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31일 이후로 사라져 버린 그곳에는.
“세상은 둥글어, 폴란. 이 세상의 모든 나라와 바다들이 거대한 공 위에 모여 있다구!”
이 세상은 해가 죽지 않아도 될 만큼 넓었다. 해는 그저 돌고 돌 뿐이었다.
폴란 데비, 마리에 테레즈 쿠니, 돌 람발리 <한 여자의 선택> 중
*
나는 지금 강원도에 있다.
고객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양철난로에 몸을 녹이고 있는 중에도 새해 첫날은 지나간다. 오늘은 2024년 1월 1일, 용의 해가 시작되는 날.
자정부터 스키장을 뒤덮는 불꽃과 폭음을 들었다. 토끼해의 끝날은 공교롭게도 내가 처음 바텐더를 시작했던 공간의 마지막 영업일이었다. 2023년 12월 31일, 내가 2016년부터 2년간 근무했고 세상 모든 행복을 옴팡 담아두었던 위스키 바 올드블루가 문을 닫는 날이다. 대표님은 출장 이틀 전에 소식을 전했고 나는 강원도행을 취소할 수 없었다. 올드블루의 마지막 날, 내 보석상자와도 같은 공간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할 수 없다니.
이 기분을 안다. 소중한 것이 떠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보내기 싫다고 떼를 쓰고 싶은 이 느낌은, 3년 전 친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던 때가 비슷하다. 아끼는 것이 내가 찾아갈 때마다 그곳에 있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은 언제쯤 그만둘 수 일을까. 또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한 것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새해를 생각할 새도 없이 올드블루에서 걸려오는 영상통화를 기다리며 징징 울었다. 조금만 일찍 얘기해 주지, 그럼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기며 온도며 벽지 문양까지 모조리 눈에 담고 왔을 텐데 하고 되지도 않는 원망을 하면서. 그래도 우리 모두가 떠난 뒤 그 공간을 5년의 시간 동안 잘 가꿔준 것은 지금의 대표님과 매니저님이다. 그분들이 있어서 올드블루의 문을 열 때마다 따뜻하고 친숙한 추억들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 존재하는 것 만으로 위로가 됐다. 나 말고 또 많은 사람들의 애정과 정성으로 빚어진 곳. 고작 사흘 만에 새 가게 공사를 위해 사라지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내가 평생 동안 기억하고 그리워할 올드 블루.
어젯밤만큼은 올드블루의 것이었다. 그 공간에서 마스터와 매니저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지금까지 바텐더를 할 일도, 술을 계속 다룰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 행복한 내 모습은 다 올드블루에서 만들어졌다. 시간이 지나도 끄떡없도록 튼튼하고 건강하게 다듬어졌으니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나는 올드블루의 힘으로 행복할 것이다. 계속 보고 싶어 하면서, 그 문에 달린 동 간판과 기울어진 칼 문양을 만나는 꿈을 꾸면서.
새해인사인척 마스터에게 응석을 부렸더니 곧장 전화가 온다.
해인아, 울지 마. 헤어지는 게 아니야. 더 좋은 공간으로 변하는 거야.
하지만 마스터, 그곳에 올드블루가 더 이상 없다는 걸 떠올릴 수가 없어요. 상상이 안 돼요.
우연의 일치처럼 마스터가 새로 준비 중인 가게가 1월에 오픈한다. 과거의 마스터가 분투하며 일으켜 세운 올드블루가 철거되면 지금의 마스터가 공들여 공사한 새로운 공간이 열릴 것이다. 또 마스터를 닮아 사랑스러운 곳이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훌쩍이는 나를 마스터가 다독거린다.
올드블루는 우리 모두가 기억할 거야. 이제 더 행복해질 장소를 하나쯤은 더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그만 울어. 또 마스터의 바에서 즐거워지자.
조금 위안이 된다. 세대가 교체되듯 같은 크기 같은 구조에 마스터의 새 가게가 생겼다. 그렇다고 그곳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올드블루가 사라진다고 덕분에 사랑했던 것들조차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인생에 가장 눈부신 것들로 가득했던 곳이었다. 새해를 앞두고 매니저님이 걸어준 영상통화 중 화면에 보이는 것들 하나하나 이야기가 없는 것이 없다. 못을 잘못 박으면서 우당탕탕 만들었던 옷걸이, 몇 번을 떨어져서 다시 걸었던 크리스마스 리스, 환풍기 위에 붙어있는 손님들이 그려준 그림들, 나무 상판 위의 흠집, 군침 도는 스테이크와 리코타 치즈의 냄새, 문을 열자마자 끼쳐왔던 훈기, 겨울이면 유리창에 뿌옇게 서렸던 김까지. 그곳에서 손님들을 만나고 좋은 동료들의 조언으로 바텐더의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 바에서 느낄 수 있는 멋진 밤이 수없이 지나갔다.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애정이 쏟아 들어와 매일이 벅차고 축제 같았다. 그 공간과 그곳을 채운 사람들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아직도 그 사람들에게 해야 할 고백이 남았는데 올드블루가 먼저 사라진다. 하필 심장의 가장 근처에 심어둔 곳이라 벌써부터 뚫린 구멍으로 찬바람이 휭휭 분다.
