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3월부터 2000년 10월까지 - 나의 동네, 구반포
만 15년 7개월 동안 구반포에 살았습니다. 평생을 놓고 볼 때 짧은 시간이지만, 나는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를 구반포에서 다녔습니다. 단 1분이 지금의 10분, 1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지던 유년 시절, 구반포에서의 학창 시절은 슬로 모션처럼 천천히 흘러갔습니다.
나의 엄마 채길자 여사는 2001년 3월 하늘나라로 돌아가셨습니다. 우연하게도 우리 식구가 구반포를 떠난 지 채 6개월이 지나지도 않아서 말이죠. 그래서 우연하게도 나는 엄마에 대한 거의 모든 기억이 구반포에서의 삶에 녹아있습니다. 엄마랑 걷던 길, 엄마가 해준 밥, 엄마랑 했던 얘기 모두. 구반포의 구석구석에 묻어 있습니다.
만약 내가 평균 수명까지 살게 된다면 엄마와 보낸 시간은 고작 23년, 그중에서도 기억이 가능한 시간은 단 15년입니다. 15년을 박제하고 싶은 구반포에서의 추억. 그런데 말입니다, 구반포는 곧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물론 멋지게 탈바꿈하겠지만 엄마와 내가 함께 했던 구반포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지겠죠.
지금도 구반포를 거닐면 엄마의 모습이 불쑥 떠오릅니다. 꽉 찬 장바구니를 5층까지 들고 올라오기가 힘들어 우리 집 베란다를 향해 ‘서희야~!’하고 부르는 모습, 처음 여기로 이사오던 때 고려당에서 빵과 우유를 사주던 엄마, 도시락을 싸던 엄마의 아침, 아빠한테 혼나가며 언니 차로 운전 연습을 하던 엄마, 정확히 한 컵 반의 쌀로 매일 압력솥으로 밥을 짓던 엄마, 아빠한테 놀러 가는 허락을 받고 나서 등에 맨 배낭이 통통 흔들리도록 쫄랑쫄랑 뛰어가던 뒷모습, 엄마... 그리고 엄마...
다행히도 저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 꽤 많은 에피소드를 간직하고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저장고의 기억들이 차츰 흐려지는 걸 부쩍 느낍니다. 그래서 기록으로 남기려고요. 1985년 3월부터 2000년 10월까지의 일기를 다시 써보려고 합니다. 어렸을 때의 나는 너무 소심하고 잔뜩 주눅이 들은 찡찡이 아이였습니다. 그때의 소심했던 나를 다시 마주하는 게 쉽지 않지만, 그래도 만나보려고 합니다. 더 늦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