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에서 만난 딸아이

딸아이와 함께 쓰는 주방

by 빵굽는 건축가

(2019년 12월 5일)


주방은 엄마의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요사이는 여성뿐만 아니라 가족을 위한 장소로 바뀌어 갑니다. 이에 맞추어 필요한 가구들과 수납도 만들어지고요. 우리 집 주방은 아내가 60~70%, 제가 30~40% 비중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초등 4학년 딸아이가 몇 개월 전부터 요리에 적극 참여하면서 100% 이용률을 보이던 주방은 이제 120% 이상 활용하는 장소로 변해갑니다.

우리 집은 26평 주택입니다. 비교적 작은집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요. 아파트 평수를 기준으로 해도 작습니다. 미국에서 작은집을 기준하는 40평에도 한참 못 미치는 어쩌면 협소 주택에 가깝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마당이 있는 집은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집을 지을 때 주방도 크게 구성했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딸아이의 등장으로 어깨와 엉덩이가 부딪치고, 준비하는 동안 도마와 칼을 기다리는 일이 생겨납니다. 딸아이에게 “너는 조금 있다 하면 어떠니?”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간 건축주들에게 "집을 지을 때는 3년, 5년, 10년 후를 생각하면서 집을 지어야 한다"라고 강조하던 나의 이야기는, 2019년 현재 우리 집 주방을 기준으로 본다면 ‘8년 후 자기 집 주방도 예측하지 못한 주제에 무슨 소리를 합니까’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텃밭에 토마토가 주체할 수 없이 열리는 계절에는 토마토 스파게티, 이국적인 맛을 충분히 느끼고 싶을 때 인도식 카레, 발효빵이 들어간 브로콜리 야채볶음, 국물내기, 소스 만들기가 제 요리의 주 종목입니다. 아내는 김치 담그기, 된장 담그기, 간장 담그기, 청국장과 배추 된장찌개, 맛있는 반숙 계란찜, 학교 앞 떡볶이, 나물 무치기 등이 주요리입니다. 딸아이가 엄마로부터 전수받은 수란(반만 익힌 계란), 볶음밥, 미역국, 라면, 국수, 계란 프라이를 요리하게 되면서 주방은 점점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두 명의 어른만 생각했던 곳에 세명의 요리사가 들어가야 할 공간 개선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머리끝이 싱크대 높이보다 작았던 딸아이가 능숙하게 불을 다루고 기름을 사용하면서 3구짜리 전기쿡탑도 부족해지고 있습니다. 준비대와 싱크대 사이는 이제 만석이 되었습니다. 몸으로 밀치고, 엄마 아빠의 부탁에 되레 더 크게 자기 의견을 내는 딸아이는 시끄러움 그 자체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이속에서 생활하는 소리로 가득한 주방을 느낄 수 있고 그사이 부쩍 자란 딸이 다시 보이는 계절입니다.


과거의 부엌은 흙바닥이고, 높이가 다르고 오랜 시간 동안 차별의 속성까지 있던 단절된 곳이었다면 아파트가 보편화되고 부엌이 집안으로 들어오면서 다양하고 복합적인 기능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고 주장했던 프랑스의 건축가 ‘르 꼬르뷔지에’의 철학을 가장 잘 반영하는 장소라면 주방을 들 수 있습니다. 양문형 냉장고, 김치냉장고, 세탁기, 조리기구, 오븐, 전자레인지, 후드 팬, 티팟, 커피 그라인더, 커피메이커, 전기, 상수도, 하수가 빼곡하게 연결되는 곳입니다. 임금님의 진지(수라)를 위한 궁의 식자재 보관창고 수라간(水刺間)과 소주방(燒廚房) 보다 시설이 더 좋은 곳이 되었지요. (소주방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 주방이 되었다고 합니다.)


집을 짓기 전에는 1:100의 종이 도면을 내려다보며 가전의 기능은 편리한지, 수납과 동선은 효율적인지만 생각했던 것이죠. 단독주택을 지어서 10년을 살아보니 음식 준비와 가사노동 만이 아닌 '가족의 장소'로 이어지고 세월이 흘러 생활의 맛이 배어들 수 있는 주방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엄마가 차려주는 음식은 ”맛있다. 다음에 또 해줘”라는 어린이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식사를 함께 준비하고 과정을 공유하고 딸아이의 음식 세계관을 분명히 드러내는 또 한 명의 주체가 등장한 것입니다.

