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달까지 걸어가면 얼마나 걸려?
“엄마, 사람이 말이야, 그럴 수는 없겠지만, 만약에 말이야, 달까지 걸어간다면 얼마나 걸릴까?” “글쎄, 엄마도 모르겠네. 들어가서 책을 찾아볼까? 그러면 산책은 여기까지 해야 될 거 같은데, 채린이는 어떻게 하고 싶어?” “집에 갈래! 궁금해!”
선선한 바람이 불어보는 맑은 가을 밤이었다. 엄마의 등에 업힌 채 산책을 하던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저 빛나는 달까지 걸어간다면 며칠이나 걸릴까? 그 좋아하는 밤산책을 포기할 정도로 나의 궁금증은 거대했다. 곧장 집으로 달려가서는 엄마의 옆에 바싹 달라붙어 백과사전을 곁눈질했다. 달까지의 거리는 그때 당시의 나로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큰 숫자였다. (궁금해하실 독자분들 위해 설명하자면, 지구와 달의 거리는 384,000km 라고 한다.) 다행히 숫자에 약한 나 같은 어린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백과사전에서는 다양한 이동 수단을 이용하여 달까지 도착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한 그래프 자료를 첨부해주었는데, 그에 의하면 한숨도 자지 않고 꾸준히 걸어갈 경우에 11 년이 걸린다고 했다.
“엄마 나는 아직 7 살도 못 살았는데 11 년을 걸어야 한대!”
여섯 살 아이에게 11 년이란 제 나이의 두배 가까이 되는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쉬지 않고 자동차를 몰아도 145일이 걸린다는 말에 나의 눈은 점점 보름달처럼 동그래졌다. 나는 11 년을 꼬박 걸을 자신이 없었다. 145일 동안 가만히 자동차에 앉아있는 것 역시 괴로울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인내해도 고작 달에 닿는다니, 명왕성은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 우주의 위대함이 처음 내 안에 깃든 순간이었다.
달과 나 사이의 거리를 체감하던 날 이후로 내 꿈은 천체 물리학자가 되었다. 흔히들 어린 아이의 상상력엔 한계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우주는 상상을 초월해 존재했다. 우주의 광활함을 알아버린 이상 그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까지 우주와 별을 향한 나의 열망은 이어졌다. 매년 달력을 받으면 가장 중요한 일은 생일을 체크하는 것이 아니라 유성우가 떨어지는 주간을 체크하는 것이었다. 때가 다가오면 마당에 나만의 천문 기지를 세웠다. 바로 돗자리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있으면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별들이 쏟아졌다. 특히나 좋아하던 유성우는 한여름의 페르세우스 자리 유성우였다. 축축한 풀냄새와 벌레 소리, 번뜩이며 타오르는 별똥별. 고흐에게 별이 빛나는 밤이 있다면, 나의 유년기엔 별이 타오르는 밤이 있다.
하지만 난 천체 물리학자의 꿈을 11 살 나이에 빠르게 포기하게 된다. 그건 바로 2004년에 개최된 ‘제 17차 일반 상대성 이론과 중력에 관한 국제회의’ 때문이었다. 당시 내가 가장 존경하던 사람은 스티븐 호킹 박사였다. 나의 우상이었던 호킹 박사는 저 회의를 통해 자신의 블랙홀 이론을 전면 수정하며(2014년에 또 다시 수정했다.) 오류를 인정했다. 어린이용 과학 잡지를 구독하며 이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접한 나는 “호킹 박사처럼 위대한 사람도 자신의 이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걸 보니 난 안 되겠군!” 하고 돌연 현실에 눈을 뜨고 말았다. 여전히 어린 나이였지만 이미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깨달은 참이었다. 밤하늘을 들여다보며 자랐건만 냉소적인 성격이었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오랜 시간 품어왔던 꿈을 떠나보내는 건 꽤 가슴 아픈 경험이었다. 그러나 신비로 가득 찬 우주에서 나의 고민이란 한 점 먼지에 불과할 거라고 생각하니 위로가 되었다. 천체 간의 상호 작용을 연구하지 못 한다고 해서 그것이 별을 사랑하지 못 할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지구는 여전히 공전했고, 어김없이 찾아온 여름에 나는 마당에 나가 돗자리를 폈다. 꿈은 지고, 별은 타올랐다.
[1]
명왕성이 아직 그 이름을 잃기 전의 일이다. 여섯 살인 내가 아는 가장 먼 행성은 명왕성과 그의 위성 카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