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제철일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빛 Jan 17. 2024

동지, 성탄, 새해

겨울, 제철일상

  무심코 듣던 라디오에서 무언가를 피처럼 문에 바른다는 이야기가 얼핏 들렸다. 잠깐, 피? 무서운 이야기니 밤에 방송을 할까 하는 진행자의 너스레에 귀가 더 쫑긋해졌다. 겁이 아주 많은 나는 라디오를 꺼버릴까 짧게 고민했다. 하지만 가만히 들어보니 밤이 가장 긴, 그러니까 음기가 가장 강한 동짓날 밤 나쁜 기운을 쫓기 위해 피 대신 붉은 팥죽을 바른다는 이야기였다. 동지를 기념하는 잔치나 달력을 주고받았다는 동지와 관련된 옛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자니 이번 동지는 음력으로 11월 10일이라 '애동지'라는 것이 아닌가. 애동지에는 아이들이 팥죽을 먹으면 좋지 않아서 팥떡을 먹어야 한다고도 했다. 다다를 위해서 내일은 팥떡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동짓날 아침, 다다에게 동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늘은 해님이 일찍 자러 가고 늦게 일어날거래. 밤이 제일 긴 날이야. 길고 캄캄한 밤동안 무서운 호랑이가 돌아다니까 사람들은 호랑이가 무서워하는 팥죽을 먹어야 한대." 다다는 여러 이야기를 섞어 엄마 마음대로 들려주는 동짓날 호랑이 이야기 때문에 잔뜩 긴장하면서도 "왜요? 해님은 왜 자요? 왜 호랑이가 와요? 왜 팥죽을 먹어요?" 하며 열심히 듣는다. 나는 다다가 귀를 기울이고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속으로 푹 빠져드는 다다의 표정을 바라보는 것이 즐겁다. 아직은 9시만 지나도 눈을 비비기 시작하는 27개월 아기를 위해 동짓날 밤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말은 아껴두어야겠다. 내년 동짓날 밤에는 눈썹이 세버릴까 졸음을 이기려 드는 다다의 귀여운 분투를 볼 수 있을 테지. 바쁜 나머지 팥떡은 먹지 못했지만, 내일부터 조금씩 길어질 해가 반갑다.


  동짓날이 지나니 성탄이다. 산타 할아버지는 무서워하지만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는 좋아하는 다다를 위해 일찌감치 크리스마스 장식을 해두었다. 미니 트리와 캐럴이 나오는 나무 오르골, 캠핑장에서 쓰던 알전구와 몇 년 전 만들어둔 가랜드 정도의 소박한 장식이었다. 어린이집에 크리스마스트리가 설치되고 길에서도 반짝이는 전구를 볼 수 있게 되자 다다는 선생님, 친구들, 큰엄마, 할머니에게 "우리 집에도 크리스마스 있어!" 하며 뿌듯하게 자랑을 해댔다. 무슨 선물을 받고 싶냐는 질문에는 어디서 본 지 모를 카봇 장난감이나 뽀로로 자동차를 번갈아가며 답했다. 어린이집에서 배운 듯한 캐럴을 어설프게 흥얼거리는 걸 보니 크리스마스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다다에게도 즐겁고 설레는 날임은 확실해 보였다.


  현실에 찌든 어른 둘의 크리스마스는 처음 몇 년을 빼고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이벤트에 큰 감흥이 없는 것이 꼭 닮은 부부라 여느 날들과 마찬가지인 크리스마스를 보내곤 했다. 하지만 아기가 생기니 크리스마스도 특별한 날이 되었다. 아니, 특별한 날로 만들고 싶어졌다. 어릴 때 온 가족이 함께 외출을 하고 돌아와 산타할아버지가 놓고 갔음이 분명한 선물을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과 행복을 다다에게도 꼭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작년에는 첫 돌이 갓 지나 아무것도 모르는 다다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쳤지만, 올해는 다다도 크리스마스가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 우리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다만 크리스마스 이벤트의 가장 중요한 순간,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을 확인하는 아침의 장면은 하필 친정엄마가 틀어둔 TV 속 푸바오 때문에 미적지근한 반응이 다였지만.


  크리스마스 장식을 다 치우기도 전에 새해가 되었다. 평소에도 떡국을 자주 먹는 가족이라 나이를 먹는 떡국의 의미가 크지 않았다. 12월 31일에 친정에 모여 술을 마시고, 1월 1일 해맞이를 하러 간 동생이 돌아올 쯤에야 일어나 하루종일 100걸음도 걷지 않는 게으른 새해맞이를 몇 년째하고 나니 이상한 무기력감에 새해 첫날부터 아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남편과 나는 내년에는 차박이든 캠핑이든 새해를 보람차게 맞이해 보자는 결심을 했다. 새해 첫 결심이다.


   계획에는 언제나 진심이라 새해 목표는 특히 중요하다. 무려 6개의 영역에 각각 8개의 칸을 만들었다. 일기장에 나의 거창한 신년 계획을 하나 채워 넣으며 남편에게 물었다. "오빠 올해 목표가 뭐야?" 일기장에 해 목표를 쓴다거나, 새해가 되었다고 새로운 다짐을 하는 식의 감성은 없는 무심한 사람인지라 이렇게 물어봐주어야 한다. "나? 몸짱이 되야겠다." 몸짱이라니, 어느 시절 감성인가 대체. 그래도 남편에게 새해 계획이 있음에 박수를 보냈다. 한 달 전 6개월치 헬스장 이용권을 끊어두고 한 번도 가지 않은 남편이지만 남은 5개월치는 잘 이용하길 바라며 내 일기장 한 편에 남편의 결심을 써두었다. 지켜보겠어. 그리고 '가족의 건강'이라는 나의 목표에 한 번 더 밑줄을 그었다.


  동지, 성탄을 보내고 새해가 되었다. 올해도 우리 부부와 다다, 콩가루와 함께 건강한 제철일상을 살아가며 그저 무탈하기만을 바라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메마른 하루에 습기를 더하는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