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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굽는 건축가 Jan 17. 2022

동네 총무의 소임

2019년 11월 26일

2019년도 하반기 우리 동네 총무 소임도 마무리되어갑니다. 이제 한 달 후면 신임 회장과 총무가 뽑힙니다. 

“이번에는 유난히 총무 소임이 많아”라는 저의 푸념에

“모두 자기 차례가 총무면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라는 답변이 돌아옵니다. 

그래도 올 하반기에는 할 일이 분주했음을 인정해주는 분위기들입니다. 마을길에 뿌릴 흙을 주문, 회관 보일러를 교체, 장미마을 방문 준비, 추석맞이 이장님 방문, 2020년 비료 신청, 졸업과 입학 축하선물까지 하반기에 한 일이 많기는 합니다. 이제 12월까지 할 일은 감각 있게 1년을 결산하는 비용 정리와 한 해 동안 있었던 일들을 사진 영상으로 발표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행사를 위해 준비해야 하는 공식적인 자료들입니다. 하반기 총무를 맡는 일은 왠지 마지막까지 할 일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지난해까지는 동네 대학생들과 청년들이 한 해 동영상을 준비하고 그 대가로 맛있는 저녁을 사주었는데 올해는 지원자가 없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제가 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어제는 한 달에 한 번 있는 정기모임 날이었습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있었던 자잘한 일들과 각 집에서 있었던 대소사를 나누고, 앞으로 한 달 동안 할 일이나 겨울을 맞아 미리 준비할 것들을 정리하는 시간입니다. 오랜 시간 회의를 해온 탓에 상대의 의견에 유연하게 웃음으로 받아넘기는 기술이 생긴 탓인지, 마을 회의는 진지한 일도 한바탕 웃음으로 넘어가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예를 들자면 마을회의 때 밥 당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올해 처음으로 해보는 밥 당번 제도에 대해서 밥을 준비하고 설거지와 마무리까지 하는 일이 버겁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30명분의 식사를 두 집이 준비하는 일은 식당에서 단체손님을 받은 것과 규모면에서는 다르지 않기는 합니다. 돈을 내고 밥을 먹은 일은 아니지만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평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도 하고, 밥과 반찬, 찌개를 준비하는 일도 수월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동네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밥 당번이 준비하면 대접받는 느낌이 있어서 좋아요. 계속해요.” 앞으로도 이변이 없는 한 밥 당번 제도는 정착이 될 것 같습니다. 실은 저도 밥 당번 제도가 마음에 듭니다.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제가 만든 음식의 평가도 괜찮게 나오는 편이고 해서, 다음번에는 어떤 음식을 할지 궁리를 하는 저로서는 밥 당번 제도에 찬성입니다. 


당번을 맡은 두 집은 며칠 전부터 메뉴를 무엇으로 해야 할지 소통을 하고, 재료를 사러 다녀오고, 다듬고 쌀을 씻어서 미리 불려놓고, 마을 회의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밥을 푸고, 찌개를 덜고, 반찬을 내오고 분주해집니다.

어제 준비된 음식은 청국장과 삼치찜입니다. 어떤 음식이 나올지는 마을 톡에 하루나 이틀 전에 공지가 됩니다. 그럼 사람들의 반응도 나오고,  “음 주메뉴를 알았으니 나는 반찬으로 시금치를 가져가야겠네” 같은 찬조 반찬들도 준비가 됩니다. 어제는 방울토마토 장아찌, 시금치, 수육, 동치미가 찬조 반찬으로 나왔습니다. 어제 나온 찌개에 대한 평가는 후한 편입니다. “와 청국장 맛있다. 이 청국장 직접 만든 거예요?” ,”수육이 누린 냄새도 없고 맛있다. 어떻게 삶은 거래요?”, ”음 오늘 동치미 식감이 살아있다. 역시 겨울엔 동치미야, 고구마랑 먹으면 맛있게다” 같은 평가들입니다. 

