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레터 41화 여름의 편지

by 김목화

A에게.


얼마 전에는 눈이 왔는데 말이야. 벌써 해가 길어지고 여름이 왔어. 나는 반갑게 맞았지만 그게 너무나도 빠르다는 생각에 두려워졌어. 그리고 이게 나만 무서웠던 게 아니었던 것 같아. 다들 눈이 아닌 비가 구멍이 뚫린 것처럼 오니까 저게 뭘까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더라고.


바람에 넘실대는 나무의 그림자는 항상 아름다운 것 같아. 나는 오늘 빳빳이 다린 옷을 입고 왔어. 소개팅이라도 나가볼까. 물론 그런 일은 없어.


익숙한 동네라는 게 그것도 참 무서운 일이야. 왜냐하면 안정감을 주니까, 난 참 겁보인 것 같아. 무서운 게 이 세상에 참 많거든. 이렇게 두려운 이 세상에서 잘 살아가고 있는 건 네 덕이야.


우리가 마스크를 쓰지 않고 숨을 쉬는 것도, 아름다운 녹음의 광경에 넋을 잃는 것도, 서로를 꼭 껴안고 사랑을 나누는 것도.


고마워. 어쨌거나 우리는 살아있어 보자. 앞으로 적어도 50번쯤은 넘는 여름을 맞이하면서 함께 했으면 좋겠어. 나랑 약속 할 수 있어?


B에게


당신의 편지를 조금 늦게 읽었습니다. 여기는 5월 19일이에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을 조금이라도 원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요! 그냥 원망한다고 말할게요.

원망해요. 그 이유는 당신이 더 잘 알겠죠. 원망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을 하기는 조금 어려운 것 같아요. 망설이는 저를 놀리는 당신에게 원망한다는 말을 사용하는 게 더 편하니까요.


영화 스터디에 우리 둘만 남았을 때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릅니다. 혹시나 빨개진 얼굴을 들킬까 봐 냉방병에 잘 걸리는 저는 얼마나 더운 척을 했는지를 몰라요. 매번 스릴러 영화를 찍는듯했습니다. 당신은 그걸 아는지 몰랐는지 (이제 보니 알았던 것이군요.)매번 더워? 물 줄까? 하는 목소리에 얼마나 벌벌 떨면서 창피하고 부끄러웠는지 몰라요.

그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당신은 정말 평온했던 것만 같은데, 저만 두근두근하고 있었던 걸까요?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사실 아무도 제대로 하지 않게 된 스터디같은 건 금방 그만두면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저에게 파일을 메일로 건네줄 때 [파일명: 시나리오 시놉시스 양식 모음] 1.시놉시스_양식.hwp 2.시나리오_기획안_양식.hwp 이라고 정리해준 것에, 저는 반해버렸는걸요.


게다가 못생긴 맑은 고딕 따위는 쓰지 않는 걸 보면서 ‘어떡해! 도대체 이런 남자는 어디서 생겨났을까?’ 당신의 출원지에 대해서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그만 푹-빠져버렸습니다. 푸딩 한입 먹을 때보다 더 푹-푹- 요! 이런 제가 이해가 잘 안 가시죠? 그렇지만 저는 그 파일명들을 줄곧 살펴보면서 어쩜 이리 다정하고 저와 잘 맞는 사람이 있는 걸까하고 한참을 골몰했습니다.


저는 파일을 순서대로 하나하나 정렬하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그러니까 당신의 그 행동은 프로포즈보다도 엄청난 고백이었습니다. 단순히 설레는 것만이 아니었어요. 저는 조금 더 고민하고 욕심을 내어서 우리가 함께한 지 1년이 되는 순간까지 생각했습니다.

이제 와서 고백하는 것이지만, 10년 뒤도 생각했어요. 부끄럽네요.


자꾸 욕심이 나서 당신이 일을 줄이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을 기다리는 일도 사실 좋아요. 저는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당신을 기다리는 일은 좋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오는 길에 선물을 사 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누군가를 기다릴 때, 마치 해가 지기를 바라는 강아지처럼 목을 빼꼼히 내놓고 있었더랬죠.


하지만 당신은 꽃다발이라도 하나 사서 손에 쥐여줄 것만 같습니다. 기다리는 날에 저는 무얼 하냐면 뻔하게도 당신 생각을 합니다. 저는 궁금한 게 많습니다. 당신은 요리하는 걸 좋아한다고 했는데 무슨 요리까지 할 수 있는 거죠? 저는 굉장히 잘 먹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를 먹일 정도의 요리와 설거지를 잘합니다. 그리고 다른 생각은 저 혼자만의 것이니 비밀로 할게요. 이건 좀 부끄러워서 하여튼.


또 궁금한 점은 당신은 무슨 옷을 좋아하나요? 어떤 음식을 먹지 못하나요? 걸어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지 산과 바다 중 어느 게 더 좋은지. 강아지가 좋은지 고양이가 좋은지. 팔짱을 낄 때 어떤 쪽 손이 더 좋은지, 침대에서 어떤 자세로 눕는 것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많은 것들을 궁금해하고, 사실 별것이 아닌 제가 왜 좋은지가 궁금합니다. 저는 당신이 저를 좋아하면 제 좋은 점이 모두 닳아 없어질까 봐 걱정합니다. 저의 따뜻한 마음이 사라지면 그때도 나를 사랑해줄 건가요? 이렇게 묻고서 당신이 저를 많이 사랑해주었으면 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래서 당신이 모르게 늦은 밤마다 신을 믿지 않지만, 간절한 기도를 합니다. 누가 들어줄까요? 어떤 신이든지 들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요.


저에게 당신의 존재는 매우 큽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영원한 거 아니잖냐는 낭만적이지 못한 소리를 한다면, 우리의 사랑은 영원할 거라고 믿으면서 함께하는 건 어떨까요? 저는 그렇게 믿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믿게 하는걸요. 가위에 잘 눌리는 제가 잠에 잘 들 수 있도록 꾸벅꾸벅 졸면서 받던 전화의 목소리는 너무 귀여웠습니다. 그렇게 믿고 싶어질 정도로 말이죠.


당신의 다정함은 제 안까지 비집고 들어와서 제가 다정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지금까지 제가 만나온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위한 발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 중심이 당신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착각이 오래 지속되도록 나를 많이 사랑해 줄래요? 약속해 줄래요? 당신을 많이 사랑하니까요. 사랑해요.


이 편지는 제 다정함을 빨래를 쥐어짜듯 쥐어짠 글입니다. 내 생각을 더 많이 해주세요. 제가 없을 때 저를 더 아껴주세요. 그럼 저는 더 따뜻하고 다정한 말들로 당신과 영원이 아닌 영원을 함께하겠습니다.

당신이 없는 순간에도 당신과 함께하는 것만 같아요. 이건 진심입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냈으면 합니다.


목화 드림.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