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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굽는 건축가 Nov 01. 2021

우리 사이에 있는 것들을 찾는 시간


나에게는 정원사 친구가 있다.

2008년에 회사 업무를 위한 계약관계로 만나, 지금은 같은 지역, 같은 면에 사는 이웃이 된 정원사다. 
몇 년 전 건축과 정원을 주제로 공개강의를 함께 할 때, 청중들 앞에서
˝이정 원사님은 real(실제)이 없어요, 정원을 만드는 일을 하시면서 아파트에 살고 있잖아요.
24시간 땅을 밟고 사셔야 하는데 하루의 1/3은 허공에서 살잖아요˝

그날 이후로 정원사는 땅을 찾아서 살 집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5분 거리에 집을 짓고 이쁜 정원을 가꾸며 살고 있다. 

건축가인 내가 정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정원사 덕분이다. <원예가의 열두 달, 정원 여행, 정원 사용설명서,..... 정원일의 즐거움> 꽤 많은 정원 책을 읽고 책 속에서 땅과 사람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채며 살고 있다. 

정원사는 나에게 나무와 꽃,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열어준 사람이기도 하다. 정원사는 되려 내 덕분에 땅에서 올라와 건축이라는 ‘키 다른 세상‘을 보았다고 하지만, 나 역시 건축을 넘어 ‘시간이 흐르는 생명‘을 바라보는 시선을 배우게 되었다. 

정원사들은 건축가들과 비교할 때 일을 대하는 방법이 다르다. 손에 든 장비도 다르고, 발걸음의 속도와 자세도 다르다. 땅에서 시작과 마무리를 하는 모습은 건축가와 같을지 모르지만, 정원사들은 사람과 나무, 비움과 채움 사이에 대한 직관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다. 눈높이도 그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낮은 초화류부터 높은 교목의 빈 공간에 24시간, 4계절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지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사람들이다. 

살아 있는 나무와 풀들의 질감, 신발 한 켤레의 크기에서도 그들은 생명의 패턴을 발견하고 새로운 기대를 만들어 낸다. 그들이 발견한 씨앗과 꽃, 나무들의 패턴은 한 계절이 바뀌면서 진가를 발휘한다. ˝제가 원했던 것으로 가고 있어요˝라는 것처럼 시간을 기다란 사람들이다.  


정원사들은 내가 만드는 건축이 정원과 어떻게 마주 해야 할지 알게 해 주었다. 
크기의 차이에서 오는 것일까? 정원사들은 자신들의 손안에 잡히는 작은 것부터 시작한다. 한 손에는 모종삽을 들고 가벼운 창 가리게 모자를 쓰고, 멋져 보이는 정원용 앞치마와 가위를 들고 땅에 주저앉아 일을 한다. 그리고 곧 나무와 풀들을 땅으로 돌려준다. 때로는 건물 안으로 들여다 놓기도 한다. 자연을 만들어 주는 사람들이다. 좋은 직업이다.

한 번에 많은 책들을 조금씩 보는 일에 익숙한 책 읽기 덕분에 오늘은 <정원 통신>이라는 책을 보고 있다. 
정원 통신에서 몇 구절을 옮겨본다. 
<우리 모두는 창조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창조성을 개발하겠다는 의식이나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창조성을 발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는 꽃과 나무다. 베란다의 화분이나 마당의 정원을 통해 창조적인 에너지를 발굴하고 나면 생활의 모든 면에서 깜짝 놀랄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나에게는 임무가 있다. 그것은 최고의 원예전문가가 되는 것이나 모든 사람들이 세계적인 수준의 정원을 가꾸도록 돕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의 임무는 원예 초보자나 경험자나 똑같이 어떻게 하면 정원을 창조적인 각성의 도구로 삼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나에게도 임무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 건축을 직업으로 살다 보면 까다로운 건축주, 황당한 상황, 예견치 않은 결과까지 다양한 경험을 한다. 그래도 불평하지는 않는다. 불평한다고 좋아지는 일을 경험하지 못했기도 하지만, 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 나은 방법을 찾아 헤매며 살아온 공장식 삶과 효율적인 삶도 있지만 다른 방법의 삶을 찾아 핸드메이드 삶을 사는 방법도 있다. 아파트의 모습이 공장식 표준화된 모습이라면 주택에서는 핸드메이드적인 삶을 살게 된다. 단 빵 대신에 천연효모종을 스스로 배양해서 홈베이킹을 한다. 

가을이 왔다. 부추꽃이 진 자리에 부추씨가 까맣게 달리고 집 앞마당 감나무에는 벌레 먹은 감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볕가리개 모자를 쓰고, 건축가의 손에도 모종삽과 전지가위가 들려있다.

(2019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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