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우리 모두에게는 직진으로 견고하게 그어진 삶의 밑그림이 주어졌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대학교. 학교는 꼬박꼬박 잘 나가야 하고 선생님 말씀을 잘 들으며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친구들보다 공부를 잘할수록 학교 생활은 편안하다.
대학을 들어가기 전까지는 하고 싶은 것들을 참아야 한다.
공부와 관련 없는 쓸데없는 책을 읽거나 인생에 대해 고민을 하는 건 시간 낭비다.
대학에 들어가면 잠시 자유가 주어지지만 곧 취업 준비에 돌입해야 한다.
나의 경쟁자는 내 옆에서 같이 놀고 있는 친구들이니 취업 준비는 빠를수록 좋다.
취업 후에는 나에게 맞는 짝을 찾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운다.
자식 뒷바라지하느라 부모들은 많은 희생을 하면서도 동시에 노후를 위한 준비를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남들 다하는 주식도 좀 해야하고, 부동산 공부도 해야한다.
이쯤 되면 집 한 채쯤은 있어야 하고 중형차 한 대는 있어야 한다.
살고 있는 동네, 아파트의 이름, 자동차 시리즈,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학비에 따라 내 삶의 등급이 나뉘어진다.
중년에 접어들어서야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 건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내게 맞는 일이었나?" 비로소 나를 돌아보기 시작하지만 너무 늦은 것만 같다.
다행히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그냥 나처럼 비슷비슷한 모양으로 사는 사람들이 보인다.
친구보다는 내가 좀 더 넓은 평수의 집에서 살고 있으니, 좀 더 좋은 차를 타고 좋은 가방을 가지고 있으니..
이만하면 된 거지.. 인생 뭐 있나..
이렇게 주어진 밑그림대로 아등바등 살아온 우리가 부모가 되면 자식에게 가르칠 수 있는 길이란 우리가 살아온 길과 같은 길 뿐이다.
그 길 외에는 가 본 적이 없으니. 그냥 비슷한 무리에 섞여 비슷한 길로 가는 것이 최선이라 굳게 믿는다.
그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부모의 인생이 통째로 흔들리는 것이므로. 자식도 그냥 나처럼 그 흐름 속에서 별 탈 없이 흘러가 주기만 바랄 뿐.
다만 내 자식들이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사람보다 조금만 더 빨리 흘러가면 그걸로 성공이라 스스로 위안한다.
멈추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이게 맞는 건가 의심해 볼 여유가 없었다.
용기도 없었다.
거대한 물결을 이루고 유유히 흘러가는 흐름을 거슬러 힘겹게 싸우며 올라올 용기, 옆길로 빠져볼 용기, 잠시 멈춰볼 용기. 주변 사람들의 걱정과 기대를 뿌리칠 수 있는 용기
그렇게 내 인생의 33년을 흘렀다.
큰 흐름 속에 있을 때 사람들은 당연한 흐름을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나도 내가, 오직 나만 이상한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버텨낼 수가 없었다.
아침에 눈뜨는 게 무서웠고, 가슴을 무겁게 누르는 돌덩어리의 무게 때문에 숨쉬기가 어려웠다.
어느 날엔가 TV 속 여행 프로그램에서 세계 3대 폭포 중의 하나인 아프리카 빅토리아 폭포의 광경이 펼쳐졌다. 압도당할 듯한 웅장한 스케일의 경이로운 자연 속에 한 점으로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 아득하게만 보였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삼켜버릴 듯하게 내 귀를 꽉 채우던 폭포수의 굉음에 한참을 넋을 놓고 TV 화면에 빠져있던 내 머릿속에 들던 단 하나의 생각은
"저 폭포 아래에서라면 미친 듯이 소리 내어 울어도 세상 사람들이 아무도 듣지 못하겠지?"였다.
교직을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하며 알았다.
이 세상에는 하나의 큰 흐름만 있는 게 아니라 수천 가지 수만 가지 삶의 물줄기가 있다는 것을.
세계여행을 하며 만난 여행자들은 내가 "교사를 그만두고 여행 중이다"라는 말에 아무도 이상한 눈빛을 보내지 않았다.
나는 1년 반 동안 "여행자"로 살며 "여행자"라는 신나고 자유로운 삶의 물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리고 여행자로서의 삶이 지루해질 때쯤 다시 그 물줄기에서 빠져나와 삶의 방향을 틀었다.
국제개발 활동가로, 커피 전문가로, 사회적 기업가로.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째, 세 번째는 쉽다. 이건 진리다.
내가 인생의 방향을 틀어 두 번째, 세 번째 선택한 길이 무조건 그 전보다 낳은 길이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일생에 단 한 번이라도 인생의 방향을 틀 용기를 내어본 사람은 자신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훨씬 깊어진다는 걸 알았다. 자기 삶을 결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더 이상 남 탓을 하지 않고, 세상 탓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위 사람들에게, 내 아이에게 단 한 가지 흐름의 길을 강요하지 않는 말랑말랑한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이 정말 짜릿하다.
불과 10년 전과도 많이 다르게 요즘은 회사를 그만두고 세계 여행을 떠나는 것이 그리 특별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쏟아지는 여행기들을 보면 오히려 누가 더 멋지고 안정적이고 연봉이 센 직장을 때려치웠냐를 경쟁하는 듯하기도 하다. 가던 길을 멈추고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방향을 틀어볼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그만큼 많아진 것이다.
세상이 그려놓은 밑그림을 의심해보고 지워도 보고 과감하게 자신의 그림을 새롭게 그려나가는 이들이 반갑다.
앞으로 내 딸이 살아갈 세상은 부모가, 사회가 만들어 놓은 밑그림을 강요하기보다는 자기 인생의 밑그림을 자기 스스로 그려나갈 수 있도록 인정해주고 응원해 주는 세상이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