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시유감
어제는 거의 10시까지 애들 자소서 봐주다가 난독이 또 오는 것 같아서 피신하다시피 퇴근을 했다. 1학기를 돌아보면 고3담임이라고는 해도 자습감독 부담도 별로 없었고 우리반 애들은 세상 착하고 예쁜 애들이라 견디지 못하겠다 싶을 정도로 힘든 일은 없었는데 원하는 대학 대신 원하지 않는 대학을 애들에게 권하는 것은 진심 못할 짓이었다.
흔히 이야기하는 in 서울 대학- 그 중에서도 인기있고 유명한 열 몇 개 남짓의 대학교는 그야말로 욕망의 아이콘이라 할 정도로 학생들의 선호도가 높다. 하지만 그 학교들은 절반 이상의 신입생을 학생부종합전형으로 선발하는데 이게 자기 진로를 일찍 정한 몇몇의 심지 굳은 학생들에게는 확실히 유리한 전형이지만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았거나 특정 전공에서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고학력/중산층 부모를 두지 않은 학생에게는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한다. 이는 자기소개서를 쓰는 시기에 아주 극명하게 나타나는데, 성인들도 쓰기 힘들어하는 자기소개서를 고등학교 3학년이 제법 멋들어지게 쓰려면 '학습 경험과 배우고 느낀 점을 쓰시오'라는 질문에 '기분이 좋았다'나 '뿌듯했다' 이상의 고급한 표현을 글에 녹여낼 수 있는 내공- 곧 부모의 문화자본이 반드시 필요하다. 대부분 고등학교에서 전교권에 드는 학생 중 노동자 계급의 자녀들은 이 단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부모 중 아무도 이러한 것을 알려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갈수록 대학 입학처에서 부모의 경제력이 높은 수도권 특목/자사고 학생을 대놓고 선호하는 현상이 뚜렷해지면서, 대부분 일반고 학생들은 평균 1등급대 초중반의 내신등급을 얻지 않는 이상 이들 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되어버렸다.
자정까지 강제로 야간자습을 하느라 죽도록 힘들었던 나의 고3시절을 생각하며, 1학기 동안 3학년부실을 찾았던 몇몇 인기없는 대학교의 입학처 사람들을 생각하며, 자기소개서가 안 써져서 힘들어하던 우리반 학생들의 얼굴에서 대학의 몰락을 조심스럽게 예상해본다. 당장 올해 우리반 아이들은 진학의 갈림길 앞에서 대학에 가거나 혹은 가지 않을 것이고, 인기있는 인서울 대학교의 높은 콧대도 당분간은 여전하겠지만, 제도를 가지고 장난질을 하며 평범한 노동자들과 평범한 고등학생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한국의 대학들에게는 학령인구 감소라는 피할 수 없는 블랙홀이 있기 때문이다. (20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