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0일
"식탁 위에 있는 <화요일의 두꺼비> 읽어 봤어?"
딸아이도 좋다고 하고, 아내도 읽을 만한 책이라고 합니다.
한 집에 사는 세 사람 중에 저만 안 읽을 수는 없는 일이기도 하고, 동화책은 제가 즐겨 읽는 책이기도 해서 저녁을 먹고 난 후 읽기 시작했습니다. 앉은자리에서 다 읽고 일어나면서 "책 좋다. 한겨울 두꺼비 이야기도 재미나지만 외로운 올빼미 이야기도 구성진데" 아내와 딸아이에게 소감을 나누었습니다. 아내는 "그것 봐 내가 괜찮다고 했지", 딸아이는 다른 책을 보느라 아빠의 책 소감 나누기를 모른 척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둘 중에 한 명이라도 아빠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으니 만족합니다.
책 내용을 잠시 살펴보자면
한겨울에 고모에게 딱정벌레 스낵을 가져다 주기 위해 스키를 만들어 타고, 눈 쌓인 숲 속을 달리던 다정다감한 두꺼비가, 치사하게 한낮에 활동하는 올빼미한테 잡히게 됩니다. 올빼미는 다음 주 화요일 13일, 자기 생일날 두꺼비를 먹겠다고 하면서, 올빼미의 참나무 집에 두꺼비를 가두어 놓습니다.
감옥 같은 참나무 집에서 일주일 동안 두꺼비는 올빼미가 돌아올 때까지 자진해서, 집을 청소하고 맛있는 차도 만들며, 올빼미의 단 하나밖에 없는 말 상대가 되어 줍니다. 다음 주 화요일이 점점 다가오면서 두꺼비를 대하는 올빼미의 마음은 봄을 맞이하게 됩니다. 먹잇감에서 친구로 서서히 변하는 과정을 그린 동화책입니다.
수많은 동화책이 집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처럼 '화요일의 두꺼비'도 두꺼비의 집, 올빼미의 집으로 장소가 바뀌고 그 사이에 숲이 등장하고 숲에 사는 동물들(사슴 쥐)이 등장을 합니다.
두꺼비의 집은 따뜻한 땅속으로 묘사되고, 올빼미의 집은 굵고, 하늘 높이 올라간 참나무에 굴을 판 나무집입니다. 동화책 속에 등장하는 집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림책 작가들의 집에 대한 묘사는, 집에 대한 애정에 비례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아널드 로벨'의 'Frog and Toad'시리즈에 나오는 두꺼비의 집은 숲 속에 아담한 작은 집입니다. 개구리 친구가 늦게까지 겨울잠을 자고 있는 두꺼비를 깨우는 데서 시작하는 동화 속 집은, 경사지붕에 벽난로도 있고, 현관에 달아놓은 제법 괜찮은 비를 피하는 포치(Porch)도 있습니다. 아마도 작가 자신의 집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집입니다. 'Frog and Toad'의 집에는 '화요일의 두꺼비'네 집처럼 달력이 등장합니다. 달력이 등장한다는 이야기는 스마트한 디지털이 발달하기 전 시대의 동화책이라는 증거 같기도 합니다.
또 한 권의 책은 '핀두스'라는 고양이가 시골 농장에서 집주인 아저씨와 사는 이야기를 다루는 책입니다. 핀두스의 작가는 스웨덴 출신의 건축가입니다. 건축가인 그가 직접 그리고 이야기를 풀어간 <핀두스 시리즈>에서 등장하는 집의 묘사는, 정말 디테일하다는 표현을 할 수밖에 없는, 재미난 장치들이 숨어 있습니다. 핀두스의 책을 볼 때는 글보다 그림에서, 마치 숨은 그림이라도 찾는 것처럼, 배경이 되는 그림을 보고 또 봅니다. 문고리의 모양, 창에 새겨진 그림, 지붕의 각도, 굴뚝의 생김새, 벽에 걸린 액자들과 선반에 놓인 소품, 가구의 형태를 보는 즐거움을 빼놓을 수 없는 책입니다. 물론 고양이 핀두스에 대한 작가의 즐거운 해석이 가득하기 때문에, 건축가의 동화책을 다른 책들과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두꺼비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걸까?"라고 아내에게 말을 건넵니다.
