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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in Africa Aug 13. 2022

잘 듣지 않는 나

solo leveling _5 귀 통증의 원인 

그녀들:  햇살님, 이야기하는데 저는 안 보고 어딜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듣고는 있는 거예요? 아님 딴생각하는 거예요? 더 이상 이야기하기가 싫어요? 

햇살: 나요? 아니 잘 듣고 있었는데, 집중해서. 다 잘 들었는데... 

그녀들: 대화를 할 때 상대방 눈을 안쳐다 본다는 거 알아요? 지아한테 이야기할 때도 지아 눈을 보지 않고 이야기하고요. 또 지아도 햇살님 이야기 들을 때 햇살님을 보지 않는다는 거 알아요? 모녀가 대화하는데 서로 엉뚱한 데를 쳐다보고 있다고요. 

햇살:? 그래요? 내 가요?? 우리 가요? 그런가요? 


그녀들은 몇 번이나 이 부분에 대한 지적을 했다.

처음에는 내가 이런 습관이 있다는 걸 인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지적이 계속되고, 그때마다 내가 상대방의 눈이 아닌 저 멀리 있는 의미 없는 물건을 아무 생각 없이 응시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후로는 더 이상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 나는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을 똑바로 보지 않고 말하고 듣는다. 




그녀들: 상대방을 똑바로 보지 않으면 상대가 이야기하는걸 제대로, 있는 그대로 들을 수가 없어요. 아마도 햇살님의 무의식에서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을 때 이런 행동을 하기 시작했을 거예요. 그러다 언젠가부터는 이런 행동이 습관이 되었을 테고요. 


이런 지적을 듣고 나서도 나의 이 습관은 잘 고쳐지지 않아, 아주 여러 번 반복해서 나는 이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나에게 이런 버릇이 생긴 걸까? 

나는 왜 이야기할 때 상대방의 눈을 잘 쳐다보지 않는 걸까? 어쩌다가 잘 듣지도 잘 말하지도 않는 사람이 된 걸까? 


남편이랑 대화할 때는 어땠나 생각해 봤다. 

그래, 우린 평상시에도 일 이야기를 제외하면 대화를 잘하지 않았을뿐더러 대화를 할 때도 서로 눈을 보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누군가 TV를 보고 있거나 핸드폰을 하고 있으면 거기다 대고 이야기를 하거나, 저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각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서로의 의도를 오해하는 경우도 많았고 진짜 속마음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 때도 많았다. 나는 이런 내 대화 습관이 남편과의 관계가 나빠지면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의심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건 오래전부터 내가 가지고 있던 대화 습관이었다. 

난 내가 그런 줄은 모르고 남편이 상대방을 잘 보지 않고 이야기한다, 상대방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는다고 오랫동안 그를 비난해 왔었다. 


그녀들: 양쪽 귀에 통증이 있다고 했죠? 열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진동이 느껴지기도 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귀 통증은 "듣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답니다. 살면서 누군가의 충고나 이야기를 듣기 싫다고 생각한 적 있나요?  


이 질문을 받자마자 바로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엄마.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면서도 나를 가장 화나게 하는 존재.

엄마는 사랑이 아주 아주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자식에게 때에 맞는 맞는 사랑을 주는 방법을 잘 알지 못했다. 엄마 눈에 나는 5~6살의 어린아이로 계속 머물렀고(현재까지도, 엄마는 심지어 내가 지아보다 어리게 보인다고 말했다), 엄마는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보호하고, 지적하고, 고쳐주는 유아기적 사랑 방법을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유지했다. 

나를 결점 없는, 더 나은 사람이 되게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내가 엄마와 함께 있을 때 단 일초도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엄마 입장에서 나에게 필요할 거라고 생각되는 것을 주려고 최선을 다하며 단 한순간도 입을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한다. 

엄마의 잔소리는 아침에 눈을 뜨자 마자부터 뭔가를 먹으라는 말부터 시작되며 외모, 성격, 생활 습관, 자세, 건강 습관, 직장 생활, 건강 문제까지 모든 방면에 걸쳐져 있다. 

나를 어린애 취급하고, 칭찬과 인정에는 인색한 채 항상 내 부족한 부분만 귀신같이 골라내어 나를 바꾸려 하는 엄마의 말들은 잔소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지만 착한(?) 딸이었던 나는 엄마의 사랑에서 비롯된 그 잔소리를 대 놓고 거부할 수는 없었다. 


나는 서서히 엄마의 듣기 싫은 잔소리를 그냥 듣는 둥 마는 둥 흘려들으며 점점 귀를 닫아갔다. 

그러다 엄마의 이야기뿐 아니라 세상 모든 이야기들까지도 제대로 듣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특히 나를 지적하거나 고치려 한다는 느낌이 드는 대화는 무의식에서부터 차단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는 사이 나는 그 누구의 말도 제대로 듣지 않는 독불장군에 교만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던 거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속에서 화가 올라오고 양쪽 귀로 피가 몰리며 찌릿찌릿 통증이 느껴진다. 

