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 식구
토요일 오전 8시 9분 현재, 집에서 깨어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나만 한국에 있고 남편은 자카르타쯤, 딸은 파리에 있다. 각자 자신의 방에서 자는 중이다. 우리 집에 세 개의 시간대가 동시에 존재하는 셈이다. 거의 인터스텔라 급이다. 나중에 차례대로 일어날 것이다. 그때쯤이면 나는 피로해질 테다.
미국에서 생활하다 잠시 집에 다니러 온 딸은 미국 서부 시간대에 맞추어 원격으로 근무한다. 하지만 귀국 후 이삼일만 지나도 한국 시차에 가까워지게 되면서 어정쩡하게 미국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시간대에 머무르게 된다. 여름에 한국에 오면 늘 이렇다. 오후 다섯 시에는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데 해가 중천이어서 쉽게 잠들지 못한다. 그보다는 더 놀고 싶어서 잠자는 시간이 점점 늦어진다. 나중에는 하루를 나누어 쓴다. 지금은 자전주기가 다섯 시간 정도 되는 행성에 산다.
남편은 전날 밤늦게까지 미팅하고 잠깐 눈 붙인 뒤 새벽 골프하고 들어왔다. 공은 잘 안 맞고 멀리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른 아침에 몸이 안 풀리고 피곤한 상태로 꼭 골프를 해야 하나 싶지만 그것도 일이라니 더 이상 말을 안 한다. 자는 것도 아니고 깨 있는 것도 아닌 상태로 먹기도 하고 헛소리도 하며 나랑 딸 사이에 자꾸 끼어들었다. 딸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들먹이며 아빠를 놀린다. 남편은 어제 오후 내내 버티다 거의 빈사 상태가 되었다. 코를 크게 고는 것으로 보아 죽지는 않은 듯하지만 죽을 수도 있겠다.
자고 깨는 시간이 다르면 먹는 시간도 달라진다. 세 식구가 삼시 세끼 먹는 시간이 다 다르면 주말인 경우 하루 아홉 번의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 물론 그렇게는 안 한다. 내가 좀 기다리거나 누가 끼니를 거르기도 해서 횟수는 좀 줄어든다. 모처럼 가족이 모였으니 외식도 해야 하고 그래서 생활 리듬이 깨진다. 배가 고프니 지금 먹자고 하면 자다가라도 일어난다. 잠깐이니까 우리는 기꺼이 그런 불규칙을 받아들인다.
식구가 왜 식군가. 한집에 살면서 같이 밥 먹는 사이라서가 아닌가. 가족이더라도 함께 식사하기가 쉽지 않다. 시간과 공간이 일치해야 한다. 집에서는 누군가 재료를 마련하여 요리와 조리를 해야 하고 차려야 한다. 밖에서 사 먹더라도 메뉴를 골라 식당을 정하고 시간을 조율하기까지 합의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모모는 양보해야 하고 희생해야 한다. 새삼 한 끼 같이 먹는 일이 소중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