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걸었어 #2

무지개와 구토

by 서은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사람들의 움직임 소리에 눈을 뜬다. 모두 목적이 같기에 비슷한 시간에 잠들고 일어난다. 오늘은 아저씨 순례자가 유난히 많이 보인다. 사진 찍느라 정신없는 나와 달리 묵묵히 길을 가던 중절모를 쓴 멋쟁이 아저씨가 안내판에 붙어있는 작은 무언가를 찍는다. 궁금해 슬쩍 다가가서 보니 귀여운 강아지 스티커에 ‘Buen Camino!’라 적혀있다. 아저씨와 난 마주 보고 웃었다. 말이 통하지 않지만, 이 길 위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두 안전한 순례길이 되길!’ 그런 마음을 아는 것인지 큰 뜰에서 큰 무지개가 나타났다.


산길을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반복한다. 이제부터 바람이 많이 부는 구간인 것 같다. 큰 뜰에 장갑, 모자, 방한용품을 파는 주민들이 나와 있다. 얼굴이 따갑고 손이 시렸지만,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참아보기로 한다. 그때 참지 말아야 했을까? 한참을 걸어 넓은 안마당과 지하 살롱에 벽난로가 있는 예쁜 Albergue에 도착했다. 마음에 드는 공간에 신이 나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런데 그곳은 난방이 되지 않았고 바람으로 차가워진 내몸이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았다. 파이를 입에 넣자마자 구토가 나왔다. 그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다음 날 아침까지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무척 마음에 드는 이곳을 이제 떠나고만 싶다.


아파서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있던 순례자를 본 적 있다. 아픈데도 순례길을 이어가는 그 사람이 신기했었다. 아프고 나서야 이 길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순례길은 순례자에게 일상이고 오늘은 그저 몸이 좋지 않은 하루에 불과했다. 이튿날에도 나는 몸이 회복되지 않았지만, Albergue에서 쫓겨났고 더 이상, 이 마을에 머무르고 싶지 않아 길을 걷기 시작했다. 걷고 멈추기를 반복. 5.5km. 2시간 반. 평소보다 시간이 두 배는 걸렸다. 오늘 하루는 좋은 숙소에 머물러 몸을 회복하기로 한다. 올라가는 계단에서부터 온기가 느껴진다. 잠깐 멈추어 가기로 한다.


침대 위 가지런히 접혀있는 수건과 작은 웰컴 사탕이 쉬어가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천창으로 들어오는 뿌옇고 노란 햇볕이 따습다. 아직은 충분한 열기를 뿜어내지 못하는 라디에이터 위에 손빨래한 양말과 속옷을 말린다. 이 공간에 우리만 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적막감이 쌓여있던 긴장과 피로를 풀어준다. 오랜만에 침낭이 아닌 두텁고 깨끗한 이불을 발끝부터 머리까지 덮고 낮잠을 잔다. 호사를 누리듯 주저앉은 오늘이 내일 좀 더 잘 걷게 해주겠지?


식사 시간을 놓친 우리에게 컵라면에 넣을 뜨거운 물을 내어준 식당 주인 언니, 술 취한 벤저민 아저씨의 배낭을 꼭 메주며 이제부터 내리막길이라고 위로해 주던 케이크 전문점 아저씨, 그런 주인아저씨에게 내리막길이 싫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벤저민 아저씨, 50센트짜리 물 한 병을 샀을 뿐인데 번갈아 가며 우리 손에 맛있는 견과류를 쥐여주던 식료품점 주인 내외, 우리가 하루 동안 만난 따뜻한 사람들이다. 몸은 좋지 않았지만, 마음이 따듯해지고 위로가 된다. 이런 따뜻한 작은 기억의 조각들이 모여 우리의 순례길을 완성해 주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그냥 걸었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