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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승무원 Nov 10. 2020

기내 방송사고를 내버렸다

청도행 동기 비행

실수를 해버렸다 . 그것도 나의 동기앞에서


승무원은 안전, 서비스 이외에도 ‘기내방송’을 하게 된다. 국내의 경우 사무장과 같은 높은 직급의 소유자에게 해당되겠지만 우리 회사의 경우 한/중/영 세 가지로 나뉘어 한중 비행에서만  한국 승무원이 한국어방송을 진행하면 되었다. 방송 자격은 ‘선배’가 우선이다.


그날은 제일 친한 동기와 청도 1박 2일의 동기 비행이 떴고 나는 A320 #4호를 맡았다. 에어버스 320의 작은 기종 4호는 한마디로  ‘개꿀’ 호수다! 5호와 달리 문조작을 하지 않아도 되고 비상구 좌석 손님들과 객실만 담당하면 된다. 심지어 갤리 안쪽에 넓은 점프싯에 나 홀로 편안히 ‘쪽잠’을 잘 수 있는 은밀한 공간이기도 하다.

이날은 같은 기수의 동기 비행이었으므로 너무나 편안하게 일을 시작했다. 서로 어피도 체크해주고 맘껏 여유를 부리며 승객 보딩 방송과 함께 급히 주머니 안쪽에 넣어둔 작은 기내방송 수첩을 꺼냈다.


손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희 동방항공을 탑승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비행기는 MUXXX 편이며——-(푸흡)”


그때였다.

방송 도중 친한 동기와 잠깐 눈이 마주쳤고 얼굴을 보자마자 갑자기 미친 듯이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어떡해... 웃음이 멈추질 않아!!!!!’


큰일 났다.

자꾸만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고 , 목소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더니 발음도 이상해지고 호흡도 가빠지기시작했다. 웬 신입 초짜 나부랭이가 비행 첫날 선배 앞에서 긴장이라도 하는 듯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내 방송은 정말이지 거지 같았다! 젤 친한 동기 앞이라 더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는데 너무 긴장이 풀린 탓이었는지 한번 터진 웃음은 당최 멈출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 손으론 기내방송을 읽고 한 손으론 동기에게 재빨리 손을 내저으며 뒤돌아서 있으라는 암호를 보냈다. 다시 차분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안전검사 방송을 이어나가려던 찰나 저 멀리서 혼자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참고 있는 동기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어깨춤을 추는 모습에 내 입꼬리도 다시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안돼... 사무장님이 지켜보고 있다... 내일 돌아오는 비행에서 혼나려면 어쩌려고.. 정신 차려!!!!’


다행히 저 멀리서 다가오고 계신 사무장님의 범접할 수 없는 풍채와 아우라 덕분에? 동기의 시야가 가려졌고 재빨리 마지막 멘트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분공사행 사무장님들의 포스는 좀 많이 무섭다... 나를 힐-끔 쳐다보시더니 다시 앞 갤리로 돌아가시는 뒷모습까지 보며 그제야 참아왔던 한숨을 내쉬었다. 10여 분간의 시간 동안 정말이지 이렇게 스펙터클할 수 있다니..

청도에 도착한 우리

웬만해선 기내 안에서 긴장을 잘 늦추지 않는 나인데,

눈만 마주쳐도 웃긴 나의 동기 때문이었을까

유난히 친한 동기와의 비행 때문에 설레어서였을까

동기와 함께 호텔에서 시켜먹을 마라탕 생각에 행복해서였을까 ( 청도행 마라탕은 진짜 최고다. 한번 맛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맛!)


이유야 어쨌건

지금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이야기

누구나 실수는 하니까!

동기사랑 나라사랑! 항상 부족한 날 도와주는 나의 동거녀와:)

그래도 동기와의 비행은 좋다

친한 동기와의 비행은 더 더 더 좋다

나와 결이 맞는 동기가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ps. 칭다오 맥주와 양꼬치 ,

그리고 마라탕이 미치도록 그리운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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