그래 귀 통증의 원인은 바로 "듣기 싫어하는 마음, 그로부터 올라오는 화"였다. 



그녀들 : 어머니의 행동과 말에 왜 햇살님은 화가 나나요? 어머니는 어머니의 방식대로 딸을 사랑하는 것일 뿐인데 왜 햇살님은 어머니의 말에 화가 났던 걸까요? 

화의 뿌리는 상대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있어요. 대부분  화는 상대가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 어떤 일이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어리석은 생각과 욕심, 고집 때문에 일어납니다. 내가 옳다는 이 어리석은 생각을 계속 붙잡고 있으면 화가 점점 커집니다. 화가 일어나는데 참으면 정신적으로 엄청난 압력(스트레스)이 생기고 결국 화병이 나게 됩니다. 주로 뒷목이 당기고 머리가 아프며 눈이 침침한 증상이 생깁니다. 햇살님의 증상과 똑같죠? 햇살님은 오랜 시간 동안 이런 어리석음 때문에 화에 휩싸여 자신의 몸을 망치고 있었고, 사람들과 진정한 대화를 하는 법도 배우지 못했네요.  


햇살: 결국 또 내가 문제였던 거군요. T.T. 끊임없이 내가 옳다고 고집하면서 화를 내고 내 몸에 스트레스를 쌓아가고 건강을 해치고, 관계를 망치고 있었던 건 바로 나 자신이었군요.  도대체 어디서부터 바로잡아 가야 하는 걸까요? 


그녀들: 일단 "내가 옳다"는 어리석음부터 해결해야겠지요? 햇살님이 "저 사람은 뭔가 잘못하고 있어" " 저 사람이 이렇게 말을 해서는 안돼" 등  '어떤 사람의 행동이나 사건에 문제가 있다'라고 생각하고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햇살님의 생각일 뿐 진실이 아닙니다. 세상은 있는 그대로 완벽합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가 진실입니다. 그러니 화를 낼 이유가 없는 것이죠. 그렇지만 오랫동안 쌓아온 습관 때문에 자동적으로 화가 올라올 겁니다. 그 화가 나는 순간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아, 내 어리석음 때문에 지금 화가 나는구나. 이건 화를 낼 일이 아니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그 생각을 놓아버리는 거예요. 이렇게 매일매일 조금씩 생각을 놓아버리는 연습을 해 보세요. 또 의식적으로 상대방의 눈을 보며 "잘" 듣는 연습을 해보세요. 내 생각이라는 필터 없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잘 보고 잘 듣는 연습을 하는 거예요. 


그녀들: 지아를 잘 살펴보세요. 지아도 상대방의 눈을 보며 대화하는 걸 어려워해요. 아마 누구에게도 배운 적이 없어서 그럴 겁니다. 햇살님이 바뀌면 지아도 바뀔 거예요. 


햇살: 너무 부끄러운 이야기네요. 나의 이 나쁜 습관을 지아에게까지 물려줘선 안 되죠. 화를 알아차리고, 내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대화할 때 상대방의 눈을 보며 잘 듣기. 알겠어요. 연습해볼게요. 꼭 바꿔볼게요.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훈계하고 잔소리하고 나무랐지만 현실은 아이들이 날이면 날마다 양말을 바닥에 벗어놓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양말이 바닥에 놓여 있지 않기를 바란다면 양말을 주워야 할 사람은 바로 나였습니다. 아이들은 양말이 바닥에 놓여 있어도 아무런 불만이 없었습니다. 
누구에게 문제가 있는가? 나였습니다. 내 삶을 힘들게 한 것은 바닥에 놓인 양말이 아니라, 그 양말에 대한 내 생각들이었습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해결책이 있는가? 역시 나였습니다. 
나는 옳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자유로울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우리의 부모, 아이들, 배우자와 친구들은 우리 내면의 해결되지 않은 모든 문제를 들추려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자신에 대해 알고 싶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기까지 다시, 또다시 도전할 것이 빈다. 그들은 순간순간 우리에게 자유를 선택하는 법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 바이런 케이티, 스트븐 미첼 "네 가지 질문" 중에서 


% 현재 나의 상태 

수치심 20 % : 남의 이야기를 듣기 싫어 귀를 막은 독불장군! 내가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다니. 부끄러워

용기 20% : 원인을 알았으니 해결도 할 수 있어. 난 할 수 있어! 

자발성 30% :내 나쁜 습관을 딸에게까지 물려주진 않겠어 꼭 달라질 거야!

기쁨과 감사 30% : 나에게 이렇게 귀한 시간이 주어진 것이 너무너무 감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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