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관심없는 사람들의 참견.
명절이 오면 이제 숨이 차는 것을 넘어 숨을 죄여오고 이제는 숨이 차다 못해 숨 쉬어지지 않는 기분이다.
이렇게 내 건강을 해쳐가면서 내가 왜 스스로를 죄이고 있나 싶어 아이들에게 집중해 보고 나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독서와 글쓰기, 걷기, 목욕, 여행으로 무마해 보려 해도 그냥 그 자리에 있다. 잠시나마 잊힐 수 있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남편은 둘째치고 자식들을 위해 아니 궁극적으로 나를 위해 정신 차리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데 이거 건강은 괜찮은 걸까? 이러다 건강이 나빠지면 그건 누가 책임져 주는 거지? 싶다.
전시상황의 스트레스라는 것이 이런 이야기인가 보다.
잠이 잊을 수는 있어도 사라질 수없고 몸속 세포 하나하나에 남는 스트레스
내가 82년생 김지영을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아이들은 어린이집 소속이었다. 나의 스트레스의 크기는 같았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당시의 나는 아직 포기가 덜 되었고 나를 깎아먹으며 너무나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나와 같이 진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시댁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던 친구와 함께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씩 손에 들고 처음으로 극장에 향한 날이었다. 왠지 우리는 그 영화를 꼭 봐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게 있었다.
여러 가지였으리라! 페미니즘영화라고 불리는 사실은 현실에 만연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지켜내야겠다는 의무감, 우리에게 몰려오고 있는 이 정체 모를 감정에 대해 시각화된 것으로 들여다봐야겠다는 호기심, 어쩌면 여기서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리라는 그래서 새로운 나날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등등.
이 영화를 해석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만 이 영화가 모두가 가해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의 살아가는 이야기임을 공유같이 이해해 주고자 하는 남편이 있음에 훨씬 나은 김지영이었음에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모습에 김지영의 개인문제로 치부해 버리는 해석자도 있다는 것을 안다. 나 역시 우리 남편이 공유의 얼굴을 하지 않았지만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려 한다는 관점에서 주변에서 비슷한 시선을 받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부정적인 생각이 올라오는 나를 탓하며 '그래 내가 뭐가 문제야! 같이 해결하면 되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결혼 10년을 지나 15년을 향해 가고 있음에도 변하지 않는 스트레스를 둘러보면 너무나 여실히 현실을 반영한 이 영화는 굉장히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나에게 주어진 현실은 더더욱 폭력적이다. 아마 자신의 직업군을 다룬 영화를 보면 모두들 "야 현실은 더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왜 이 영화에 대해서 만큼은 그런 반응이 페미니즘이라 취급되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관점에서 이 영화는 현실을 너무나 여지없이 드러냈지만 현실보다는 덜하다.
일단, 시어머니의 공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다. 본인의 방식대로 가족들을 위한다는 관점에서 아주 공공연히 남의 자식을 자기 자식과 차별하는 데에 있어 어떠한 죄책감도 없다. 차별을 한다는 의식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계급제 같은 거다. 너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 집 며느리였고 태어날 때부터 며느리는 그런 존재인 거다 같은 것이다. 나는 우리 어머니가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것을 넘어서서 공유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 극 중 시어머니가 부러울 정도로 우리 집에서는 없는 일이다. 만약 비슷한 상황이 온다고 해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것이며 자기 관리를 못한 미친 사람으로 취급당할 것이 뻔하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는다.