딸아이가 주방에 들어오고 난 후 아이의 행동을 지켜보면 성향도 이해하게 됩니다. 당장은 기름, 밀가루, 물이 어지렵혀져서 정리 정돈할 일이 많아졌다는 것이 단점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요.


주말에 아내가 모임에 나가 점심과 저녁 시간을 비울 때는 딸아이가 아빠의 점심과 저녁을

차려주고는 합니다.


“아빠 김치볶음밥 할 건데 맛있겠지?”

“음 기대되는데, 매콤하게 할 거지? 아빠가 할 거 있으면 얘기해줘”

“반찬이랑 수저, 젓가락 놓아주고 설거지는 아빠가 해” 청소 같은 보조일부터 배워야 하는데 '주방장'일부터 배운 딸아이는 청소는 제 몫이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상급학년으로 건너뛰는 월반(越班)을 시킨 것 같아 불안하기는 합니다. 기다리다 보면 딸아이가 스스로 뒷정리도 할 날이 오겠지요. 기름이 많고, 냄비 바닥에 눌어붙은 밥알을 떼어내는 일도 제 몫이기는 하지만 밥을 차려주는 위치에서 같이 준비하는 방향으로의 이동은 분명히 분위기가 다른 즐거운 일입니다.


지은 지 10년이 다 된 집의 주방을 대대적으로 개선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제가 주방의 수납만 개선하려는 데는 나름의 핑계가 있습니다. 아이는 빠르면 중학교, 늦어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자기만의 세계를 찾아가겠지요. 그래도 소극적인 개선을 한다면 다용도실과 연결되는 곳에 수납을 보완해야겠습니다. 보조탁자와 주방 수납을 보완하고 커피메이커와 믹서기, 밥솥 같은 가전, 설거지 그릇 개수대도 정리하려고 합니다. 다시 집을 짓는다면 벽을 바라보고 등을 돌리는 방식이 아닌 아일랜드형으로 식탁과 거실, 정원을 볼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준비된 음식은 이동이 한 방향으로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고 싶군요. 효율만 볼 줄 알았지 생활을 이해하지 못했던 10년 전 version의 우리 집 주방은 그래도 의미가 있습니다.

음식을 준비할 때는 마주 보면서 다듬고 씻고 눈을 마주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옆에서 준비하니 움직이기도 어렵고 표정을 보기 위해 일부러 고개를 돌려야 합니다. 집이 작아지더라도 배선대, 싱크대, 식탁으로 연결되는 공간을 위해 공간배치의 효율이라는 기본 정석은 이제 가볍게 삭제할 수 있겠습니다.

식탁의 위치는 동쪽으로 향하도록 길게 두어서 아침 빛이 충분히 들어오도록 하고, 봄가을에는 식탁에서 정원으로 나갈 수 있도록 벽에는 큰 고정창과 함께 작은 유리문을 설치하고 싶어 집니다. 물론 유리문으로 언제든 쥐와 고양이, 벌레들이 드나들 수도 있는 일이기는 합니다만 아침볕이 필요하니 유리문을 내어야겠습니다.

아침 볕이 가득한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칼질을 하고, 야채를 볶으며 앞에 앉은 식구들과 수다를 떨고 싶어 지네요. 이 집을 수선하는 일은 앞으로도 한 참 뒤에 있을 일이니 올 겨울에는 보조 선반과 수납을 개선하는 일을 먼저 해야겠습니다.


지난해 5월 일본 '오부세'로 정원 답사를 가서 묵었던 80년 역사의 민박집 주방은 어느덧 제가 꾸미고 싶어 하는 주방이 되어있습니다. 동서로 길게 식탁, 카운터 겸 배선대, 요리공간이 이어지면서 기다란 식탁 위에 아침햇살이 깊게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음식을 준비하는 주인장과 눈을 마주하며 아침 수다를 떨 수 있었던 그 장소는 효율과 생활, 거기에 기억까지 더하는 곳이었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그대로 앉아 수첩과 만년필을 꺼내 들고 빛을 따라 이어진 음영을 더듬으며 선을 그려보았습니다. 가정집의 구성과 다른 면은 있지만 즐거운 아침 냄새로 가득했던 그 장소의 분위기를 다시 느껴봅니다.


일본 오부세의 80년 된 민박집에서 만난 '아침햇살 받으며 식사'하는 주방과 긴 식탁, 햇살은 지금도 주방을 디자인할 때 기준이 되고 있어요. 2019년 오부세에서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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