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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소록 Dec 09. 2024

당신은 전단지를 받아주는 사람인가?

조지 오웰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접시닦이, 부랑인, 강변 둑길 노숙자의 영혼 속에는 정말로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이해하고 싶다. 현재로서는 가난의 언저리까지 밖에는 보지 못한 것 같다.(p284)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조지 오웰, 삼우반


19세기 파리의 화려한 호텔은 누구의 노동과 땀으로 운용되는가. 고급 식당의 테이블을 빛나게 하는 먹음직한 음식이 만들어지는 어둡고 불결한 노예노동의 현장, 땀에 전 주방에 대한 조지 오웰 특유의 신랄한 묘사를 읽고 나면, 당신은 당분간 외식을 망설이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현장에서 얼마나 걸어 나왔는지 문득, 주변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호텔과 음식점에서는 시간 엄수와 세련됨을 위해 좋은 음식을 희생하므로 그 불결은 생득적이다. 호텔 종업원은 음식을 준비하느라 너무 바빠서 그것이 먹으라고 만드는 것임을 기억하지 못한다.(p105) 


전형적인 19세기 대영제국 중산계급인 조지 오웰은 왜 굳이 밑바닥으로 내려갔을까. 아마도 그는 인간에 대해 많은 질문을 지닌 사람이었을 것이다. 굶주림과 벌레의 습격, 구걸조차 금지된(구걸은 불법이다) 무시무시한 가난 앞에서도 조지 오웰은 '부랑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걸인은 대부분의 특허 매약 판매 상인과 비교하여 정직하고, 일요 신문 사주와 비교하여 고상하며, 집요한 할부 판매원과 비교하여 상냥하다. 
…   
걸인은 대부분의 현대인들과는 달리 명예를 팔지 않는다. 다만 그는 부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직업을 선택하는 실수를 한 것뿐이다.    
(p228~229)                                                                                 


조지 오웰은 영국 식민지 버마에서 5년 동안 경찰관으로 근무했다. 제국주의 본질에 대한 회의와 식민 지배에 대한 죄책감으로 경찰관을 사직하고, 파리와 런던에서 하층민들과 생활하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강화한다. 

그 무렵 나는 제국주의가 사악한 것이니 어서 직장을 때려치우고 그로부터 멀어질수록 좋다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이 모든 게 견딜 수 없는 죄책감으로 나를 짓눌렀다.(『나는 왜 쓰는가』p32 <코끼리를 쏘다> 중에서)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읽고 나면 인간 존재를 향한 뜨거운 탐구심, 인간 영혼의 밑바닥을 이해해 보고 싶은 조지 오웰의 욕구가 깊어져 『동물 농장』이나 『1984』와 같은 국제적 명성을 얻은 고전 작품을 쓰게 되었으리라 짐작하게 된다. 그가 보기에 부랑인은 단지 불합리한 법률적 강제로 부랑생활을 강요당한 자들이다.(부랑자 구호소에는 하루만 머물 수 있다. 실직으로 굶는 자는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다른 구호소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에는 1930년 전후 파리와 런던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었다. 조지 오웰은 부랑자가 되어 굶주리며 떠돌아다니고, 접시닦이 생활을 하고, 폐렴에 걸려 지옥 같은 병원(『나는 왜 쓰는가』의 내용 중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죽는가>라는 글에서 병원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나온다.  가난한 자들에게 병원이란, 환자가 인간이라는 인식은 거의 없는 듯한 태도의 의사들에게 의학 수업의 연구 대상 노릇을 하다, 죽어서는 의대생들의 해부 '교재'로 쓰이는 곳이다.)에 입원하는 등의 생활을 통해 하층민들의 삶과 죽음 전반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그의 글은 대부분 그의 실제적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다. 


부랑자들과의 생활을 통한 깨달음으로 그는 부랑인에 대한 편견을 버릴 것(그들은 폭력적이고 기생충 같은 존재가 아니라 가난을 죄악시하고 일하기를 원하는 영국 국민의 한 사람이다)과 노숙을 불법화하는 제도의 개선을 역설한다. 

그들도 평범한 인간이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만 못한 것은 그들의 생활 방식에서 빚어진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는 말이다.(p270)  





어느 날 아침 우리는 샌드위치맨(역주 : 몸의 앞뒤에 광고판을 걸고 다니는 사람) 일자리를 구하려고 하였다. 새벽 다섯 시에 사무실 뒤편 골목길로 갔지만 벌서 30명에서 4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고, 두 시간 뒤에는 남은 일자리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p238)

조지 오웰의 글을 보며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혹독한 가난과 가난이 주는 고통은 아직도 여전히 우리의 곁에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위 발췌문은 1930년대의 모습을 묘사했지만, 현재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편견도 또한 여전하다. 가난한 자들 대부분이 구조적 착취로 내몰리다 제도적 불합리로 가난을 떨칠 수 없는 상황에 빠져버렸음을 조지 오웰은 1930년대에 이미 간파했다. 스스로 하층민의 삶 속으로, 그리고 전쟁의 포화 속으로(그는 스페인 내전에 참전 후 『카탈로니아 찬가』를 집필했다.) 걸어 들어간 그는 행동하는 지성의 표본 같은 사람이다.(하지만 그런 그도 반유대 감정을 자제하지는 못했다. 이 글의 여기저기에서 유대인에 대한 강한 반감이 드러나 있다.)




1933년 출간된 이 글에서 조지 오웰은 이렇게 말했다.

전단지를 모두 돌려야 일이 끝나므로 전단지 돌리는 사람을 보면 한 장씩 받아주는 것이 그를 돕는 것이다.(p239) 

그리고 어쩌면 그는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2024년의 당신은, 전단지를 받아주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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