어딘가의 바에 가면 ‘올드블루에서 바텐더로 일했어요 ‘,라는 문장으로 나를 설명했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곳을 사랑하는 것은 손님뿐이 아니었기 때문에. 너무나 많은 바텐더들이 올드블루와 마스터의 곁으로 모였고 나는 그 안에서 철없이 신이 났었다. 내가 일했던 바의 이름을 들으면 그 사람들은 내가 왜 이렇게 행복한 건지 알 수 있었다. 그런 멋진 바에서 일했다니, 좋은 경험이셨겠어요.
지금까지도 내 인생 최고의 바예요.
이제 그만 투정 부려야겠다. 세상은 넓고, 소중한 공간은 지구 인구의 수만큼 있다. 올드블루의 마지막이 천천히 지나가기를 간절히 빌었으나 아침해는 떴고 파티는 끝났다. 이제 그곳은 세상에 없는 것이다. 기도하고 애원해도 해는 뜬다. 저편에 있는 나라로부터 가차 없이 나의 시간에 가까워진다.
인도에서 산적의 두목으로 이름을 날리고 자수 및 출소 후 정치계까지 영향을 미쳤던 폴란 데비의 자서전 <한 여자의 선택>은 강원도 출장 중 읽은 책이다.(사실 아직도 출장 중이다) 강간과 윤간, 폭력과 학대의 이야기가 작가를 가시덤불처럼 둘러싸고 있어 결코 읽기 편한 책은 아니지만, 그 사이에도 사랑이 존재한다. 꽤 순도 높은, 의심할 수 없는 그런 사랑이.
문장은 폴란 데비의 인생을 바꾼 남자가 폴란에게 한 말이다. 한 사람의 세상을 넓혀주고, 연심을 전한다. 지구의 자전축이 한 사람을 기준으로 도는 게 사랑일까. 진흙탕 같은 삶에서도 누군가는 굴하지 않고 사랑을 말한다. 역겨운 세상이라도 태양은 당신의 머리 위로 돌아온다는 것을, 날이 저물면 고대로 바다에 빠져 죽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를 비춰주며 항해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 폴란 데비의 인생에도 그런 연인이 있었다. 폭력과 만행의 한가운데에도 사랑은 있다. 사랑은 사람을 살게 하고, 숨 쉬게 하고, 움직이게 한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랑을 좋아한다. 늪에 빠진 것처럼 온몸이 갑갑하고 숨 막히는 폴란의 인생에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사랑이 담긴 문장이었다. 그녀를 응원하는, 그녀를 지켜주는 사람의 다정한 말 한마디. 나는 사랑을 좋아한다. 그게 나를 살게 한다.
올드블루도 사라진 게 아니라 그저 다른 곳을 더 밝게 하려고 바다 너머로 숨으러 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태양처럼 올드블루에게 의지하고 마음의 안정을 얻었었다. 천년 된 나무처럼 다음 천년에도 그대로 있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사랑하는 것을 하나 둘 보내며 내가 얼마나 소중한 것들을 당연하게 여겼는지만 깨닫고 있다. 사랑한다고 충분히 말했는지, 보고 싶은 만큼 만나고 왔는지, 마음 내킬 때까지 안아줬는지, 속시원히 떠나보낼 수 있을 만큼 정말 그만큼 한없이 아껴주었는지. 아무리 해도 부족할 것이다. 사랑은 하루의 반이 밤인 것도 아쉬운 일이니까. 태양이 내 머리 위에만 있기를 자꾸만 바라게 되니까.
그래도 태양은 떠난다. 넓은 물속으로 퐁당 빠져서 지구 반대로. 나는 모르는 누군가에게 온기를 주러.
내 2023년 12월 31일을 너에게 줄게. 인생에 소중한 보석 같은 인연과 사람들, 추억과 행복이 다 그 속에 있었다. 올드블루, 영원히 사랑할 나의 7평짜리 보석상자. 열쇠는 가슴에 묻어둔다. 내가 볼 주마등은 전부 올드블루 속의 기억일 테니 죽을 때나 꺼내 들어야겠다. 강 건너에서도 올드블루의 바텐더로 다시 일할 수 있다면, 그때는 지금보다 더 열심히 너를 사랑할 거야.
Good Bye, My dearest place in the world!
p.s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새해에는 한아름의 행복을 안고 시작하기를, 네잎클로버 무더기 위를 걷는 것처럼 행운이 만개하기를, 부딪히는 술잔마다 제임슨이 가득하기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Happy New Year and All the blessings to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