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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희 Jan 24. 2020

아파트먼트 테라피
(Apartment Therapy)

아파트가 치유하는 것들

“1980년대 이후 아파트는 대표적인 중산층의 주거지이자 재산증식의 수단이 됐다. 2010년 주택총조사에서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이미 전체 주택의 절반을 넘어섰다. 택지를 조성해 아파트를 세우던 시절이 지나고, 2000년대 중반부터는 오래된 아파트를 새 아파트로 갈아치우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헌 집 줄게 새집 다오’의 과정은 순탄치 않다. 재건축은 단순히 한 덩어리 단지의 재탄생이 아니라 그야말로 각각의 가정과 개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엄청난 변화이기 때문이다.” - 경향신문, 2017년 6월 16일자 <커버스토리-굿바이 둔촌 주공>에서 발췌 


대한민국의 아파트는 두 가지 가치를 갖는다. 먼저 재화로서의 아파트다. 아파트는 보통 사람들의 중요한 재산이자 부의 척도요, 조건에 따라 수억에서 수십억의 불로소득을 안겨줄 수 있는 기특한 효자다. 돈으로 거의 모든 것이 가능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화로서의 아파트는 물질적으로 치유하는 힘을 갖는다. 


두번째는 역사로서의 아파트다. 시간이 멈추지 않고 흐르는 이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삶의 흔적을 남겼다. 나무와 새같은 길 위의 생명도 함께 숨을 쉬며 자랐다. 현재를 사는 사람에게는 주거공간으로서의 안정감을, 이 곳을 거쳐간 이들에게는 현대의 향수를 제공한다. 역사로서의 아파트는 존재만으로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다. 


두 개의 가치가 공존하면 좋으련만, 충돌하는 일이 많아졌다. 시간은 재화의 가치를 부식시키기 때문에 이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꼬박 16년을 살았던 구반포 주공아파트는 나의 유년 시절이 고스란히 담긴 살아있는 앨범이다. 재건축 논의는 무려 30년 가까이 지속되어 왔기에 나는 그 앨범이 가능한 오래 보전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근처의 많은 아파트들이 스러져갔다가 다시 부활하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의 마음은 달랐다. ‘1974년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형성된 대단지 아파트’보다는 ‘한강변과 황금 학군을 낀 초고가 아파트’에 점점 무게가 기울었다. 아파트가 아파트를 이긴다. 사람들의 드나듬이 계속되어도 오랫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수많은 나무, 풀, 생명들은 텃세는 커녕, 갈 곳없이 내쫓길 위기에 놓이게 된다.  


나는 지난 일주일간 오래된 아파트가 허물어지고 빛나는 금은보화로 변신할 채비를 하는 모습(재화로서의 아파트)과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는 유년의 고향(역사로서의 아파트)의 모습을 담았다. 감상에 젖은 추억 회귀도 아니고 그저 생겼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서울의 일상에서 우리 모두 어떤 의미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거침없이 잘려나가는 나무들과 쫓겨나가는 길고양이들에 대해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되기에 잃어버리는 것에 신경쓰지 않는 걸까? 서울이라는 도시의 속도는 너무 빨라 숨이 차다.


탁트인 개방감과 머리 하나씩 삐죽 내밀고 있는 나무들은 서울에서 잘 볼 수 없는 낯선 풍경이다.


낡은 아파트는 사망 선고를 받은 시한부 환자와도 같다.  


오래된 아파트 단지 사이에 궁궐처럼 우뚝 솟은 신축 아파트. 그 존재감은 위협적이기까지 하다.


이주가 끝난 텅빈 아파트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부동산 업자들이다.


철거된 나무 더미들. 재개발 협상에 실패한 아파트는 조합장을 규탄하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아이들이 신나게 타던 킥보드는 이제 빛이 바래 덩그러니 빈 단지를 지킬 뿐이다. 


이주민이 모두 떠난 아파트에 남은 길고양이가 경계하는 눈빛을 보이고 있다. 


캣맘들이 마련했던 길고양이의 겨울 거처. 이제 길고양이들은 이 곳에서 겨울을 날 수 없다.  


오늘날 재개발은 로또 당첨에 버금가는 경사로 치부된다. 

수십억대로 껑충 뛰는 부동산 덕에 단어 그대로 ‘부러움과 동경’의 시선을 받는다. 


 초등학교 6년 동안 이 문을 드나들며 통학했다. 

크고 높게만 느껴졌던 아파트 입구가 늙은 노인처럼 작고 왜소해보인다.  


시간을 증명하는 것은 생명체들이다. 나무들은 무럭무럭 자라 5층 아파트를  훌쩍 넘었다. 


지하주차장이 없는 오래된 아파트는 유독 나무가 많다. 좁다란 길은 모두 멋진 산책로가 되었다. 


 한 신축 아파트 단지 공원에 전시된 반포동의 옛 전경.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르는 곳’이라는 뜻에서 비롯된 지명 답게  50여 년전 이 곳은 개울을 낀 마을이었다.


재건축 공사가 막 들어간 두 개의 아파트 사이로 신축 아파트가 보인다. 

이들도 몇년 후면 높게 솟은 첨탑처럼 위풍당당한 자태와 가치를 갖게 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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