"음 적어도 올빼미 같이 친구가 없지는 않잖아. 두꺼비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아내는 올빼미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고 합니다. "친구도 없고, 대화도 없는 많은 현대인들을, 동화책에서 표현하고 있지. 올빼미도 실은 친구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거잖아. 따뜻한 차를 같이 마실 친구들이 필요한 거지"
'화요일의 두꺼비' 집은 나무 천정이고, 형과 함께 식사를 준비하는 주방, 차를 마시는 넉넉한 식탁이 등장합니다. 이와는 다르게 쓸쓸하게 묘사된 올빼미의 집은 어둑하고, 바닥에는 쓰레기가 가득한 장소입니다. 올빼미는 특별한 뭔가를 잡아먹는 생일날만 기다리는,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에드윈 헤스코트'가 지은 <집을 철학하다>에서는 TV가 등장하기 이전의 거실(Living Rooms)에는 세 가지 주된 요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 글을 읽기 위해,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창문이 있었고, 둘째는 온기를 공급하는 벽난로가 있었고, 셋째는 피아노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세 가지의 요소가 완전히 TV로 대체되면서 '살아있는 방'이 더 이상 온기가 가득한 장소가 아닌 곳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저를 찾아오는 건축주들의 성향이 주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실에 TV를 놓지 않는 집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TV가 필요 없는 집은 소파의 배치도 자유롭고 거실과 주방이 만나는 경계지점인 식탁과 가구의 배치에서도 자유로운 구성이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집 전체에서 거실은 보통 집의 중심에 자리하게 되는데 TV와 소파가 가장 좋은 장소를 차지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화요일의 두꺼비' 집에는 TV 대신에 화목한 분위기를 상징하는 맛있는 부엌이 있습니다. 올빼미의 집에는 오래되었지만 낡은 식탁이 있었고, 올빼미와 두꺼비는 식탁에서 일주일간, 매일 밤 따뜻한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며 잠에 들 수 있었습니다. 핀두스의 집에도, 토드의 집에도 따뜻한 식탁이 등장합니다. 우리 집에는 TV가 있지 않냐고요? 실은 우리 집에도 TV는 없습니다. TV 없이 산지 15년이 넘었으니까, 우리 어린이가 오기 몇 년 전입니다. TV가 없어지고 난 후, 우리 부부는 도서관에 자주 다니고, 아내는 재봉을 배워서 자기 옷과 제 옷을 만들기 시작하고, 저는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곤 옷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죠.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말입니다. 우리 딸아이도 TV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느냐고요? 아이는 보고 싶은 방송이 있으면 유튜브로 엄마 아빠와 함께 보거나 마을회관에 있는 공용 TV를 보러 다녀옵니다.
건축가로서 살짝 귀띔을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집에서 TV를 치워 보세요. 아주 과감하게요. 그럼 못 산다고요? 아니에요. 생각만 그렇지 실제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자기만의 시간도 생길 뿐 아니라, 거실의 중심과 생활의 중심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괜하게 다른 집 살림에 참견을 한다 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건축가이니 이 정도의 간섭은 너그러이 용서를 구하고 싶네요.
<거실은 어떤 말의 반대 개념으로 나온 것일까?..... 그것이 생활하는 방을 뜻한다면 반대말은 ‘생활하지 않는 방‘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살아있는 방‘(Living Rooms)이라는 이름과 달리 거실은 가장 ‘활기 없는 방‘이기도 하다. 에드윈 헤스코트의 집을 철학하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