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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정임 Jun 08. 2024

죄송합니다 다음 정거장입니다

오늘은 비가 왔다 비가오는 날엔 함초롬한 풀잎을 찍고 싶었다


나갈 시간이 정해져 있음에도 아침부터 집안일로 분주하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집을 치우고 나가지도 못한다. 일기예보를 미리 확인하지도 않고, 창밖을 내다보지도 않는다. 비가 오는 날에도 꼭 밖을 나와보고 나서야 비가 오면 우산을 가지러 다시 들어간다. 청소하다가도 카톡이 오면 수시로 확인한다. 빨래를 하고도 시간이 촉박해 널지 못하고 나갈 때가 많다. 어쩌다 빨래까지 널고 나오는 날엔 자랑거리처럼 동료들에게 이야기한다.     

버스 정류장에서 전광판을 수시로 쳐다보며 발을 동동거린다. 요즘은 율목도서관에서 매주 화요일 문화프로그램 ‘브런치스토리 작가 되기’ 수업을 듣고 있다. 1시간가량 걸리는 거리다. 서둘러 나오지만 자꾸 빠트리고 나오는 것이 생겨, 다시 집에 갔다 오느라 줄곧 지각을 한다. 아침에 스마트폰 충전은 금물이다. 충전 중인 스마트폰을 그냥 놓고 나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런 사실을 버스 정류장에서 발견하면 다행이다. 버스를 타고 세 정거장이나 더 가서 생각이 난 적도 있다. 그래서 스마트폰을 아침에 충전하지 않고 충전기와 보조 배터리를 꼭 가지고 다닌다.


매사 깜박거리고 지각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예전처럼 빨리빨리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리 준비하지 않는다. 준비를 안 해 놓으니, 마음이 늘 불안하기도 하다. 긴장감이 밀려온다. 이 모두가 시간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분명치 않고 기대도 없으며 그날그날 근근이 생활해 가는 습관 때문이라는 결론이다. 한마디로 삶의 목적을 잃어가고 있다.      

  큰아이의 행동에서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시험 기간이면 나도 같이 예민해져 아이에게 잔소리를 한다. 

     

  “엄마, 나 길을 잃었어요.”      


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고백한 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잔소리를 한 적도 있다. 그때마다 큰아이는 냉장고 문을 수시로 여닫는다.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켠다. 무얼 하기 전에 하기 싫거나 긴장하면 하는 행동이다.      

율목도서관에 가는 15번 버스가 도착했다. 매번 내리는 문 바로 옆자리를 고수하던 나는, 뒤 끝자리에 앉았다. 두 칸 앞쪽으로 짙은 민트색 상의에 하늘색 모자를 눌러쓴 어르신의 뒷모습이 꽤 근사해 보인다. 버스가 브레이크를 급히 밟는다.       


  “에이, XX. 거 기사 양반 운전 좀 똑바로 해요.”  

    

민트 모자를 쓴 어르신이 말을 뱉는다. 나는 순간, 스마트폰 3배 줌으로 당겨 뒤통수를 찍었다. 어르신의 근사해 보였던 뒷모습도 실망이고, 궁금했던 앞모습도 사라졌다. 평상시 늘 겪는 것처럼, 버스 기사는 죄송하단 말도, 앞차를 핑계 삼는 말도 없이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장거리를 갈 때면 버스 안에서 일 처리를 하는 습관이 생겼다. 30분 정도 문자와 단톡을 살피고 필요한 곳은 전화를 한다. 그러고 나면 곧 졸음이 밀려온다. 꾸벅꾸벅 졸고 나니 동인천역이 보인다. 시계는 벌써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초인종을 누르고 보니 아직 한 정거장 전이다. 


  “죄송합니다. 다음 정거장입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버스 기사는 이 시간에 타면 승강장마다 타는 손님과 내리는 손님이 있어서 항상 서야 한다고 한다. 즉, 내가 죄송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는 거였다. 아까 욕쟁이 어르신을 상대할 때와는 달리, 동네 아주머니를 만난 것처럼 수다를 멈출 줄 모른다. 


신포시장에서 내려 율목도서관을 가는 길이다. 답동성당을 지나다 보면, 담벼락 틈으로 함초롬한 풀잎들이 물방울을 머금고는 내게 말을 걸어온다.


  “나 좀 찍어주세요.”      


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두리번거리며 비 온 뒤의 풍경을 훑어보기만 한다. 발은 앞을 향하고 고개는 아직 다 보지 못한 풀잎을 보느라 뒤로 자꾸만 돌아간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10분만 일찍 나왔더라면 여유가 있을 텐데 하는 것이다. 목적지를 향해 가다 보면 사진으로 담고 싶은 순간들이 곳곳에 있다.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이 사진가의 일이라면 조금 부지런해야 하는 것도 사진가의 일이다. 오늘의 이 아름다운 풍경이 내일은 없을 수 있으니까.




♣ 덧)

이 글을 쓰고 나니, 수업 마지막 날은 정말로 늦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아침에 할 일을 전날 저녁에 미리 해 놓고 새벽에도 오늘 할 일을 체크해 보았다. 여유 있게 출발하니 정말 발걸음이 가볍다. 율목도서관 가는 골목길에서 2023년도의 추억이 떠오른다. 골목길 집 앞 화단에 심겨있던 능소화나무가 태풍에 뽑혀 나갔고, 2024년에는 장미가 피어있었다. 곧 장미 넝쿨이 담장을 에워쌀 것이고, 나는 어반각(어반스케치를 위한 사진)이 나올 때까지 필살기에 가까운 사진을 찍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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