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 피스테라

0.0km에서

by 서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보이는 숙소에서 하루를 더 보내고, 우리는 피스테라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야곱의 시신을 배에 싣고 왔다는 곳이 피스테라이다. 그렇게 야곱의 시신은 피스테라에서 육로로 옮겨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에 묻혔다.


2시간 45분의 여정. 10시가 한참 지났는데, 출발은커녕 아직 터미널로 들어오지도 않은 버스를 기다리다 보니, 새삼 유럽을 여행하는 것을 실감한다. 뒤늦게 온 버스는 트렁크에 목적지별로 짐을 넣고, 늦어서 죄송하다는 사과 한마디 없이 출발한다.


터미널에서 아침으로 빵과 아메리카노를 마셔서인지 배가 든든하다. 바깥 기온이 18℃밖에 되지 않는데, 차에서 에어컨 바람이 나온다. 으슬으슬. 조금 춥다. 친구는 옆자리에서 잠들고, 나는 괜히 아쉬운 마음에 창밖을 쳐다본다. 버스에 커튼이 없어 유럽의 낮고 눈부신 빛이 사방에서 들어온다.

커피와 빵으로 시작하는 아침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 후 목적의식이 사라졌다. 지인들은 포르투갈이 여행하기 좋은 곳이라며 입을 모아 칭찬했는데 난 그 나라를 잘 알지 못한다. 여행할 도시만 몇 군데 정해놨을 뿐,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도 않아서인지 설렘도 없다. 10년 전 유럽을 여행을 왔을 때 하고 싶었던 게 많고 계획적이었던 나와는 조금 다르다. 그래서 조금 두렵기도, 조금 후회되기도 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언젠가부터 계획을 세우는 것도, 계획을 지키는 것도, 그 계획을 지키지 못하는 것도, 나에겐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그래서 특별한 계획 없이도 걷기만 하는 순례길이 내 마음에 쏙 들었는지도 모른다. 걷고, 먹고, 자고 이것만 해도, 매일 미지근하지만, 잔잔한 새로운 일들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길가에 다시 노란 화살표가 나타났다.


순례길 마지막 날에 철사로 순례자를 위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그 작품은 기부를 통해서 팔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게 갖고 싶었지만 동전이 없어서 그 앞에서 한참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런 우리가 신경 쓰였는지, 작품엔 꼭 돈을 지불해야 한다며 처음 보는 우리에게 웃으며 동전을 흔쾌히 주고 간 남매가 생각났다. 그 마음이 부담스러우면서도, 참 고마웠다. 나라면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렇게 선뜻 동전을 내어주지 못했을 것 같다.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 정도로 치부했을 것이다.


노란 화살표가 보이자, 피스테라까지 걸어가겠다고 한 그 남매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가는 길에 걷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했는데, 우리는 이미 버스로 멀리까지 와버렸다. 화살표 아래 남은 거리를 알려주던 숫자는 이제 어디를 목적지로 삼았을까? 피스테라까까지의 거리가 적혀있을까? 이미 목적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는데, 피스테라까지는 어떤 숫자로 순례자를 안내할까? 걷지 않은 길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그들은 새로운 숫자를 보며 걷고 있을까?


바닷가 마을이 계속됐다. 이제 세상의 끝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 내가 걸으며 이 마을을 봤다면, 이 조개표식을 봤다면, 지금과는 다른 감정일 텐데, 쉽게 얻은 것의 감동은 덜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무려 스페인에서 처음 보는 바닷가인데 말이다. 이 파란 바닷가의 프레임을 조금 더 잘게 쪼개서 내 눈에 담았겠지.

무로스 바다마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한 순간부터 걷기를 거부하고 있는데, 걷기도 중독이 되는 걸까? 버스에서 바닷가 마을을 내려다보니 좀 더 바다 가까이에서 걷고 싶어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엄청난 돌산을 지나고 꼬불 꼬불 길을 계속 가다 보니, 멀미가 난다. 버스에는 지역 주민들도 있지만, 순례자도 듬성듬성 보인다. 끝을 보기 위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갔지만, 또 다른 끝을 보기 위해 버스를 탄 사람들. 그리고 그 아래 여전히 걷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쎄(Cee)라는 마을에 도착하기 전 드디어, 도로 위를 걷고 있는 순례자를 한 명 발견했다. 마을 초입에서 남자 순례자 한 명이 걷고 있다. 여전히 걷고 있는 순례자를 보고 괜히 반가운 마음에 미소가 지어졌는데, 나보다 훨씬 반가워하는 이들이 있었다. 맨 앞줄에 앉아있던 커플이 순례자를 발견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들은 피스테라까지 가지 않고 쎄(Cee)에 도착하자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다.

세상의 끝으로 가는 순례자

우리는 피스테라 숙소에 짐을 풀고 0.0km 표식이 있는 이 대지의 끝 등대로 간다. 세상을 끝까지, 남은 거리 3km. 45분 정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산길을 걷는다. 세상의 끝 바다에 보는 노을이 그렇게 멋있다는데, 우리는 해가 지기 전에 숙소에 돌아올 요량으로 서두른다.


이제 더 이상 갈 곳은 없다. 끝의 끝까지 와버린 우리. 이제 정말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우리는 각자 망망대해를 한참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3km 산길을 다시 걷는다.

0.0km


신었던 신발을 그곳에 걸고 가면 다시 그곳에 돌아올 수 있다고 한다. 우린 신발을 버리고 오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언제쯤 일지 모르지만, 한 번으로 부족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바다의 아름다움을, 다시 보고 싶었다.


우리는 노을을 뒤로하고 숙소로 돌아간다. 노을을 보기 위해 맞은편에서 순례자들이 걸어 올라온다.


팔라스 데 레이 성당 앞에서 노을을 배경으로 서로의 사진을 찍어준 순례자가 돌아 올라가서 다시 노을을 같이 보자며 우리 손을 잡아끈다. 묵시아에서 7시간을 걸어왔다는 핼쑥한 모습의 JH언니, 역시 노을을 보자며 우리를 잡아끈다.


냉정하고 우습게도 두 번의 손길을 뒤로하고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시 보자는 인사와 함께.


왜 노을을 보러 다시 가지 않았을까? 그날 노을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마을에서 본 노을


다음날 나는 새로운 운동화를 사고, 오래된 운동화를 피스테라에 버렸다.

'세상의 끝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다짐과 함께.


나의 길 위에서 만난 모두,

인생의 길 위에서 평안하고 행복하길,


BUEN CAMI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