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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임새 Jun 30. 2023

내 가슴을 뛰게 한 그녀를 지우다

옷을 비우고 깨달은 것



계산대 앞에서 카드를 건네던 순간이었다. 매장 안 직원출입용 문을 열고 나오는 익숙한 실루엣. 그녀였다. 그녀를 보자 가슴이 뛰었다. 내가 시리즈별로 수집해 닳도록 넘겨보던 발간물의 저자이자 주인공이었다. 

사진 한 컷 한 컷에 담긴 그녀의 거실, 부엌, 옷장은 탐이 났다. 계절마다 바뀌는 커튼과 침실 리넨,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본듯한 커트러리들, 목걸이 모자 구두 옷까지 그녀가 쓰고 걸치는 것들은 소유욕을 자극했다. 그녀의 SNS를 팔로우해 매일 바뀌는 착장을 체크했고 브랜드, 가격, 판매처 조사에 열을 올렸다. 내가 살 수 있는 범위의 가격이면 입꼬리가 올라갔고 근접불가한 비싼 아이템에는 어깨가 처졌다. 





그날도 그녀의 감각을 조금이라도 흉내 내보려 그녀가 디자인하고 운영하는 샵에 들른 차였다. 그녀가 사용해 보고 좋다고 추천한 물건으로 우리 집을 채우면 감각이 따라온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입고 찍은 옷과 똑같은 옷을 걸치면 패션센스가 복사될 줄 알았다. 감각과 노하우와 경험을 손에 넣는 지름길은 지갑을 열어 물건을 사는 거라는 믿음에 빠져있던 때였다.  믿음 안에선 즐거웠다.





하나씩 늘려온 옷과 소품은 곰팡이 번지듯 20평이 채 안 되는 집 공간을 잠식해 갔다. 미처 다 걸쳐보지도 못한 채 계절이 흐르고 변덕이는 날씨에 옷들의 출격순서는 뒤죽박죽이 됐다. '저 코트를 이번주에 입어야 할 텐데, 봄이 아니면 못 입는 옷인데 날씨가 도와줘야 하는데...' '울 니트는 택도 못 뗐는데 내년에나 입어야 되겠네...' 한껏 기대를 품고 들인 물건들은 활용하기도 전에 애정이 식어가고 왠지 모를 조바심이 났다. 이런 내 속 사정은 아랑곳없이 SNS 속 그녀는 계절을 앞질러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놓치면 후회할 신상 한정 원피스를 입고서.  


멀어지는 그녀와의 거리를 좁히려 몇몇 아이템을 다시 새로 들였다. 속도를 내 따라잡아야 할 상황이었다. 바람과 달리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쌓인 옷들은 모래주머니가 된 듯 내 다리를 무겁게 하더니 이내 달리는 보폭이 좁아지고 속도도 느려졌다. 옷장 앞에서 입을 옷을 고르는 즐거움도 사그라들었다.




뭐가 문제였을까? 

그녀는 내가 따라잡을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녀의 화려한 착장을 흉내 내려면 더 많이 더 오래 소비해야 했다. 의무처럼 계절마다 새 옷을 사고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하는 일도 버거워졌다. 그녀의 단편적인 모습을 따라 하는 일이 점차 힘에 부쳤다. 

'더 늦기 전에 유턴을 해야겠어'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고 SNS 언팔로우 버튼을 클릭했다. 서서히 그녀와 멀어졌고 궁금함의 크기가 작아졌다. 즐거움 뒤에 숨긴 부담감으로 나를 짓눌렀던 옷과 소품들은 하나씩 우리 집을 떠났고 집안에 빈 공간이 늘어났다. 다양한 물건과 옷이 선택할 자유를 준다는 착각에서 빠져나왔고 시선이 달라지자 물건들이 족쇄처럼 느껴졌다. 





보는 것이 많아질수록 내 삶이 눈에 보이는 것과 같아지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더 간절해진다. 그런 생활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비교 사례들이 소비하고 획득하며 축적하려는 우리의 욕구를 부추긴다.

<나는 인생에서 중요한 것만 남기기로 했다> 




그때는 불안했지만 유턴은 옳은 선택이었다. 그 방향대로 지금도 나는 느린 속도로 걸어가는 중이다.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소중함을 느끼는 것들로 삶을 채우고 의무가 아닌 내가 선택한 자유를 넓혀가고 있다. 물건수를 늘리지 않을 자유, 옷장 앞에서 고민하지 않을 자유,  트렌드를 따르지 않을 자유, 비교하지 않을 자유까지. 보지 않고 멀어지는 일은 자유라는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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