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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햇살 Mar 02. 2020

첫발 떼기

2017년 9월 25일

 전날 밤에는 이상한 일이 있었다. 요란한 소리에 잠에서 깼더니, 울릴 일이 거의 없는 인터폰 벨소리였다. 이 야심한 밤에 누굴까 궁금했지만, 누구세요 라는 말로 여자가 사는 집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인터폰의 수화기를 들었다가 아무 말 없이 내려놓았다. 아마 번호를 잘못 눌렀으리라. 다시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신경질적인 벨소리가 다시 시작된다.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는데 연이어 벨소리가 울렸다. 아예 벨소리가 울리지 못하게 수화기를 벽에 대롱대롱 늘어뜨려 놓았다. 열려있던 부엌 쪽 창문에서 화가 난 남자의 욕설이 들려왔다. 취객이 호수를 잘 못 누른 듯했다. 


 문득 몇 년 전 일이 기억났다. 그날도 새벽시간이었고, 나는 당연히 잠을 자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를 사람은 위층에 살고 있는 주인집 할머니밖에 없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무심결에 눈을 비비며 방의 불을 켜고, 현관으로 향하며 누구냐고 물었다. 잠에 취해 있어서인지 나는 의심 없이 문을 열려고 보안 장치에 손을 가져다 댔고, 문 밖으로 퀵으로 핸드폰이 왔다는 답변이 들려왔다. 그 말에 잠이 깨며 뒤로 물러섰다. 인터폰을 통해 문밖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했는데,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자가 서 있었다. 무슨 핸드폰이냐는 나의 질문에, 내가 분실한 핸드폰을 퀵으로 가져왔다는 답을 들었다. 핸드폰을 잃어버린 적이 없다고 말을 했더니, 남자는 이 집이 맞다며 문을 열라고 현관문을 두드렸다. 새벽 1시 30분, 무섭고 당혹스러운 그 상황에서의 나는 어쩔 줄 몰라하며 내가 아니라는 말만 반복했다. 


 문밖에서 소란이 일자 옆집에 사는 사람이 문을 열고 무슨 일이냐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옆집에 살고 있는 사람은 나 같은 직장인인 남자분이었는데, 인사를 한다거나 한 적은 없었다. 그분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퀵 서비스 남자는 우리 집 문 앞을 떠났다. 그리고 나는 오랫동안 다시 잠들지 못했다.





 5년  전의 나는 그렇게 불안에 떨었는데, 이 날의 나는 귀찮다는 듯 인터폰의 벨소리가 울리지 않게 조치해놓고 바로 잠에 빠졌다. 그저 시간이 흐르기만 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흐르는 시간 동안 나는 조금은 달라져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 역시도 몇 달 뒤에는 달라져 있을 수 있겠지, 아니 몇 달 뒤가 아니라 당장 지금 오르고 있는 관악산을 다시 내려가서도 달라져 있을지도 몰라, 라는 생각으로 관악산을 올랐다.




몇 달 만의 등산인 데다가, 불규칙적으로 전해지는 엉치뼈 통증에 긴장하며 걸었더니 조금 힘이 들었다. 그럼에도 관악산은 나 같은 초보자가 오르기 쉬운 산이기에 편안한 등산이었다. 이 앞을 조금 더 걸어가면 연주대인데, 바위틈 사이의 낭떠러지가 무서워서 건너지는 못했다. 바위에 걸터앉아 조금 쉬다가 다시 산을 내려갔다. 

 간만의 등산이라 발목을 감싸는 양말을 신어야 한다는 것을 깜빡하고 목이 짧은 양말을 신었다가 발등이 발갛게 되었다. 쿠션도 없는 양말이라 발바닥은 더 심하게 까져버렸다. 상처투성이 발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이 날의 등산이 좋았다. 홀로 가는 등산은 하나의 명상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복잡하고 산만한 내면의 소리들은 가라앉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등산을 좋아하는 것일까? 다시 내려오면서 왜 힘들이며 올라가는 거야?라고 말했던 과거의 내가 부끄러웠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나 또한 보인만큼 말하고 다녔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시원한 사과주스를 마시고 더 시원한 샤워를 즐겼다. 새벽의 소동으로 잠을 설치고, 등산의 노곤함으로 꿀잠을 잘 것이라 생각했는데, 평상시 잘 꾸지 않는 악몽을 꾸었다. 불안하고 무서웠던 나의 무의식을 숨길 수는 없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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