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경희 May 03. 2023

감성이 묻어나는 오타루

일본 소도시 31  나를 찾아가는 오타루 여행

 3월이 끝나갈 무렵, 각국의 해외여행 제한도 이미 풀렸고, 항공권을 사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아직 눈이 남아있어야 하는 삿포로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제주항공을 이용, 신치토세 공항에 도착했다. 4일 이용 가능한 jr 삿포로 노보리베쓰 패스를 교환하는데, jr 타워 입장권과 음료 및 케이크 세트를 덤으로 얹어주었다.  외국인 대상 특별 할인행사라고 하는데 간혹 만나는 행운이다.


 삿포로 역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창 밖을 바라보니 곳곳에  자작나무들이 둘러서있고, 하늘은 한층 가까이 다가온 듯한 풍경이었다. 홋카이도 지역은 많은 눈으로 인해 지표층에 수분 유지가 잘 되어 촉촉하고 비옥한 토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 40여 분만에 도착, 역에서 400미터 거리에 위치한 숙소는 삿포로 대학 정문 바로 앞에 있어 며칠 지내기에는 괜찮았다.  호텔 싱글룸은 작고 아담했지만, 필요한 것은 다 갖추고 있었다.


숙소에서 보이는 삿포로대학



 캐리어를 내려놓고 삿포로 역으로 돌아와, jr 쾌속 오타루행  기차를 탔다. 기차는 이시카리만 해안선을 끼고 꿈틀꿈틀 바다를 달리고 있었다. 무척이나 잔잔하고도 여유로운 바다 위로 '윤희에게'라는 영화의 주인공, 윤희와 쥰의 덤덤했던 표정이 교차되고 있었다. 윤희와 그녀의 딸 새봄이  오타루를 향하던  그곳을 지나가는 중이었다.    


해안을 따라 달리는 오타루행 기차
윤희에게-영화 포스터


 약 30분 만에 미나미 오타루 역에 도착, 눈 쌓인 도로를 따라 슬슬 바닷가 쪽으로 걸어가는데, 더  북쪽이라 그런지 바람이 불어서 그런지 추위가 밀려왔다. 150미터 정도 걸어가니 붉은 흙에서 유래했다는 아카사카 언덕길이 보이고, 오른편에 뷰가 아름다운 야마노카미 언덕이 나왔다. 일본 감성이 묻어나는 도로는 언덕 아래로 이어졌다.

 다시, 왼편으로 500미터 정도를 걸어 세 그루의 큰 나무에서 유래했다는 산본기 비탈을 걸어가는데 크게 가파르지 않았다. 눈이 오면 언덕을 오를 수 없었던 이곳을 메이지 시대에 2회에 걸쳐 경사를 낮춰주었다고 한다. 도로표지판에는 급경사라고 되어있는데 표지판 위에는 경사 8도라고 표시되어 나름 재미있는 곳이다.


산본기 비탈길



 한 통의 편지에 잊고 지냈던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리고, 오타루의 언덕길을 걷던 윤희의 느릿한 걸음에 담긴 외로움의 무게는 얼마 만큼일까...... 자신을 놓아버리고 살아가던 그녀가  조금씩 생기를 찾기 시작한 순간이라고 여겼다. 하얀 눈 위를 반사하는 빛이 반짝이는 순간처럼 말이다.  


하얀 눈 위를 걷는 윤희에게 영화 속 장면



 메르헨 교차로 맞은편 사거리 올나이트 석등 램프가 원형의 받침대 위에 네모난 모양으로 세워져 있고 아치형의 창 내부에 조명이 켜져 있다. 원래는 목조 등대로 사람들의 길잡이 역할을 했으나 석등으로 재현되어 사카이 마치 사거리의 상징이 되고 있다.

 하얀 벽돌에 아치형 창문 부위만 붉은 벽돌을 얹고 초콜릿 모양의 장식을 새긴 유럽풍의 원기둥 건물은 바로 르타오 본점! 입구는 초록색으로 꾸며져 있고 매장에는 다양하고 예쁜 쿠키와 케이크가 전시되어 있다. 입안에서 밀키 한 맛과 함께 사르르 녹아내리는 치즈 케이크 ‘더블 프로마쥬’로 유명한 르타오. 1998년 초콜릿 제조 도매업을 하던 회사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오타루의 디저트가 될 정도로 유명한 곳이 되었다.


유럽풍 건물 르타오 본점
석등 램프와 맞은편 오르골당, 증기시계



이어 사카이 마치 혼도리에 자리 잡은 오르골당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 민가를 형상화한 듯한 초록 지붕에 회색 벽돌로 지어진 건물 이다. 아치형의 창문들이 있고, 정면 입구 왼편에 증기 시계가 우아하게 서 있었다. 높이 5.5m, 폭 1m, 무게 1.5톤, 세계 최대 크기이다. 보일러로 발생시킨 증기의 힘을 이용해 15분 간격으로 상단에 있는 5개의 기적이 5음계의 멜로디를 연주한다. 1898년 오타루 오르골당이 문을 열고, 증기시계의 하얀 증기가 위로 뿜어져 나올 때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러 많은 여행객이 찾는 국제적인 명소가 되었다.      


오르골당 입구 증기시계



오르골당은 1989년 3월 29일, 오타루시 지정 역사적 건축물로 등록되었는데 장식으로 꾸며진 천장과 손잡이, 2층 회랑 등은 건축된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이곳은 장인의 손에 의해 다양한 스타일의 탁상용 오르골이 판매되는 일본 최대 규모의 오르골 전문점이다.      

