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자부인 Jul 19. 2024

능이백숙을 기다리며

 얼마 전 친정어머니를 하늘로 보내신 분이 장례에 와주어 고맙다며 능이백숙을 사주셨다. 오랜만에 만나는 모임이라 기대에 들떠 일찍 집을 나왔다. 약속 장소 근처에 가서 책을 고르는데 이석원 님의 보통의 존재 10주년 기념판이 눈에 띄었다.


"미련이 많은 사람은 인생이 고달프다고 한다. 사람은 때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건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자세를 배울 필요가 있어서 '나에게 허락된 것이 이만큼이구나' 인정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 제명에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 산다는 건 그저 약간의 안도감을 가지고 시내 대형서점에 들러 책 한 권을 고르는 일에서도 충분히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만약 체념에서 비롯된 행복이라면, 더 많은 것을 갖고 싶고, 하고 싶은데 그 모든 욕망들을 어쩔 수 없이 꾹꾹 누르고 ,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많은 영화에 일찌감치 백기를 든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건 자신에 대한 기만이 아닐까."


 대학교 신입생이 되던 해 집이 망했다. 한꺼번에 모든 걸 다 잃은 기분이었다. 원래 대단한 독기와 욕망도 없었거니와,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사는데 익숙해져 갔다. 주시는 이도, 취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니 나는 받아들였다. 심지어 연애 때도 남자친구가 헤어지자는데 너무 속상했지만 그러자고 했다. 다행히(남편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다시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남편과는 다르게 나는 그 옆에 그냥 머무는 사람이다. 두 명의 자녀를 양육하고 가정을 돌보는 일을 하다 보면 그것대로 시간도 들고 힘도 많이 든다. 그런 일상을 유지하는 보통의 아줌마의 삶은 내가 원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다 보니 오래전 망한 집 둘째 딸의 체념에서 비롯된 것 같기도 하다. 살림을 하다 좋아하는 책을 읽는 시간이 잠시 주어지면 충분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정말 다라고 생각하냐고. 낮시간이 비교적 자유로운 여자들이 능이백숙집에 모여 맛있는 점심식사를 한다. 찹쌀밥까지 얼마나 맛있던지. 백숙집 앞에 핀 연보라 배롱나무꽃은 얼마나 예쁘던지. 집에 돌아와 다시 살림을 하다 이석원 님의 산문을 읽는 일이 얼마나 즐겁던지. 보통의 하루가 어려운 날도 있었음을 기억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 모든 안도감이 자기기만이고 체념이고 게으름일까 두렵지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