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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굽는 건축가 Nov 01. 2021

밥 당번


줄 당번, 분단장, 반장, 청소 당번.......
중고등학교 다닐 때 내가 알고 있던 직책과 소임들이다. 

2019년 믿기지는 않지만 나이 쉰이 된 지금도 여러 가지 당번을 맡고 있다. 오늘의 주제인 우리 동네에서 청소당번, 밥 당번, 마을 총무 같은 소임들이다.

내가 살고 있는 시골 동네에서는 이런 역할을 1주일, 한 달, 6개월 단위로 돌아가면서 맡고 있다. 소임이 주어지면 피하고 싶기도 한데 이사 가지 않는 한 피할 수가 없다. 가끔 건축주와 미팅이 있다는 핑계로 지방 출장을 다녀오면서 건너뛸 때도 있지만 열에 아홉은 당번을 맡는다.
당번을 하기 싫어서 이사를 가는 것보다는 물당번, 밥 당번, 청소당번을 하는 일이 이사 준비하고 새로운 집을 알아보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일이다. 실은 이사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이사 가면 내 손해다.

이번 달은 우리 집이 마을회관 청소당번이고, 한 달에 한 번 있는 마을 모임 밥 당번이다. 

회관 청소 당번이 되면 분리수거, 쓰레기통 청소, 싱크대, 바닥... 화장실 변기까지 깨끗이 청소를 해야 한다. 다 좋은데 여러 사람이 쓰는 변기 청소가 늘 걸린다. 특히 여자 화장실 청소 때는 왠지 부담스럽고 그렇다.
이쯤 되면 아내가 화장실 청소를 하면 되는데 아내는 집에서도 그렇고 마을에서도 그렇고 변기 청소는 하지 않는다. 이건 순전히 내 몫이다. 결혼 초에 역할을 잘 나누었어야 했는데, 20년 전 신혼 때는 뭐든 내가 다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화장실 청소 전담이 되었다. 지금은 바꿀 수 없게 되었다. (덕분에 건축가로서 화장실의 각종 위생기구, 조명까지 개선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 확연해졌다. 우리 집 인테리어 1순위는 화장실이다.)
마을 청소 이야기를 이렇게 오랜 시간 할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기에 본론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이번 달 마을 회의 밥 당번도 맡았는데 내가 인정을 받는 역할이라고 할까? 마을 식구들이 ˝오 반야 아빠 이번 달에 뭐 할 거야?˝ 그 소리에 내 머릿속은 이미 풍성하고 맛깔스러운 느낌의 음식들이 떠오른다.

누군가에게 밥을 지어 준다고 하는 일이 만만한 일은 아니지만
내 경우는 즐기기도 하고 새로운 음식을 준비할 생각에 호기심도 발동한다.

지인들에게 밥을 지어주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맛과 영양면에서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항목이다. 내가 만든 음식을 사람들이 좋아하냐고? 물론이다.

그렇다고 어떤 음식도 다 잘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주로 내가 좋아하고 선호하는 음식들을 사람들에게 해준다.
팥죽, 인도 카레, 피자, 깨강정, 몇 달 전 새로 배워서 굽고 있는 통밀 발효빵, 야생초 샐러드 같은 것들이다.

밥을 먹은 후에는 마실 것도 대접한다.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어깨너머로 보고 익힌 커피 내리기 (커피는 로스팅된 원두가 맛을 좌우), 직접 따서 덖은 연잎차, 감잎차도 내가 즐겨 대접하고 선물로도 주는 차들이다.

이번 달 우리 동네 밥 메뉴는 카레다.
오랜동안 입맛에 길들여진 일본식 카레보다는 인도식 카레를 준비하려고 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인도식 카레를 원하면 손들어 달라는 단체톡을 올린 후 사람들의 반응도 기다린다. 

˝인도식 한 표˝
이 한마디에
 
˝좋았어 반응이 오는 군˝ 하면서 
인도식 카레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에서 빠르게 영상들이 만들어진다. 

고은정 선생님의 <반찬이 필요 없는 밥 한 그릇>을 읽었다. 아내가 선생님께 음식을 배우러 한 달에 한 번 1박 2일로 지리산에 다녀오면서 알게 된 선생님이다.
선생님과는 친분도 쌓였다. 처음에는 아내의 든든한 운전수로 참여했다가 지금은 선생님의 아침밥과 저녁밥 초대를 기다리는 팬이 되었다.
밥 한 그릇을 지을 때 어떤 마음으로 지어야 할지, 음식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때야 할지, 밥 먹을 때 분위기는 어때야 할지 그야말로 밥상머리에서 어깨너머로 배우고 있다.

선생님 덕분에
이번 달 카레는 성공을 앞두고 있다.
예전에는 밥을 할 때나 음식을 만들 때 맛에 기준을 두고 조리를 했다면 지금은 조금 바뀌었다. ˝뭐랄까? 음 재료를 존중한다고 할까요?˝
물론 밥 차림의 분위기도 빼놓을 수 없다.

이번 달 마을 밥은 인도식 카레
마을 사람들 기대하시라
짜잔
(2019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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