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헤엄치는 법
이제 더는 눈치 보지 말자
일본 드라마를 몇 번 시도했지만 뭔가 쉽지 않았다. 일단 다들 너무 과잉되었고 , 뭔가 별 거 아닌 일로 소리를 지르며(?) 흥분하는 장면들이 살짝 거부감이 들었다. 심지어 나는 애니메이션조차 인물들이 너무 '왁!' 하는 장면을 견디지 못해서 살며시 뒤로 넘겨버리는 편이다. 그러니 인간의 연기는 더욱 힘들 수밖에.
그럼에도 특유의 잔잔함을 맛보고 싶어서 여러 작품을 시도하던 중 꽤 호평을 받은 <나기의 휴식>이 보고 싶어졌다. 옛날에 리뷰를 썼던 <일일시호일> 주인공 배우가 이 드라마에서도 주인공이라 더 흥미가 생겼다. 아쉽게도 구독 중인 넷플릭스에 작품이 없어서 고민하다가 결국 왓챠를 결제했다. 이렇게 된 이상, 뽕을 뽑겠어...!
주인공 나기(쿠로키 하루)는 도쿄에서 전자 제품과 관련된 대기업에 다닌다. 언제나 눈치를 보느라 무리해서 웃기도 하고 과한 부탁을 들어주느라 야근이 잦다. 직장 동료들과 식사를 할 때도 '어떤 대답을 해야 좋게 넘어갈까?'에 집중하느라 어설프게 굴어버리곤 한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에이스 신지(타카하시 잇세이)와 달콤한 비밀 연애 중이지만, 눈치를 보고 원하지 않는 요구를 들어주는 건 똑같다. 심한 곱슬머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 매일 머리만 1시간 넘게 만지고, 남들이 자신을 욕하지 않을까 신경을 쓰며 SNS도 꾸준히 들어간다. 그래도 나름 하루하루 버티며 살던 나기는 동료들과 신지가 뒤에서 자신을 무시한다는 걸 알게 되고, 결국 공황이 와 회사에서 쓰러진다.
인생을 리셋하고 다시 제대로 살아보고 싶어진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고 이사를 간다. 심지어 이전의 흔적을 지우겠다고 이불 꾸러미와 자전거만 챙기고 나머지 짐은 모두 폐기 처분해 버린다. 등에 이불을 들쳐 매고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는 나기를, 이삿짐센터 직원들은 멍하니 바라본다. 공황이 왔을 때 나기의 숨소리와 자전거를 타며 가빠진 숨소리는 어딘가 비슷하게 들리지만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그렇게 도착한 새로운 보금자리는 사진과 달리 너무 낡았다. [엘레강스 팰리스]라는 이름이 무색할 지경이다. 어쩐지 월세가 너무 싸더라니! 게다가 여기 사람들도 좀 이상하다. 자판기 밑에 지팡이를 넣어 동전을 줍는 '잔돈 사냥 할망구', 대낮부터 파티라도 여는지 시끄러운 옆집, 화려해 보이는 손님들, 인사도 안 받아주는 무뚝뚝한 초등학생까지. 그래도 텅 빈 방 안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여름 바람에 나기는 진심으로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진정한 '휴식기'를 맞이하...
는 줄 알았는데. 신지는 어떻게 알았는지 나기의 새 보금자리까지 찾아와 들쑤신다. 신지의 진심은 뭐지? 그리고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대체 정체가 뭘까?
에피소드 10회 동안 나기는 실수와 깨달음을 반복하며 부지런히 성장한다. 한 번에 깨닫는 건 없다. 처음으로 거절도 해보고 하고 싶은 일도 벌여본다. 친구도 사귀고, 그 친구와 다투기도 하고 '나쁜 남자'와 사귀며 평범했던 일상을 망쳐보기도 한다. 나기가 나쁜 길로 빠질 때마다 따뜻한 [엘레강스 팰리스] 사람들은 방황하는 그녀에게 따뜻한 차, 밥, 간식을 주며 곁을 지킨다. 나기도 마찬가지다. 먼저 말조차 걸기 힘들었던 그녀는 어느새 친구를 위해 두려움을 무릅쓰고 함께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100%가 아닌 60%여도 괜찮다고, 다음에 또 잘하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당당히 폭탄 머리로 살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개인적으로는 전 남자친구 신지의 성장 서사도 꽤 인상 깊다. 소시오패스처럼 보이던 그도 사실 나기처럼 '눈치 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저 남들 비위를 맞춰주는 데 능숙할 뿐, 신지도 가족과 주변의 분위기에 맞춰 사느라 어지간히 진을 빼며 살아간다.
예전에 수족관에 갔을 때 정어리가 다 같이 똑같은 방향으로 가는 걸 봤어. 우리는 이렇게 사이가 좋다며 일부러 보여 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러워졌고 당장 그 자리를 뜨고 싶었어. 그랬더니...... 무리에서 떨어진 정어리 한 마리가 힘차게 반대 방향으로 헤엄치기 시작했지.
'저 정어리는 혼자 왜 저래?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난 그 녀석을 동경했어. 내키는 대로 떨어져서 어디든 가라며 응원했지.
(3화 中 )
작품에서 공황을 표현하는 방식은 두 사람의 정어리 이야기와 맞닿는다. 깊은 물에 빠져 숨을 쉴 수 없는 기분. 보이지는 않지만 날카로운 분위기에 가슴 깊숙이 베이는 그런 기분. 거센 물살을 거슬러 헤엄친다는 것은 옆구리가 수없이 베이는 기분일 것이다. 외롭고, 두려울 것이고 무리 지어 헤엄치는 이들이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들은 더는 수많은 정어리 틈에 억지로 섞이지 않기로 다짐한다. 설령 혼자 헤엄치더라도, 곁에서 힘내라고 외쳐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리고 진심으로 서로에게 마음을 쓰는 법을 배웠으니까. 여전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고 머리는 땀에 젖어 복슬거리지만, 나기는 오늘도 힘차게 자전거를 탄다.
부족하지만 사랑스러웠던 사람들의 보금자리였던 [엘리강스 펠리스]는 모두가 떠난 후 포크레인에 의해 천천히 허물어진다. 더운 여름 최고의 파트너였던 노란 선풍기를 품에 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기는 감사 인사를 남기며 홀로 작게 말한다.
휴식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