살아오면서 내가 만든 음식에 정이 듬뿍 담긴 이런 평가를 받아볼 일이 얼마나 있겠나 싶습니다. 식사를 준비하고 나르고 상을 차리는 일은 다 같이 합니다. 이게 식당과 다른 풍경입니다. 아이들은 젓가락과 수저를 놓고, 엄마들은 뜨거운 찌개를 나누어 담고, 아빠들은 주로 상을 펴고 나르는 일을 합니다. 12평이 조금 넘는 마을회관 거실이, 식당이 되는 일은 간단합니다. 상을 차리면 됩니다. 각 가정에는 식탁이 있고, 의자에 앉아서 밥을 먹지만, 마을 회관에 식탁이 넓은 자리를 차지하면 장소를 다양하게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마을 주방에서 준비한 음식으로 상다리가 휘어진 적은 없지만 차려진 음식이 많아서 상이 작다는 것은 매번 느끼고 있습니다. 아이들 한상, 술을 즐기는 아빠 모임 한상, 수다를 즐기는 모임 두상, 이렇게 네 개의 상이 차려졌습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밥을 먹는 일은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즐거운 일이 분명합니다. 옛날 한옥의 대청은 아니지만 우리 동네 마을회관은 이처럼 다양한 용도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손님들이 오시면 게스트하우스, 영화를 볼 때는 영화관, 강의를 할 때는 강의실, 노래를 부르면 합창연습실입니다. 작은 장소이지만 가구들과 칸막이가 중심이 아니고, 사용하는 사람들이 중심이기 때문에 가능한 구조입니다. 마치 옛날 한옥의 대청마루 같은 구성과 비슷합니다. 


어제 회의에서는 밥 당번이 준비하는 재료비는 5만 원 전후로 하자는 기준이 마련되었습니다. 전화로 마을 이장님(행정구역으로 편성된 공식적인 이장)께 내년에 텃밭에 사용할 비료를 100포 부탁드렸고, 저녁을 먹고 나서 볼 영화로는 최근 일본에서 만들어진 ‘서바이벌 패밀리’를 보기로 하였습니다. 동네가 오래되어가니, 관계에서 오는 소소한 불편함보다는 함께 살면서 느끼는 자잘한 이야깃거리로 웃음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생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동네 분위기 속에서 다시 따뜻한 동네 겨울을 맞이하게 됩니다.


동네 회관에서 어제 함께 본 ‘서바이벌 패밀리’는 아내가 추천한 일본 영화입니다. 가상이지만 전기가 끊어진 2년 동안 일본인 가족의 생존 모습을 즐겁고 유쾌하게 다루고 있는 영화입니다. 생활에 편리함을 주는 전기가 우리의 일상을 어떻게 점령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제가 총무가 되면서 매 달 영화를 한 편씩 보고 있습니다. 긴긴 겨울밤 휴일 저녁에 영화를 보는 내내, 동네 사람들은 키득키득 거리며, 영화의 추억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아내는 집에 돌아와서 

“7호 언니가 동치미를 한 그릇 주셨네. 내일 빵 구울 거지?” 

“응 내일 빵 구울 거야”

“잘되었네 그럼 내일 동치미 답례품으로 줄 빵도 구워줘요”

“그래요 그럼 내일 아침에 구워서 출근 전에 가져다 드리면 좋겠다”


7호 누나가 담근 동치미는 식감이 일품입니다. 

어제저녁에도 찬조 반찬으로 나왔습니다.

“누나네 동치미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식감이 좋은데요.”

“히히히 그렇지 그런데 올해는 얼마 담지를 못해서 쪼끔만 나누어 줄게”

글을 쓰는 동안 오븐에서 

빵이 다 구워졌다는 소리가 나네요

‘띠리리 띠리리이’

구수한 ‘군고구마 빵’을 가져다주어야겠네요.




마을 저녁 식사 모습 





아침에 배달한 '고구마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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