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5일
지난주와 이번 주 사람들과의 첫인사는 “김장하셨어요?”로 시작합니다. 제 나이가 그럴 나이이기도 하고, 주변에 사는 사람들도 김장을 직접 하는 분들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김장을 했는지 묻게 됩니다. “잘 지내시지요?”라는 두리뭉실한 인사말보다, 구체적이기도 하고 실용적인 장점도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동네만 해도 이번 배추는 어디서 샀는지, 소금에 절인 배추인지, 생배추 인지, 고춧가루는 어디서 구입을 했는지, 몇 포기를 하는지, 소금은 어떤 것을 쓰는지까지 저마다의 비법들을 포함해서 잠깐 동안이지만 유익한 대화가 오가고 있습니다.
이 계절이 되어야만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대화들입니다.
여러 해 동안 어머니가 보내온 김치, 부산에 사는 친구 어머님이 보내온 김치, 아내와 둘이서 담근 배추김치까지 다용도실에 있는 커다란 김치냉장고에 보관을 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올해는 김장독을 묻자고 합니다. 땅에서 숙성시킨 김장독 김치의 맛을 느껴보자고 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이유를 더 이야기합니다. “남편이 빵을 만들면서부터 김치칸 하나를 통째로 사용하는데, 거기에 통밀가루가 가득 들어있어서, 김장독을 묻으려고 해요”라고 이야기합니다.
빵을 위한 재료들이 김치냉장고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마당이 있는 집에 살면서 김장독을 묻는 일은 어렵지 않은 일이기에 항아리를 묻어야 하는 아내의 이유에 대해서는 무조건 지지하고 있습니다. 빵 재료들이 김치냉장고에서 나오는 일은 없어야지요. “김장독이라, 음 정말 맛있겠는걸. 어디에 묻어야 하는지 알려줘요”
아내의 요청사항은 주방하고 가깝고, 얼지 않을 만한 장소면 된다고 합니다.
김장김치를 보내주신 어머니는 “김장독은 다음 해 2월이면 시기 시작하니까 그전에 다 먹어야 한다.” 또 한 가지는 “땅 위로 올라온 부분은 얼기 쉬워서 별도의 보온이 필요하다”는 말씀도 전해주시면서, “젓갈이 많이 들어간 김치는 항아리에 넣지 마라”는 팁도 들려주시네요. 직경 40센티, 높이 60센티의 항아리가 묻힐 만한 장소는 주방에서 가장 가까운 동쪽 마당 한편을 정했습니다.
10년 전 우리 집을 배치할 때 남쪽 마당을 작게 하는 대신 뒷마당과 동쪽, 서쪽 마당이 생기도록 집을 마당의 가운데 두었습니다. 덕분에 동서남북의 마당들이 모두 쓰임이 생겼답니다.
서쪽 마당은 포도덩굴 파고라, 허브정원, 딸아이의 오두막이 있고, 뒷마당에는 퇴비장이 두 개 있고, 봄가을에 채취가 가능한 1m² 정도 되는 표고버섯 재배장, 그리고 울타리를 따라 60센티 폭의 기다란 텃밭이 있습니다. 동쪽 마당은 주방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외부 창고, 장독대가 있고 장독대에는 간장독과 된장독이 있습니다. 이번에 마련하는 김장독 위치도 동쪽에 자리 잡게 됩니다.
집을 짓는 많은 분들이 남쪽 마당을 크게 하고 집은 뒤로 배치하여 집을 짓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배치의 수법은 계절을 고려하지 않은 방법일 수 있으니, 사계절이 뚜렷한 한반도의 계절적 특징을 고려한다면 동서남북에 마당을 두어 계절에 맞는 쓰임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겨울철에 따뜻한 햇살을 받는 남쪽 마당도 좋지만 한여름의 강한 햇살을 생각한다면 뒷마당 만한 쓰임을 따라올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남쪽 마당은 햇볕이 너무 강해서 텃밭관리도 어렵고, 마구 자라는 풀들 덕분에 정원 관리도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표면에서 땅속 30센티의 온도는 한겨울 평균기온이 영하 1도라고 합니다. 김치는 영하 1도 정도에서 시원한 맛을 낸다고 하니, 땅속에 묻힌 항아리는 얼랑 말랑한 온도라고 하지만 지표면에 노출된 뚜껑은 얼지 않을 방법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마침 집 주변 논에 베지 않은 벼가 남아 있어서 낫을 들고 다녀왔습니다. 윗동네 어르신들이 짓는 이 논은 탈곡기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물이 많이 나는 논이라서 항상 벼가 남아있습니다. 덕분에 산에 사는 ‘고라니’가 자주 찾아와서 벼이삭을 먹고 있습니다. 오늘은 항아리 뚜껑을 덮을 볏짚단을 만들기 위해 ‘고라니’ 대신 제가 다녀왔습니다.
시골살이 필수품을 꼽으라고 하면 몇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낫, 삽, 무릎까지 오는 장화, 괭이, 호미, 전지가위, 톱, 챙이 넓은 모자, 도끼 같은 것들입니다.
오늘처럼 벼를 베어낼 때는 낫이 필요합니다. 낫도 일본 낫이 있고, 조선낫이 있습니다. 시중에서는 일본 낫이 많이 팔리는데, 제가 쓰는 낫은 대장간에서 만든 조선낫입니다. 일본 낫보다는 조선낫이 야무지게 생겼습니다. 한눈에 보아도 튼튼하게 생긴 게 오래 쓰는 물건입니다. 논에 물이 많다 보니 벼를 베어내는데, 진흙뻘 속으로 장화가 자꾸만 빠져듭니다. 몇 번을 넘어질뻔했습니다.
점심도 먹어야 하고, 장독도 묻어야 하는데 발은 자꾸 빠지고, 아내의 주문도 몇 가지 더 늘어났습니다. “항아리 소독은 했는데 한 번 더 닦아 주고요, 얼지 않아야 하니 이쪽으로 보온을 더 해주면 좋겠어요. 벼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어요?, 벼는 새끼를 꼬아서 하는 것 같던데 할 수 있어요?”
항아리가 얼지 않도록 볏짚을 잘 엮어 보겠다고는 했지만, 처음 머릿속으로 그렸던 것과는 점점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무래도 날 좋은 날 벼를 한 번 더 베어야겠습니다.
올 겨울 김장김치 맛에서 어릴 적 맛보던 그 맛이 나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