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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 강물처럼 May 07. 2020

그 많은 뽕나무는 어디로 갔을까.

50대 아재가 사는 이야기

  

  봄이 절정이다. 섬진강 굽이굽이마다 장대한 풍경이 펼쳐진다. 푸르스름한 물줄기가 초록빛 풀들 사이로 힘차게 빠져나간다. 산자락마다 나무들이 일제히 머리를 풀어헤치고, 길가에 늘어선 벚나무는 마지막 꽃잎을 털어내고 있다. 마을 어귀 늙은 괴목나무는 기지개를 켜며 하늘을 향해 새 살을 토해 낸다. 들녘에는 농부들의 써레질이 한창이다. 부지깽이를 거꾸로 꽂아놔도 새싹이 난다는 4월이다. 나는 지금 처가에 가고 있다.    


  대학시절,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고 그 글의 배경이 된 섬진강, 지리산, 회문산 자락을 되짚어 걸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다. 마지막 빨치산의 은신처인 지리산에서 회문산으로 가는 산골에 아내가 태어난 곳, 나의 처가가 있다. 동네 경로당 옆으로 담장을 따라 언덕길을 올라서면 오른쪽에 친숙한 대문이 보인다.  <이 영 숙>. 문패에 세련된 장모님 이름이 있다.  반갑게 맞아 주시는 장모님, 아. 장모님은 한 팔에 안길 만큼 작아지셨다.

“어서들 와, 생각보다 빨리 왔네 잉~”
얼굴 가득 주름 꽃 사이로 함박 미소가 피어올랐다. 순박하고 정겨운 우리 장모님. 벌써부터 저녁 준비에 분주하시다.    


 

  트렁크에서 접이식 자전거를 꺼내 아들을 태우고 동네를 휘 둘러본다. 40여 호가 넘는 큰 마을인데 한적하다. 군데군데 허물어진 빈 집과 공터가 전보다 많이 늘었다. 두 바퀴를 돌았는데도 인적이 없다. 이번엔 아들이 물수제비 하러 가자고 성화다. 마을 앞으로 큰 물이 지난다. 이 물은 섬진강과 만나 서해로 빠져나간다. 큰 물을 가로지르는 제방을 겸한 다리가 있다. 우리들의 놀이터다.


“아빠, 우리 여기에서 물놀이 했었는데” 어느 해인가. 아들과 다리 밑, 제법 물살이 센 곳에서 스릴 있게 놀았던 것을 아들이 기억한다. 명우 엄마가 알면 기겁할 일이다. 우리 부자만의 비밀이다. 나는 이곳에 올 때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이 떠오른다. 얕은 강물에 찬란하게 햇살이 쏟아지고, 아버지와 아들은 긴 낚시 줄을 휘감아 던진다. 아름답고 뭉클한 장면이다. 

물수제비를 계속하기에는 어깨가 아팠다. 나이 탓일까.    

  집에 돌아왔다. 그 사이 저녁상이 차려져 있다. 된장 버무린 머우대와 미나리, 시금치, 두릅, 민들레 무침, 불고기, 상추와 쌈장, 쑥국이 밥상 한 가득이다. 갓 지은 쌀밥이 마지막으로 올라온다. 불그스름하면서 도톰하게 익은 김치전은 외손자를 위한 장모님의 특별 메뉴. 장모님은 대체 언제부터 준비하신 것일까. 30년째 미스터리다.

행복한 저녁이다.

  장모님은 요즘 다리가 불편하다고 하신다. 곧 80이시다. 그렇다. 장모님도 세월의 무게에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하지만 장모님은 여전히 '뚝딱' 마술사다. 장가들고 처가에 신행 왔을 때 마을 청년들이 내 발목을 광목 끈으로 매달았다. 홍두깨로 발바닥을 치면서 “사위 죽는데 뭐하냐”라고 으름장을 놓으면 장모님은 '뚝딱' 음식을 내오신다. 화수분이다. 끝도 없이 나왔다. 미스터리가 시작된 날이었다. 또 빚은 술을 청년들에게 한 대접씩 따라주며 '우리 사위 그만 놔주라'라고. 언제나 든든한 내 편이 되셨던 분이다.  


