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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굽는 건축가 Jan 17. 2022

기억의 장소

2019년 11월 30일

“아빠 나 기분이 별로야. 내일 생존 수영하러 간데, 아이들이 전부다 화가 났어. 왜 하필이면 겨울에 수영장에 가냐고, 수영장도 작고 시설도 별로야. 그러니까 나 화나게 하지 마”

수영장에 가는 학생들은 4, 5, 6학년입니다. 모두 합해서 10명이 선생님들과 다녀온다고 하네요. 아이는 여름도 아니고 겨울에 가는 것과 거리도 먼 작은 수영장에 가는 것이 못마땅한지 가만히 있는 저에게 화나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럴 때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기분을 맞추어주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게 왜 선생님은 하필 겨울에 생존수영을 가냐, 아이들이 다 화가 났겠다. 아빠 같아도 화나겠다.” 이렇게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해도 아이는 충분히 자기 기분을 보상받은 듯합니다.


딸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전교생이 19명인 시골 분교입니다. 처음 입학할 때는 23명이었고 그다음 해에는 22명, 그다음 해에도 한 명씩 줄어들면서 지금은 19명이 되었습니다. 졸업생보다 입학생수가 작아서 그렇습니다. 학교 운동장에는 지나온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오래된 향나무가 두 그루 서 있습니다. 남쪽을 바라보는 단층의 적벽돌로 지어진 학교 건물은 벽돌처럼 포개어진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둔 흔적들이 남아있는 ‘기억의 장소’입니다. 딸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우리 가족의 기억도 벽돌의 한 면처럼 쌓이고 있습니다.


유치원을 포함해서 두 세명씩 학교에 보내는 집들도 있다 보니 가구수는 15가구가 되지 않습니다. 학부모 모임을 하게 되면 전교생의 50% 이상의 부모들이 참여합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표현도 있는데 저는 그 표현을 ‘작을수록 자주 보게 된다’라고 하고 싶네요. 학생들과 네 분의 교과 담당 선생님, 돌봄 선생님, 소사 선생님, 유치원 선생님, 그리고 학부모들이 학교 구성원의 전체입니다. 모두 모여도 한 개 교실에 들어갈 수 있는 숫자입니다.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모두 기억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에서 저의 직함은 3가지입니다. 학부모 회장, 동아리 회장, 본교 운영위원, 사람 수가 적으니 겸직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역할이 3가지라고 해도 실은 한 가지 역할만 잘하면 나머지 역할은 원만히 해낼 수 있는 손안에 들어오는 규모입니다.  

아무래도 저는 ‘작은’이 주는 단어에 집착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 작은 학교, 작은 살림, 작은 정원, 작은 교실, 작은 지역 같은 단어를 자주 입에 올리고 글로 사용하는 것을 보니 그렇습니다.


분교 학부모회 활동을 하다 보면 친밀도 있는 관계망의 범위도 넓어집니다. 규모만 작았지 직함은 큰 학교의 학부모회 회장과 동등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선생님들과 교육청 관계자들과도 밀도 있는 소통이 가능합니다. 노트북과 인터넷을 이용하면서 만남의 수와 거리에 대한 부담감도 크지 않습니다. 사람들과 친밀해지는 한 가지 팁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건축가이다 보니 학교 공간에 대해서, 건축에 대해서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그럴 때 저는 딸아이의 학교를 대표하는 학부모회 임원으로서 잘 귀담아듣고 가끔은 즉석 스케치도 해드리고 고민도 풀어드립니다. 그러고 나면 저의 평가와 함께 분교의 평가도 좋아집니다. 지역사회는 이런 점이 좋습니다. 뛰어나지 않아도, 유명하지 않아도 모두 쓰임이 있습니다.


지역사회는 뭐라고 할까요? 인식하고 나누기에 편리한 규모만큼의 크기라고 할까요? 그런 게 있습니다. 사람의 수, 이동하는 거리, 관계의 정도가 감당하기에 알맞은 크기입니다. 예를 들면 여행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이동하는 것보다 적정한 인원이 여행의 깊이를 더해 주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가령 4명이 한 팀으로 이동하면 택시를 타도 되고, 두 그룹으로 나뉘어서 자유롭게 일정을 조정할 수도 있고, 숙소를 예약하거나 식당에 갈 때도, 애매한 3과 5처럼 나누어지지 않고, 나머지가 생기는 숫자보다는 자리잡기도 편하고 음식을 주문하는 것까지 여러모로 도움이 됩니다. 제가 살고 있는 동네를 예로 들자면 30명의 사람들 각자의 성격과 가족의 특징, 선호하는 음식,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딸아이의 작은 학교도 그런 면에서는 한 명, 한 명을 모두 인식하고 우리들 각자를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숫자가 있습니다.


딸아이가 1학년에 입학할 때 입학생이 모두 5명이었는데 그때 학교에서 아이들의 이름이 적힌 케이크와 작은 선물, 그리고 선배 언니 오빠들의 입학 축하 공연이 있었습니다. 1명의 아이도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규모의 수가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큰집, 큰 차, 대형마트, 큰 규모가 시대의 아이콘처럼 여겨 지기는 하지만 작은집, 작은 살림, 작은 숫자가 주는 편안함과 손가락으로 느낄 수 있는 촉감이 있습니다. 기능과 용도, 합리성, 타인의 시선으로부터는 큰 것이 도움이 될 것 같기는 해도, 정작 내 손안에 들어오는 정서와 감각과는 거리가 좀 있지 않습니까?  


시내에 살고 있는 친구는 감기에 걸렸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네 학교에 감기가 돌고 있는데, 한 반이 끝날쯤 되면 다른 반이 감기에 걸리고 다시 감기가 돌아와서, 예방 접종을 했어도 계속 감기에 걸려 걱정이 된다고 합니다. 딸아이의 학교에서도 2주 전에 감기가 돌았지만 딸아이는 3일 정도 열이 있었고, 학교 전체는 일이 주 후에 감기가 사라졌습니다.  


학교 선생님이 공문을 보내왔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학부모회 보고서 작성이 필요하다고 하네요. 작년 정원 동아리 활동처럼, 올해도 분교의 활동을 사례로 제출을 해보면 어떻게냐고 합니다. 당연히 제출해야죠. 올해는 학부모들과 도서관 리모델링 워크숍을 진행하고, 아이들과 목공수업을 하고, 작은 정원을 두 곳 만들었습니다. 이정도면 야무진 보고서가 될것같습니다.




                              

"야마자키씨 커뮤니티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가요?"
"그건 ‘물러날 때가 언제인지를 잘 아는 것‘이겠지요, 일단 일을 시작한 후에는 엄청 바빠지거든요"
"그럼 제가 신칸센을 타야 돼서 실례!"
<이누이 구미코와 야마자키 료의 작은마을 디자인하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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