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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임 Jun 08. 2024

노랗고 바나나 크기만 한

결혼 20주년에는 사진관에서 가족 사진이라도 찍고 싶었다

아침에 연출을 위한 사진 촬영 후 TV를 보고 있는 '우리 집 남자 둘'에게 주었다.  노란 바나나를 들고 TV를 보며  노닥거린다.

요 근래 이렇게 이쁜 똥은 처음이다. 마음이 편하다는 뜻 일 게다. 아침에 황금색 똥을 보고 나니 ‘돈’이라도 들어올 것처럼 기뻤다. 사진이라도 찍어 놓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똥이 이쁜들 똥은 똥이기에 보여주기는 좀 그렇다. 내 머릿속에만 넣고 다니련다. 똥 꿈은 나누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황금색 똥을 직접 보았으니 더 나누다간 ‘돈’ 복이 다 달아날 것 같아서 여기까지만 말해야겠다.  

    

우리 집 남자 셋이 집을 나간 후에야 나는 밖을 나오는데, 오늘 아침엔 작은아이와 같이 나왔다. 어제 ‘게’ 사건도 있고 아이 시험 기간이고 해서, 버스 정류장까지 가면서 잠시라도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내가 아침에 본 황금 똥 이야기를 하자 금세 화색이 돌았다. 엄마 이야기를 듣는 내내 숫기 없는 표정이었다. 아무와도 말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작은아이한테는 말하게 된다. 

     

그러니까 어제저녁이다. 결혼한 지 20주년 되는 날이다. 나는 기분이 꿀꿀해 밖으로 뛰쳐나왔다. 뭐 사실 별 기대는 안 했지만, 올해 스무 살이 된 큰아이에게 결혼기념일에 관한 얘기는 한 적이 있다. 매년 모르고 그냥 지나가는 애들에게 한 번쯤은 알리고 싶었다. 일을 마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 보니 난데없이 온갖 문은 다 열어 놓고, 아이들과 남편이 화장실에서 게를 닦고 있는 게 아닌가.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 가장 당황스러운 건,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뭐 하고 있는 거야?”     


하고 물었더니 내 질문엔 대답도 없이 하던 일만 계속하는 게 아닌가. 게를 닦고 있는 칫솔도 용도가 뭐였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밖으로 냄새 나간다고 현관문을 닫으라고 했다. 남편은(정말 남의 편) 놔두라고 ‘버럭’ 소리를 지른다. 

     

딴에는 결혼 20주년 기념을 ‘게’ 파티로 하고 싶었나 보다. 내가 원하는 건 오늘 뭘 할 건지 미리 상의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물어봐 주는 거였다. 남자 셋이 게를 삶아 먹든 구워 먹든 나는 아무 관심도 없고 화만 났다. 늘 내 의견은 묻지 않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참기 힘들었다. 밖으로 나와 세탁소 들러 남편 옷 맡기고, 배수관 청소기를 사고, 애들 여름 실내화를 샀다. 그러고는 더 시간 때울 곳이 없나 동네를 어슬렁거렸다.


집에 그냥 들어가기 싫었다. 마침, 배에서 꼬르륵 신호를 보낸다. 인천 만수 2동에 처음 오게 된 날 먹었던 ‘청국장’ 집이 생각났다. 밖에서 저녁을 먹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이 집을 내게 처음 소개해 준 이웃도 생각나고, 이곳을 내가 처음 소개해 줬던 국어 선생님도 생각났다. 아주 갑작스럽지만 두 사람 중에 한 분께 전화를 걸어 밥 먹자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용기를 내지 못했다. 만나면 내 신세타령만 할 것도 같고 두 분이 못 나온다고 거절하면 창피할 것도 같았다. 


청국장집의 기본 반찬은 딱 다섯 가지에 구운 김이 다회용기에 담겨있다. 노란 콩나물도 있다. 김치는 필요한 만큼 덜어 먹으라고 집게와 빈 접시가 같이 나왔다. 많은 반찬은 아니지만 정갈하면서도 평소에 꼭 먹고 싶었던 반찬이다. 얇게 편 썬 더덕은 빨간 고춧가루에 곱게 물들어 식욕을 더욱 자극한다. 청국장이 나왔다. 야들 거리는 두부가 청국장과 섞여 모락모락 김이 오른다. 분명 두부도 직접 주인장이 만들었을 게다. 밥 한술 뜨고 청국장을 뜬다. 순간 뜨거워 하~ 하고 하얀 김을 밖으로 뱉는다. 지금 여기서 ‘청국’인지 ‘천국’인지를 맛보는 중이다. 옆 테이블에서 먹고 있는 이웃의 계란찜에도 눈길이 간다. 부들부들한 게, 한껏 부풀어 오른 계란찜도 먹고 싶었지만 ‘청국장’만으로 충분하고도 남았다. 혼밥을 즐겼다고나 할까! 빨리 먹지 않아도 되고, 오롯이 내 배만 채우면 되고, 눈치 보지 않고 젓가락이 마음대로 간다. 그러고 나서 오늘 아침에 맘 편한 똥을 누었다. 


아이들이 어릴 적 화장실을 다녀오면 건강 상태를 살피기 위해 변기를 확인했었다. 큰아이가 볼일 보고 나면 노란 바나나 두 개가 변기 속에 늘 들어앉았다. 한 번은 하도 이뻐서 남편에게 큰아이 똥 좀 보라고 했더니, “와! 부럽다.”라고 말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남편은 자주 배앓이를 했고 지사제를 달고 살았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직업이다 보니 항상 긴장된 상태로 있거나, 면역력이 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작은아이는 난치성 질환을 앓아서 그런지 변이 가늘고 질척했다. 사실 언제 떠나보낼지 몰라서 잠잘 때면 숨은 쉬고 있는지 확인할 때가 종종 있었다. 이런 걸 알기에 남편은 작은아이가 요구하는 것이라면 무조건 들어주었다. 나도 그냥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와 보니 역시나 설거지가 산더미다. 검은 비닐봉지 밖으로 뾰족한 ‘게’ 다리가 삐져나왔다. 다음은 명대사를 칠 차례다.     

  “먹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냐~~?”     

성질을 내며 치우다가 게 다리에 손바닥을 찔리고 말았다. 엄청나게 큰 소리로 엄살을 부려본다. TV 볼륨 최대로 키고 시청하는 남편과, 헤드셋을 끼고 게임에 열중인 연년생 형제에겐 내 비명이 들릴 리 없다. 음식물 쓰레기를 그대로 두고 싶었지만, 비린내가 너무 나서 치울 수밖에 없었다. 일 년에 한 번쯤은 밖에서 우아하게 식사하며 집안일에서 벗어나고 싶다. 20주년에는 사진관에서 가족사진이라도 찍고 싶었다. 내 생각을 미리 말할 수 있는 용기는 왜 갖지 못했는지.  

    

남편은 결혼 20주년이 되는 날을 기념하여 작은아이의 의견을 제일 먼저 물어봤을 것이고, 먹고 싶어 하는 ‘게’ 한 상자를 사 왔을 것이다. 평소처럼 따라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우리 집 남자 셋에게도 “아침에 노란 똥 쌌어?”라고 편안하게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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