  오랜만에 엄마를 만난 아내는 부지런하다. 엄마를 위하는 그 마음을 안다. 그런 아내가 나는 예쁘다. 나는 설거지, 아내는 정리한다. 살다 보면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우리 부부의 오래된 관행(?)이다.     

  이제 건너 방에 서재를 꾸밀 시간이다. 소중한 나의 글쓰기 루틴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침 장롱 사이에 작은 밥상이 있다. 성스러운 의식을 준비하듯 정성스럽게 물티슈로 닦는다. 정갈한 밥상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는다. 그 옆에 차 한 잔까지. 이제 나의 소박한 서재가 완성되었다. 책상에 앉으니 미소가 그려진다. 마치 작가가 글 쓰려고 소란한 도시를 떠나 깊은 산속에 온 듯. 이래저래 나는 횡재한 것 같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기둥에 절을 한다고 했다. 당장 달려가 기둥에 절하고 싶은 심정이다.


  누군가 깊은 산골, 연기 피어나는 집에 장가들고 싶다고 했던가? 내가 그랬었다. 아궁이에 불 때면 펄펄 끓는 구들이 있는 아늑한 집, 뒷산이 마을을 폭 감싸고, 앞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면 했다. 나중에 처가에 가보니 딱 그랬다. (아쉬운 것은 산골이라 앞에도 첩첩 산이 있다는 사실만 빼고.) 처가에 처음 간 날이 생각난다. 함께 지리산 등반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침 고향집이 '순창'이라고 해서 운전대를 돌려 막무가내로 들이닥쳤다. 어차피 휴대폰도 없었으니 미리 연락도 할 수 없었다. 결혼할 사람인데 뭐 어떠랴 싶었다. 물론 내 꿍꿍이였다(이런 불한당 같으니라고.)

  때는 농사로 분주한 1993년 8월이었다. 시골이라고는 들었지만 이런 산골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포장도로가 있어서 망정이지 하늘 아래 첫 동네, 뭐 그런 느낌이었다. 도시스럽고 이국적이며 아름답기까지 한 아내 -실제로 아내는 미인이다! - 가 태어난 곳이라고는 절대 믿을 수 없는 곳이었다. 마을 가운데 솟을대문이 있는 집이었다. 막상 집 앞에 도착하자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호기 있게 집안에 들어서는데 마당에 계신 장인어른과 눈이 딱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이것은 정녕 폴더 인사였다.  방에 들어가 다짜고짜 큰 절을 올렸다. “결혼하고 싶습니다.” 당황하시는 장인어른, 황당해하시는 장모님.
순박한 두 분을 그렇게 처음 뵈었다.     


  장인어른은 아내가 늦둥이 아들을 임신했을 때 돌아가셨으니 꼭 10년 되었다. 전쟁 난리통에 형을 잃고 당신은 오른팔에 총을 맞으셨다고 했다. 작은 체구에 힘을 없으셨지만 부지런함과 정직함으로 살림을 일으키셨다. 초등학교 졸업이 배움의 전부지만 경제신문을 보고 주식투자를 하여 수익을 내셨다니.. 여름에는 누에 치고 한봉꿀이며 매실이며 밤을 거두었고, 겨울이면 조청이며 고추장이며 한과를 만들었다. 그렇게 다섯 자매를 키우고 가르치셨다. 자식농사가 더 풍성한 두 분이다. 

  나는 둘째 사위다. 누에 치는 한여름이면 집 앞 뽕나무를 척척 쳐서 경운기로 실어 날랐다. 일도 곧잘 거들고 잘 먹고 소탈해서였을까.  두 분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나의 삶이 어찌 평탄하기만 했을까? 내가 멀쩡한 회사 그만두었을 때, 불교 공부한답시고 머리 깎고 산에 들어갔을 때는 원망도 많았으리라. 하지만 묵묵히 지켜봐 주셨던 두 분이다.


30년 세월이 지나면서 처가는 두 번째 고향이 되었다. 하룻밤을 보내고 혼자 계시는 장모님을 두고 떠난다. 시간은 사람도, 집도, 인정도 모든 것을 떠나보낸다. 돌아서는데 문득 댓돌 위에 장모님 고무신이 눈에 밟힌다.

그리움일까. 애틋함일까.



  그나저나 그 많던 뽕나무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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