입구에 들어서자 네모난 기둥과 벽면, 천장이 목조로 되어있어 편안함을 준다. 그 사이로 5,000종류, 상품 수로는 약 80,000점 이상의 오르골이 전시 중이다. 가지런하게 놓여있는 예쁜 색감의 오르골 사이로 소원성취 네코가 두 손을 들고 반기는 모습이 귀엽다. 보석상자를 비롯하여 증기시계, 붉은 후지산, 천사, 회전목마, 인형, 초밥 모양 등 종류와 재질도 다양하다.  2층 복도에서 바라보니 수많은 빛과 음악으로 가득 찬 공간이 만화 속 세상처럼 환상적이다. 3층에는 멜로디와 오르골의 기본 파트를 각각 선택해 만들 수 있는 ‘이지 오더’ 코너가 있다.   

    

오르골당 내부



점점 어두워지는 사카이 마치 거리의 풍경, 은은한 조명들이 불을 밝히고 있는 거리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다이쇼 유리관에 들러 색색으로 꾸며진 납작한 유리 접시와 학의 부리처럼 긴 주둥이 모양을 한 유리등을 구입했다. 스태인드 글라스 뮤지엄은 문을 닫아 내부를 보지 못하고 바로 운하로 향했다.


 1,872년 홋카이도 최초의 부두가 완성된 오타루는 외국과의 무역이 활발했던 곳. 오타루항에서 취급하는 화물의 양이 많아지자, 선박이 창고 근처까지 갈 수 있도록 건설한 수로이다. 운하는 이후 내륙교통의 발달과 인구 감소로 등의 영향으로 화물의 양이 줄어드는 바람에 쇠퇴했다. 80년대 이곳에서 운하 재생 운동이 일어났고, 오타루 운하는 지금처럼 정비되었다. 이곳은 일본에서 대표적인 도시 재생 사례로 꼽히며, 항구의 이국적인 풍경과 메이지 말기 건축물이 잘 보존되어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소박하고 정겨운 감성을 가진 오타루는 매년 2월 눈 축제를 열고 있다. 십만이 넘는 유리병 속 촛불은 수면에 반사되어 더욱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어 낸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대신 웅장한 석조 건물 88개와 감성을 자극하는 가스등 63개가 길게 늘어서 운치를 더했다.  운하를 따라 슬슬 걷다 보니 1,140m, 왼편에 북일본 창고 항운이라 쓰인 글자가 이곳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고, 그 앞에는 크루즈를 타려고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오타루 밤의 운하와 유람선



 1KM 정도를 걸어 반대편 아사쿠사 브릿지에 가니 사람들이 제법 모여있다.  청아한 감상에 젖어있는데 나고야에서 여행 온 여대생 세 명이 웃으며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말을 걸어왔다. 삿포로와 오타루는 일본인들이 참 좋아하는 여행지라고 소개하면서... 여행자들에게는 각자의 국적이 의미가 없다. 함께 느끼는 마음, 도와주는 센스, 정보를 알려주는 그 자체가 여행의 묘미이다.  


오타루운하 아사쿠사 브릿지에서
아사쿠사브릿지-영화 '윤희에게' 장면


  엄마의 첫사랑을 찾기 위한  따뜻한 동행을 담은 이 영화 속에서 20년 만에 만나 안부를 묻는 담담한 한 마디, 윤희야, 잘 지내니?' 오랫동안 이렇게 묻고 싶었어..

 딸 새봄의 노력으로 둘의 만남이 성사되어 서로를 바라보던  그 장소가 바로 아사쿠사 브릿지였다. 한일 두 중년 여성의 섬세한 감성을 담은 이 장면을 보고 가슴에 온기가 퍼져나가던 순간과 느낌을 기억하며, 나는 그곳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오타루 운하에서 만나는 영화 '윤희에게'



춥기도 하고 어두워지려 해서 주오거리를 따라 오타루 역으로 돌아가는 길, 오타루 문화센터 앞에 테미야 라인 기찻길이 보였다. 홋카이도 최초의 철도가 폐선이 되어도 선로나 역의 일부가 남아 있고, 가볍게 선로 위를 걸을 수 있다.                         


테미야 라인



  오타루역에서 삼각시장 쪽에서 250미터 정도 왼쪽으로 올라가면 이와이슌지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의 촬영지 중 후나미자카 언덕이 나온다. 우체부가 오토바이를 타고 언덕길을 오르는 바로 그곳. 감성이 묻어나는 그 언덕 아래에는 바다가 배경이었다. 어두워져서 그 감성을 느끼기는 아쉬웠지만, 발걸음을 남기고 왔다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영화 러브레터  후나미자카 언덕



운하에서 주오거리를 따라 10분 정도 걸으면 오타루 역이 나온다. 하코다테본선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오타루 역사 건물은 1880년에 만들어졌다. 100년 이상의 긴 역사를 갖고 있어 일본 국가등록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플랫폼에 들어서니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역의 플랫폼에 세워져 있던 가스등! 유리병 램프에 불이 켜져 은은하게 다가오는 가스등의 향수. 그 추웠던 겨울을 감싸주던 뮌헨의 가스등 켜진 밤거리를 생각나게 했다. 감성에 젖어 옆에 있던 일본인에게 부탁해서 플랫폼 가스등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을 수 있었다.


오타루 기차역의 가스등

      

삿포로로 돌아오는 기차 역시 바다를 끼고 다시 그 길을 돌아오고 있었다. 돌이켜보니 일본 소도시 여행이 3년 만에 다시 시작되었다. 백신 확인이라는 과정이 있지만, 그래도 소도시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4계절의 오타루는 풍경이 모두 다르겠지만, 내게는 겨울풍경이 더 매력적이다. 눈과 추위의 차가운 이성을 은은하고 따뜻한 가스등의 감성으로 어루만져주는 기분이 들어서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