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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하 Apr 05. 2023

상처와 흉터

왼손 중지와 약지에 흉터가 있다. 벌써 오래된 일인데, 흉터는 여전하다. 나와 둘째는 수박을 즐기고, 아내와 첫째는 아니다. 그러니 늘 내가 수박을 잘랐다. 그날도 잘 드는 칼을 꺼내 수박을 잘랐다. 그러다 칼날이 수박을 잡은 왼손 중지와 약지를 지나갔다. 순식간에 살점이 떨어졌다. 아픈 줄도 몰랐는데 피가 나니 손가락을 부여잡고 동네 병원으로 뛰어갔다.


의사가 물었다. “뭐 하다 다쳤어요?”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수박 자르다가요.” 의외로 의사는 담담하게 말했다. “수박 자르다가 다치는 분들 많아요 조심하셔야지. 중지는 안붙을 수도 있겠는데요?”라며 거칠게 꿰맸다. 다행히 중지와 약지 모두 떨어진 살이 붙었다. 하지만 붙고 난 자리가 이전과 달랐다. 떨어졌다 붙은 살은 부풀어 올랐고, 느낌도 달랐다. 남에 살 같은 손가락을 만지면 수박과 손가락을 같이 자르던 그 날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저 찌릿한 느낌의 상처만 남았다.

 

몸에 남은 흉터는 구체적이다. 원인도, 결과도 명확하다. 나는 왼손 중지와 약지의 흉터가 왜 생겼는지 잘 알고 있다. ‘조심해야 되겠다’라는 교훈을 주지 공포를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마음에 남은 흉터는 종잡을 수 없다. 흉터를 남긴 상처가 왜 생겼는지, 그리고 어떻게 흉터로 아물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상처와 흉터의 경계조차 희미하다. 이쯤이면 흉터로 남았겠지 한 상처가 어느 순간 문득 선명하게 드러난다. 오래 묵은 상처가 흉터로 남지 못하고, 오늘도 나를 아프게 한다. 


내 마음에 남은 상처는 어머니가 없는 집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늘 바빴다. 나는 빈 집에 혼자 있었고, 스스로 어설프게 식사를 준비했다. 연탄도 갈았고, 탄이 꺼지면 번개탄을 피워 살리는 것도 배웠다. 아버지가 사다 주신 만화를 보고, 내가 사온 싸구려 조립식(요즘은 프라모델이라 부른다)을 만들었다. 공부하라는 잔소리가 없는 집은 즐거웠지만, 그것만으로 채워지지 않을 뭔가가 있었던 것 같다.  


유년시절의 기억들이 대부분 희미한데, 또렷히 사라지지 않은 기억이 하나 있다. 86번 종점 부근 면목동 집에서 새서울 극장까지 걸어가 친구와 '공포영화'를 보기로 한 날이었던 것 같다. 공포영화를 봤는지, 아니면 쫓겨났는지 기억이 희미하다. 함께 간 친구 이름은 박철이었고, 우린 초등, 아니 국민학교 2학년생이었다. 쫓겨났다. 확실하다. 영화를 보려다 못본 우리는 억울한 마음에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친구와 헤어지고 집으로 걸어오다 문방구 바깥에 조립식 빈상자가 쌓여있었다. 당시 문방구는 도난을 방지하기위해 조립식 빈상자를 바깥에 쌓아놓았고, 손님들은 거기서 빈상자를 보고 아저씨에게 어떤 제품을 달라 이야기하는 시스템이었다. 갑자기 빈상자가 탐이났다. 정확히 수정하자면 조립식이 갖고 싶었다. 하지만 난 집에서 용돈을 받지 못했다. 그때는 당연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억울하다. 서울에 사는 중산층이었는데, 난 왜 용돈 한번 제대로 받지 못했을까. 초등학교 다닐 때 조립식이 갖고 싶어 친구를 따라 신문배달을 할 생각을 하고 시범적으로 몇 번 따라나가보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 조립식을 훔칠 수 없다는 윤리의식이 강했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빈상자는 괜찮겠지?'라고 생각했을 거고. 집으로 가 유치원에 다니는 동생을 데려와 망을 보라 시켰다. 조심스럽게 빈상자를 꺼냈다. 빈상자 몇개를 들고 가던 중 주인 아저씨가 나왔다. 나는 도망쳤지만 동생이 붙들렸다. 어머니를 데려오라는 엄포를 남기고 주인 아저씨가 문방구로 들어갔다. 


엄마는 늘 집에 안계셨기 때문에 ‘엄마가 집에 계실까?’ 한가득 걱정을 안고 집에 돌아갔다. 다행히 어머니가 집에 계셨다. 어머니에게 문방구에 동생이 있다고 말했고, 어머니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문방구로 갔다. 어머니는 동생을 데려왔다.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종아리를 맞았다. 나에 대한 관심의 최대치였던 것 같다. 

장일호『슬픔의 방문』(낮은산, 2022년)에 “다음 생엔 내가 엄마의 엄마가 되겠노라고.”(28쪽)라는 문장이 있다. 다음 생이 있다면 나도 엄마의 엄마가 되고 싶다. 그래서 사랑이란건 무엇인지, 자식과 어떻게 눈을 마주쳐야 하는지, 어떻게 대화를 나눠야하는지 알려주고 싶다. 하지만 불가능하겠지. 난 자꾸 상처와 흉터를 만지고만 있겠지.  


또 하나 남은 초등학교 때 기억이 있다. 5, 6학년 때인 듯 한데, 아침에 아파서 주번을 못했던 날이다. 아픈 몸에도 친구와 웃고 떠들었는데 나를 본 담임 선생님이 말했다. “아프다더니 거짓말만 하고 왜 그모양이니?” 다른 선생님 얼굴은 다 기억나지 않는데, 깡마르고 날카로운 선생님 얼굴만 선명하다. 왜 좋았던 다른 기억들을 모조리 희미해졌는데, 빈 조립식 종이상자를 꺼내다 들키는 그 장면만 선명할까. 나를 경멸하듯 바라보며 내뱉은 선생님의 말과 표정은 지워지지 않을까. 이제는 그만 놓아도 될 것 같은데. 안쓰러운 국민학교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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