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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하 Apr 20. 2023

세월의 흔적처럼 주름진 알루미늄 튜브



드디어 다 썼다. 2020년 12월 23일 도착한 150그램 짜리 록시땅 핸드크림말이다. 꼬박 2년을 넘게 사용했다. 내 돈을 주고 산 첫 핸드크림. 2020년 겨울이 되어 왼손 엄지 옆이 거칠어졌다. 손이 텄다. 찬바람 쏘인 적도 없는데 손이 텄다고 중얼거리자 아내가 "나이 먹어서 그래"라고 대답했다. "커다란 흰 통에 든 크림을 발라."라고 보탰다. 생각해 보니 몇 해 전부터 찬바람 불면 집에 있는 핸드크림을 발랐다. 


튼손에 대한 기억이 있다. 시간만 나면 골목에 나가 놀던 어린 시절 손이 금방 텄다. 그러면 뜨거운 물에 손을 불리고 글리세린을 발랐다. 신기하게 갈라진 손이 고와지는 걸 목격했다. 겨울이면 손이 텄다. 늘 바쁜 어머니는 아들 손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 손에 대한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졸업식 때였는데 상장을 받으려고 장갑을 벗으니 손이 터 있는 걸 발견했다. 얼른 장갑을 꼈다. 그래서 초등학교 졸업 사진에는 장갑낀 손만 나온다. 행복해 보이는 중산층 사립국민학교 졸업식 사진에 손이 터서 장갑을 낀 주인공의 모습. 아무도 뒷 이야기를 모른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밑바닥에서 날 괴롭힌다. 그래서 손에 민감해졌다. 


아무튼 2020년 겨울의 나는 핸드크림을 검색했다. '튼손 핸드크림'으로 검색하니 '니베아 파란통'이 나온다. 기억난다. 1월 군번이어서 훈련소에서 니베아 파란통을 쓴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이상하게 니베아 파란통은 군대 기억을 소환한다. 훈련소가 아니었으면 부대에서 썼을 것 같다. 패스. 


검색목록을 보다 보니 록시땅이 나온다. 전직장에서 출장을 갔을 때 보스가 '핸드크림'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비행기 내부 면세점에서 록시땅 핸드크림을 샀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반짝이는 은빛 플라스틱 튜브의 구겨짐이 조형적으로 좋았다. 거칠게 늙어가는 주름처럼 보였다. 플라스틱 포장보다 종이 포장, 금속 포장이 정겹다. 플라스틱 포장은 원형으로 금방 돌아오고, 종이와 금속은 흔적이 남는다. 좋아하는 허브 냄새를 소환하며, 과감하게 구매를 눌렀다. 그래, 이 정도는 플렉스할 수 있잖아? 


며칠 뒤, 꽤 큰 박스가 도착했다. 생각보다 훨씬 더 크다. 150그람이라는 용량에 대해서 무지했다. 생각보다 큰 록시땅 핸드크림을 가방 안에 넣고 다니기는 꽤 무겁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서 일일공부 제대로 안풀고 만화만 보고 버린게 죄다.


페이스북에 위 글을 남겼다. 며칠 뒤 성탄절. 가족 성탄 선물교환식에 머플러를 받고, 살짝 고무된 상태에서 록시땅 핸드크림 구매에 대해 고백했다. 


"핸드크림 새거 3개나 있다고 말했잖아?" 

"어디에 있는데?"

"세면대 밑에."


들은 것도 같고, 못들은 것도 같지만, 아내는 분명 말했을 것이다. 차마 150그램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페이스북 친구들의 격려와 사뭇 다른 반응이다.사무실에서 사용하다, 가방에 넣고 다니다, 집 세면대 옆에도 있다가, 자동차에도 두던 핸드크림을 다 썼다. 초등학교 시절 혼자 골목에서 놀다 튼손으로 졸업식에 가야했던 기억과 능숙하지 못한 쇼핑의 추억과 세월의 흔적처럼 주름진 알루미늄 튜브를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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