예로 산후우울증에 관련한 뉴스기사를 듣고 있자니 나에게 저건 다 정신병자 같은 사람들이라고, 배부르고 등따수으니까 있는 미친것들이라고 했다. 예쁜 자식이 있고 든든한 남편 있는데 바쁘게 움직이면 왜 산후우울증이 오는 것이냐고 했다. 나는 당시 두 아이를 연속으로 낳고 하루에 잠을 세 시간도 못 자는 상황이었고 어떤 이야기도 화가 나거나 눈물이 나는 상태였다. 본인의 생각이 그렇다 해도 출산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을 면전에 두고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둘째, 남편은 지영이가 정신병원에 갈 때까지 뭐 했나? 배우 공유가 연기했기에 사람들이 자상함에 대해 논하는 것이 아닐까? 남편도 남편과 아빠가 처음이라 처음에는 그 상황을 예상해지 못했음을 충분히 공감한다. 그리고 영화가 나왔을 시절보다 지금의 상황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 아마도 육아휴직이나 공동육아의 개념이 조금씩 더 잡혀가고 있으리라 생각은 든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의 정도가 내가 딱 겪은 그 정도의 육아 시절이었고 심지어 남편의 배려를 받는다는 점에서 몇 퍼센트라도 나은 육아 환경을 얻은 사람이리라. 하지만 공감을 해 줄지언정 남편은 지영이가 병원에 가야 하는 지경에 이르기 전까지는 어떠한 조치도 딱히 취하지는 않았다. 명절에 시댁에 가는 일도 시댁에서 친정에 갈 때 고모가 나타나면 조금 더 있었던 일도! 지영이가 아프고 나서야 문제의 심각정을 느끼고 개선했던 것으로 그려진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굿파트너'의 12회, 13회를 보면 가정폭력으로 이혼을 원하는 유지영(박아인 분)이 나온다. 남편 천환서(곽시양 분)의 지속적인 괴롭힘으로 이혼을 원하지만 증거불충분으로 이혼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때 조정위원들에게 마지막 기회임을 느낀 아내가 "제가 죽어야 끝날 것 같아요!"라고 울며 호소한다. 그런 기분이다. 내가 죽어야 끝날 것 같다. 가정폭력은 죽으면 세상에 알려질 기회가 있지만 이러한 심리적 압박과 은근한 괴롭힘 어쩌면 가해자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를 정신병자로 몰아버리면 쉬운 이런 싸움에서는 죽으면 나만 끝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친정은 해 줄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희생을 당연히 여겼고 할머니세대는 아들에게 차별적사랑을 주었고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똑똑해도 밖에서는 리더도 하고 똑똑하라고 배웠지만 집에서 나대면 혼났다. 그 굴레가 답답하고 집안에서는 그저 어머니의 연장으로 설거지하고 숟가락 놓는 사람의 역할을 하다가 답답해져서 결혼을 하면 더 큰 설거지와 더 많은 숟가락이 기다리고 있지만 딸에게 이혼녀딱지를 나 때문에 붙이고 싶지 않은 엄마아빠는 잘한다 잘한다 한다. 사실 김지영과 같은 시대를 산 사람으로 그 시대 아줌마대표로 제일 비현실적인 장면이 지영이 엄마가 너무 지영이 대신 똑 부러지게 말해주는 장면이다. “지영아 나대! 막 나대!"그 장면에서 엄마들을 오열했고, "같이 사는 거죠!"라고 사부인에게 똑 부러지게 말해주는 엄마의 모습은 시원하다 못해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나는 아버지의 집안(이제는 친가라는 말로 내가 그 프레임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에서 일어난 집안의 풍비박산에서 아무런 힘도 없는 8세 어린아이었다. 그냥 그 집안에서 자랐다는 이유로 어른들의 한이 맺힌 싸움 속에 18세 할머니가 돌아가신 시점에선 이유 없이 조리돌림을 넘어서 사촌들에게 실질적 폭력을 당했는데 아버지는 막아주지 않았다.
엄마는 열심히 막는다고 했지만
본인의 극심한 시댁스트레스를 모두 나에게 쏟아내었다.
감정의 흡수력이 좋은 나는 더 좋은 일에 그 흡수력을 사용할 기회를 날렸고 단지 아이들에게 비슷한 사람이 되지 않겠다며 꿋꿋하게 참고 있지만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 될까바 두렵다.
이런저런 객관화, 분석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에도 나는 명치끝의 고통으로
새벽에 깨고 한숨이 가득 차있고
눈물이 많아진 마흔이 되어버렸다.
안 그러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지 말자라는 한마디로 말끔해졌던 어린아이는 계속되는 좌절에 힘이 약해졌다.
그저 일어난 일이고 그건 마치 교통사고처럼 의도성없이 일어난 일이라고 치부한다고 해도
피해자만이 그 마음을 헤아리고 가해자는 "교통사고였어"라고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해도 되는 일인가?
제발 무식함을 무기로 삼지 않고 남을 이해하는 능력을 키우든 타인에게 관심을 좀 끊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