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니 Nov 05. 2023

금목서

두툼한 이불에서 몸을 일으킨 다음 창호문을 열었다. 차가운 툇마루에 앉아 멍하니 마당을 바라보는데 희미한 향이 흘러들어왔다. 달콤한 과일 같으면서 어딘지 모르게 아련한 향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자 향기는 더 진해졌다. 그 순간 기억들이 동시에 되살아났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가장 좋아했던 그 향을. 


나는 맨발로 슬리퍼를 대충 신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잘 정돈된 나무들 사이로 눈에 익은 한 그루가 보였다. 짧고 얇은 밑줄기 위로 잎사귀가 바가지 머리처럼 동그랗게 난 나무였다. 초록 잎 사이사이에 짙은 주황색 꽃이 촘촘히 박혀있고, 꽃잎은 아침 햇살에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집주인이 긴 빗자루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아주머니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잠자리는 편안했냐고 묻는 주인에게, 온돌이 참 따뜻해서 좋았다고 했다. 


"이 나무 이름이 뭐예요?"

나는 주황꽃 나무를 가리켰다.

"금목서예요. 이맘때쯤 되면 꽃이 피는데 향이 참 좋죠?"

"무척 좋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 리까지 향이 퍼진다고 해서 만리향이라고도 불러요"

나는 금목서, 만리향이라는 단어를 번갈아가며 읊조렸다. 다시 빗질하는 아주머니를 뒤로하고 나무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깊은숨을 마셨다.


오래전부터 이 향을 알고 있었다. 금목서라는 정식 명칭을 알기 한참 전부터.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어렸을 적 동네에서 흔하게 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교문 문방구에서 산 컵떡볶이를 이쑤시개로 찍어 먹으면서 집으로 돌아갈 때도, 친구와 싸우고 서럽게 눈물을 뚝뚝 흘릴 때도 맡았다. 같은 학교 아이를 만날까 조마조마하면서 대중목욕탕에 몰래 들어갈 때도 맡았던 향이었다. 외투가 필요해질 것 같은 시기에 바람에 실려 날아오는 그 향을 나는 좋아했다. 자주 걸음을 멈춰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느 나무에서 오는 건지 찾았다. 나무 이름을 어른들에게 몇 번 물어본 적도 있었으나 이름이 어려웠는지 금방 까먹었다. 대신 향기로 기억했다. 


집 근처 공중목욕탕은 금목서 향을 맡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목욕탕에서 엄마가 동네 아주머니와 만나면 대화가 길어지므로 나는 먼저 밖으로 나가 기다리곤했다. 젖은 머리와 몸을 대충 말리고 목욕탕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면, 차가운 공기와 함께 금목서 향이 실려 왔다. 목욕탕 건물 옆에 있는 한 그루 때문이었다. 다른 동네 나무들보다 유독 향기가 진했는데, 꽃잎 색도 선명했다. 작은 꽃잎을 톡톡 건드리며 바나나 우유를 마저 마시거나 그게 지겨워지면 동네를 구경했다. 오후 거리는 노란 햇빛으로 채워졌고, 동네 사람들은 느긋한 걸음으로 골목을 올라갔다. 나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평온함을 느꼈다.




금목서가 흔한 향이 아니라는 것은 동네를 떠나고 알았다. 고등학교를 먼 곳으로 지원해 익숙한 동네를 떠나 집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기숙사에서 살게 되었다. 그곳에도 바닷바람은 불었지만, 금목서 향은 맡을 수 없었다. 어쩌면 학교와 기숙사를 오가는 생활이 시작되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삼 년을 치열하게 기숙사에서 보낸 뒤 대학생이 되었고, 서울로 올라왔다. 자주 이사했고, 새로운 사람을 사귀었다. 삶은 바쁘게 흘러갔다. 오히려 매연과 먼지 냄새가 익숙해지니, 어린 시절에 맡았던 냄새는 어쩌면 영원히 기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대신 나는 다른 향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스무 살이 되자 향수를 모으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숨이 막힐 듯 짙고 달콤한 향을 좋아했고, 때로는 우아하고 어른스러운 향을 몸에 뿌렸다. 향수병은 점점 늘어나 다른 화장품보다 가짓수가 많아졌다. 어느 순간 평생을 써도 다 뿌리지 못할 향수를 보면서 나는 더 이상 그만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향도 결국엔 오래 좋아하지 못했으므로.




방으로 돌아가보니 남자친구는 아직 온돌방에서 두꺼운 이불을 덮은 채 자고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메모장과 볼펜을 꺼냈다. 금목서, 만리향이라는 단어를 꾹꾹 눌러 적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뒤 다시 툇마루에 앉았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숨을 마음껏 들이켰다. 서늘한 공기에 실려 금목서 향이 흘러들어왔다. 눈을 감고 목욕탕집 옆에 있었던 나무를 떠올렸다. 이제 더 이상 가지 않는 그 동네의 나무를. 여전히 잘 자라고 있을까, 아니면 없어져 버렸을까 생각하면서.

매거진의 이전글 나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발견하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