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노를 만들지 못한 아침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한 다음 날.
기대보다 아무렇지 않았고, 생각보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특별히 어떤 변화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조금 섭섭하기도 한 아침이었다.
예약해 놓은 호텔에서 하룻밤을 푹 쉬고, 느지막이 눈을 떴다. 이제 누군가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깨지 않아도 되고, 하루가 머물렀으니 이제 이 방을 빼주세요. 하는 누군가도 없다.
숙소 근처 커피숍에 가서 아침을 먹는다. 지긋지긋한 빵과 커피. 어쩔 수 없이 또 오늘 아침 메뉴가 되었다. 그래도 조금 맛있을 것 같은 빵과 샌드위치를 팔고, 현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카페를 골랐다.
메뉴판을 보니 커피 스몰 사이즈와 라지 사이즈가 있다. 스페인의 작은 커피 사이즈에 아쉬웠던 나는 반가운 마음에 라지 사이즈 커피를 시켰다. 커피를 받고 보니, 에스프레소 투샷이다. 지독하게 쓴 커피를 사발로 받으니 눈이 찌푸려졌다.
뜨거운 물을 받아서 커피 잔 위에 붓는다. 잔 위로 커피가 넘칠까 조금씩 따라서 아메리카노를 만든다. 아무리 희석시켜도 샌드위치를 다 먹고 그 커피숍을 나올 때까지 커피는 아메리카노가 되지 못했다. 나에게는 너무 쓰디쓴 에스프레소.
스페인에 온 지 3주가 지났는데, 아직도 아메리카노 한 잔을 제대로 못 시켜 뜨거운 물을 붓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우스워서 친구와 한참을 웃었다.
그동안 순례자에게 친절한 사람들 덕분이었을까? 어딜 가도 친절하게 인사해 주는 동네 사람들. 카페에서는 커피를 주문하면 알아서 아메리카노를 줬고, 차가운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 얼음을 달라하면 커다란 얼음을 넣은 잔을 줬다.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얻어지는 것들이었는데, 다시 여행자로 돌아올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침을 먹고 어제 보지 못한 정오 미사를 보러 갔다. 좀 이른 시간에 도착해 야곱의 무덤을 둘러보고, 흉상을 뒤에서 끌어 안아 보기도 했다. 기도를 하거나 소원을 빌 시간은 없다. 내 뒤에 줄줄이 따라오는 사람들 때문에 무덤 앞에서 경건할 수 없었고, 흉상 뒤에서도 소원을 빌 시간은 없었다. 순례길 위에서 처럼 나만의 속도로 머물 수도 멈출 수도 없었다. 이곳의 시간은 나와 다른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십여 년 전 몬스테라 성당에서 블랙 마리아 상을 만지기 위해 몇 시간 줄을 서서 기다리고 주어진 1초의 시간 동안 마리아 상을 쓰다듬고 서둘러 내려올 때가 생각났다.
오늘은 그때처럼 기다림의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아니 315km를 걸어왔으니 더 길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보려 이곳에 줄을 서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나는 흉상을 껴안고 성당으로 내려와서야 마음속으로 나와 가족의 건강을 기원해 본다.
아쉽게 향로미사는 없었지만, 미사는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혼자서도 여러 명의 성가대 몫을 해내는 사제, 모든 행동에 존중과 예를 다하는 신부님들을 보니 저절로 겸손해지고 조심스러운 순간이었다.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지만, 순례길을 안전히 걸은 순례자에게 축복과 안녕을 기원해 주는 것 같았다. 성당에서 주는 경건함에 신자는 아니지만, 자세가 바라지고 두 손이 모아졌다. 오랜만에 손을 모아 기도도 해본다.
미사를 보고 예약해 놓은 지붕 투어를 하러 갔다. 가기 전에 시간이 조금 남아 광장에 앉아서 오늘 도착하는 순례자의 모습을 지켜봤다. 환희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을 보니 괜히 내가 울컥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는 그 들의 솔직함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시간이 맞지 않아 스페인어로 진행하는 지붕 투어를 신청했다. 이어폰으로 나오는 투어 가이드의 말이 내 귀를 통과해 허공을 맴돈다. 그 말이 무어든, 해 질 녘 지붕 위에서 도시와 광장을 내려다보는 내 시선을 가로챌 수 없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척하며 눈치껏 따라다닌다. 하지만 설명의 내용과 상관없이, 지붕 위에 앉아서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이곳에 오려고 했던 지난 14일간의 순례길 여정을 떠올려보기도, 처음 산티아고 순례길을 알았을 때, 그리고 신부님께 순례길의 역사에 대한 수업을 들었을 때를 떠올려보기도, 그냥 멍하니 저 아래 있는 순례자들을 쳐다보기도 한다.
탑 위에 올라가 이제 도착한 순례자들에게 손을 마구 흔들었다. 두 명의 순례자가 날 보고 손을 흔들어준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더 신나서 손을 흔들어 본다. 웃음이 마구 나온다. 그들의 안전한 순례길을 축복해 주고 싶다. 나는 아직 저 아래 길 위에 있는 사람 같다.
이제 순례자라는 명함을 버려야 한다. 다시 여행자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더 이상 걸을 일도 없다. 더 이상 순례자들과 순례잡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만났던 사람들을 만날 수 없다. 어제 성당 앞에서 친구와 있던 데보라와도 마지막. 순례길 인증서를 받으러 갔을 때 다시 만난 지젤과도 마지막. 우리에게 아디오스(adios) 대신 아스타 루에고(Hasta luego)를 외쳐준 할머니들과도 마지막. 왠지 모를 서운함이 든다.
우린 아쉬운 맘을 달래러 내일 세상의 끝 피스테라까지 간다.
버스를 타고.
더 이상 걷지 않기로 한다.
우린 이제 여행자니까.
그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