 신호를 통과할 수 있다. 매일 10시 1분 전에 도착하면서 내일은 더 일찍 와야지, 생각하지만 그다음 날은 더 늦어버려 대문을 나와 달려야 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몇 달째 적응된 이 사이클은 생산적인 아침을 시작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부족한 것은 운동뿐이라는 생각과 함께.


 휴학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려고 엄마에게 제시했던 내 계획에는 매주 무엇을 공부할지 할당량이 정해져 있었고, 그대로만 진행된다면 1년 뒤 주커버그를 잇는 컴퓨터 천재가 되어 자그마한 스타트업을 유니콘 기업으로 키워낼 수 있을만한 실력가가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올해 초 당시 연애 중이던 나는 그것에 집중하기 바쁜 나머지 그런 계획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원래 계획이라는 것은 이루지 못하는 데에 의미가 있으며 국가의 부름에 열심히 부응했던 나도 조금 긴 휴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합리화를 하며 보내다 지금은 4월, 한 해의 1/3이 지나가 버렸다. 이뤄낸 것은? 겨울에 시작해 날이 따뜻해지기 전 끝나버린 연애 정도. 질적인 측면을 떠나 그저 첫 연애라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그러했다. 말고는 딱히. 적당히 먹고살 만큼 아르바이트만 하며 놀기 바쁜, 그냥 쇼핑에 중독된 자취생이 되었다.


*


 어제와 그제 점심 모두 누군가가 사준 초밥을 먹었다. 전에는 회 자체를 정말 싫어했다. 물컹물컹하고 질겅질겅 거리는 아무 맛도 안나는 이것을 초장 맛으로 삼켜야 하다니 참 고역이다 생각했었다. 그래서 초밥도 먹을 생각이 없었는데, 일 년 전쯤 먹었던 초밥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사실 좀 맛있었다.) 그 이후 누가 초밥을 먹자고 하면 따라가 사실 내가 20년 넘게 회를 싫어했다고 밝혀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든 다음, 이제는 괜찮다는 말을 덧붙여 괜히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장난을 치곤 했다. 그런데 딱 초밥까지만 먹을 수 있겠다는 내 생각과는 달리, 얼마 전 먹은 연어회도 이젠 나쁘지 않았다. 분명히 싫었는데 왜일까. 새내기 때 선배가 데려간 연어 무한리필 집은 정말 최악이었는데. 몰랐던 맛을 깨닫게 된 것인지 입맛이 변해버린 건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잘 오락가락하는 성격이지만 취향 같은 건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니 오래된 친구는 얼마 전 내게 고등학교 때 나와 현재의 나의 취향이나 센스가 뭔가 달라졌다고 말했던 것도 같다. 문득 새내기 시절의 나를 떠올려보니,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그렇게 된 것이 조금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최근 본 에세이에는 매일 밤 굶고 자겠다 다짐하지만 꽤 자주 실패한다는 자기 고백이 담겨있었다. 내일은 다르게 살겠다 말하지만 크게 변화하진 않고, 그런 사람이 적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그게 나쁜 것도 아니라는 작가의 말. 치킨을 그만 먹겠다, 매일 아침 꼭 운동을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실패하는 나와 너무나도 비슷해서 조금 머쓱했다. 갖은 이유를 동원하여 지친 나에게 휴식을 주고 싶고, 당면해있거나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문제는 슥슥 피해 가고만 싶은 나. 내가 문제인 걸까? 그럴 확률이 높겠지만 책임 전가 전문가인 나는 또 다른 구멍을 찾고야 만다.


 생각 없이 살았지만 나름 닥쳐온 일은 어찌어찌 이겨내곤 했다.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둬도 괜찮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들기 시작한 이유였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한몫했다. 지나갈 사람은 지나갔고 돌아올 사람은 돌아왔으며, 돈은 있다가도 없었고 죽을 것처럼 외롭다가도 오래 지나지 않아 누군가 곁에 있어주었다. 조금 운명론적일지도 모르는 생각들. 누군가 만들어 놓은 사이클 위에서 난 그저 페달만 굴리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르내림이나 속도 따위를 내가 결정할 수는 없겠지. 무슨 외계인의 실험체라도 된 것 같아 조금 웃기긴 하지만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갑자기 공부를 하게 될지도 모르고, 당분간 연애는 생각 없다 선언했음에도 다시 누군가에게 빠질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젠 정말 안 먹겠다 다짐했던 치킨도 시키고 말겠지.


 좋고 싫고 미워하게 되는, 변화하는 모든 것과 모든 일에 책임을 묻지 않았으면 하는 게 내 솔직한 마음. 의지와는 다르게 비틀어졌으나, 나중에 돌이켜봤을 때 결국 그렇게 될 것이었다는 사실은 사람 너무 맥 빠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냐고. 그렇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계속 페달을 돌리는 수밖에 없다. 투덜거리면서 할 건 또 열심히 하는 게 내 장점이니까. 오늘 치킨을 먹었으니 내일 아침엔 정말 운동을 해야 한다고 다짐하며 잠드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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