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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 큰 나무의 미혜 Feb 08. 2023

겨울잠 자는 곰이 되고 싶어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감기일까? 목구멍은 뾰족한 바늘로 찌르듯이 아프고 머리는 회전 놀이기구를 타는 것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확실히 감기였다. 서둘러 침실로 들어가 자야 하지만, 들어가기 싫었다. 새벽은 약 두 달의 겨울방학 동안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매일 아침 남편에게 일찍 자라는 잔소리를 들어도 자고 싶지 않았다.


 "아빠! 엄마 아직도 자!" 아이의 목소리가 알람이 되어 잠을 깨웠다. 딸그락 샤아아 째잘 째잘 소란스러운 아침의 소리에 머리가 진동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겨울잠 자는 곰처럼 깨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아이들과 EBS에서 겨울잠 자는 곰을 본 적이 있었다. 곰은 겨우내 중간중간 일어나 최소한의 먹이만 먹는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곰이 되고 싶었다. 점점 나이가 들수록 겨울만 되면 소화가 안 된다. 몸속까지 냉장고처럼 차가워져 입안으로 삼킨 음식물이 얼어붙어 자주 체한다. 뭐,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겨울방학에는 잠만 자고 싶다. 잠에서 깨어나면 분홍꽃잎 흩날리는 봄이었으면 좋겠다.


 어린 날의 내가 가장 좋아한 계절은 겨울이었다. 하나둘 떨어지는 눈송이에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여지면 두툼한 흰옷에 푹 파묻혀 얼굴만 빼꼼히 내밀었다. 두 뺨을 스치는 찬 바람에 발걸음을 재촉하면 금세 몸은 뜨끈히 달아올라 겨울은 더없이 맑고 시원해졌다. 언제까지나 유리처럼 투명한 계절을 턱 끝까지 숨이 차오르도록 달려 나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아이들은 겨울만 되면 아팠다. 겨울 여왕이 불러온 눈보라는 내뿜는 한숨마저 얼려버렸다. 갈수록 시리기만 한 이 계절이 두려워졌다. 하루 이틀 그리지 못하는 하루가 쌓여 겨우 두 달일 뿐인데도 겨울방학에는 무기력해졌다. 되돌아보면 40대가 되도록 내가 한 일이라고는 아이 둘을 낳은 것밖에 없었다. 어느 날, 힘들다며 울먹이던 나에게 남편은 쉼표를 찍어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지킬 수 없는 약속이란걸 잘 안다. 프리랜서인 남편에게는 지금 당장이라도 생계가 달린 중요하고 다급한 전화가 올지 모른다. 허황한 희망만 기다리기에는, 지친다.


 여전히 아이들과 함께 있는 나날은 소중하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도 문득 초점을 잃고 멍해진다.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시계는 초 단위로 재촉한다. 초침에 묶여 쉴 새 없이 움직이는데도 아무런 성과없는 최선일뿐이다. 이제 아이들도 이만큼 컸으니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되지 않을까? 비록 모아둔 노후 자금도 없고 아이들 양육비에 부모님 부양비까지 발등에는 불이 떨어졌지만, 40대에 하지 않으면 영영 꿈을 꿀 희망마저 사그라들 것 같다.


 도대체 이 우울한 마음은 어디에서부터 온 걸까? 혹시 씨앗으로 맺히기 전부터 가시 돋칠 선인장이 될 운명이지는 않았을까? 언제부턴가 아무 일이 없어도 불안하고 우울하다. 이토록 하루가 무겁게 젖어 드는 날에는 도무지 잠에서 깨고 싶지 않다. 그저 나의 보랏빛 우물이 눈물에 잠기도록 아이처럼 목 놓아 펑펑 울고 싶다. 엄마니깐 맑은 척했지만, 언제나 비가 내린다. 엄마라는 기대감에 주위 눈치를 보며 주문처럼 아무도 모른다는 말만 나직이 되뇌고 있다. 홀로 오롯이 슬픔을 마주 보고 싶다. 내게는 정신 놓고 울며 그런 자신을 위로할 시간이 필요했다.


 끝없이 우울한 생각의 꼬리를 무는데 남편이 침실로 깨우러 들어왔다. "감기에 걸렸나 봐. 목이 너무 아파"라고 말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남편도 걱정스러운 눈길로 이마를 슥 짚어보더니 조금 더 자라며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주고는 작업실로 갔다. 역시 어제는 일찍 잤어야 했다. 천장이 거친 속도로 핑글핑글 돌자 후끈하게 열이 올라 시야를 흩트린다. 아득히 멀어져가는 일상의 끈을 놓고는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울렁거리며 꿈결을 오르내렸다. 그때 갑자기 수면 위로 아이들이 떠올랐다. 밖이 조용한데 뭐 하고 있지? 걱정어린 궁금증은 우물에 잠긴 무거운 몸을 끄집어 올렸다. 목소리 대신 기침이 터져 나왔지만, 서둘러 마스크를 찾아 쓰고는 습성처럼 아이들을 찾아 옆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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