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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Jan 21. 2024

지구 평면설 믿는 사람과 대화하기

짧은 리뷰 

책 제목이 너무 길어서 리뷰 제목에 쓸 수가 없었다. 원래 제목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 


나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 모두를 비이성적인 사람 혹은 음모론에 휘둘리는 생각 없는 이들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류의 음모론을 의도적으로 만들어서 퍼뜨리는 무리들과 음모론에 휘둘리는 사람들을 구분해야 하며, 우리가 고립시켜야 하는 치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의도적으로 음모론을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자들이라고 생각한다. 


평화활동을 하면서 사실 지구평면설을 믿는 것과 같은 음모론자들을 마주할 일은 많지 않다. 하지만 나와 정반대의 생각을 가진 다수를 만나고 이야기 나누고 설득해야 하는 일은 부지기수다. 꼭 음모론자가 아니더라도, 나와 반대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법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음모론자가 아니더라도 과학적 사고 혹은 합리적 대화를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참고할 것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을 읽고 나서 정말로 내가 음모론자(혹은 과학부정론자)나 나와 반대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을 익혔냐 하면, 전혀 아니다.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는커녕 여전히 나는 대화 자체가 가능할지 의구심이 든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 책을 통해서 과학부정론이 어떻게 형성되고 작동하는지, 그것이 사람들의 어떤 지점을 파고드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흔히들 과학부정론이나 음모론은 주로 정치적 보수파와 가깝다고 생각하는데(코로나 음모론을 생각해 보라) 진보파와 과학부정론이라는 민감한 주제(GMO를 둘러싼 논쟁)를 다룬 챕터도 무척 흥미로웠다. 


아쉬운 것은 문장이었는데, 논리 전개방식이나 말투가 너무나도 미국식이라 읽는 내내 몰입이 잘 안 되었다. 원 저자의 문체 때문인지,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탓인지는 모르겠다. 



과학부정론의 구성요소 


과학부정론자들이 활용하는 전술을 다섯 가지로 분류했는데 무척 흥미로웠다. 굉장히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정리해 놓은 것을 보니 꼭 극단적인 과학부정론이 아니더라도 논쟁을 할 때 누구나 빠지기 쉬운 함정 혹은 상대방을 부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활용하는 나쁜 전술 같은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논쟁을 하는 사람을 피해야 하는 동시에, 이런 식으로 논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충분했다. 부학부정론의 구성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체리피킹: 자신의 주장을 지지할 증거들만을 선택적으로 채택하는 것. 이로써 확증편향이 강해지고 나중에는 의도적으로 체리피킹을 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믿고 싶은 것과 일치하는 사실만을 찾게 된다. 과학부정론자들은 100가지의 증거 중에 99개가 반박당하더라도 하나 남은 그 증거를 노골적으로 선택하고 아흔아홉 가지의 논박에는 귀를 닫는다는 것이다. 


음모론: 증거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그 이론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태도로 실제 음모(일부 증거가 있어야 함)과 음모론(신뢰할 수 있는 증거가 통상적으로 없음)을 구별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음모론자들은 반증이 발견되더라도 기존의 이론을 포기하지 않는다. 타진요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가짜 전문가에 의존(진짜 전문가를 무시): 사실 모든 과학적 논쟁에서 과학은 백 퍼센트를 확신하지 않는다. 의심하고 관찰하는 게 과학적 태도의 핵심인데, 백 퍼센트 확신이야말로 가장 반 과학적인 태도 아닌가. 그런데 과학부정론자들은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든다. 백 퍼센트가 아닌 지점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주장을 펼치는 이들을 전문가로 호출하고, 마치 이것이 사회적 합의가 없는 과학적 논쟁의 장인 것처럼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흡연이 암을 유발한다거나, 기후위기가 인간 활동에 기인한다는 주장에는 예컨대 백 퍼센트의 확신이 존재하지 않는데, 담배가 아니라 다른 것이 암을 유발한다거나 기후변화가 인간이 아닌 다른 요인 때문이라는 주장을 마치 경합하는 정설처럼 메이킹한다는 것이다. 이 전략이 무서운 까닭은 특히 돈과 권력이 있는 집단이 여론에 물타기 하는 전략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비논리적 논증: 나름 논리적인 척하는 궤변을 말하는 거 같다


과학이 완벽해야 한다는 주장 : 경험적 세계에서 모든 완벽한 증거가 도출될 때까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주장. 은근히 사람들에게 잘 먹히는 그렇지만 굉장히 비과학적인 전략이다. 원래 인간이 인식하는 과학적 사고란 완벽할 수 없다. 지금까지 쌓아온 과학적 근거로 추론하고 입증한 가설을 채택할 뿐이고, 이는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 완벽하게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채택할 수 없다는 주장은, 실은 채택을 못하게 하기 위한 꼼수일 뿐이다. 



정체성이 신념을 형성한다 


오늘날 음모론은 과거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띤다고 느낀다. 예를 들면, 과거의 음모론은 지구평면설이나 인간의 달착륙은 거짓이라는 식의, 다소 황당하고 보통의 사람들에게 공감받기 어려운 기행 같은 것이었다면 지금의 음모론은 진영론과 적극적으로 공모하는 느낌이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떨어진 선거를 조작된 선거라고 몰아가는 모습이 민주당과 국민의힘 양쪽 지지자 모두에게서 나타나고 때로는 일부 강성지지자들이 이를 적극 주장하는 식이다. 


저자는 "신념 형성에서(심지어 실증적 주제에서도) 중요한 문제는 증거가 아니라 정체성일 수 있다"(114쪽)고 이야기한다. 이는 통찰은 일베를 떠올리게 했는데, 일베 유저들이 "증거의 일베"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었던 것처럼 과학부정론자와 음모론자들도 과학적 사실을 공격할 때 팩트와 근거를 주로 활용한다. 하지만 이는 그럴싸한 궤변이고 결국 이들을 관통하는 것은 증거가 아니다. 증거로 포장한, 과학적인 것처럼 보이는 포장지를 한풀 벗겨보면 결국 이들은 하나의 소속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이고 그 소속, 정체성이 신념으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의 신념에 도전하는 것은 그 사람의 정체성에 도전하는 일"(125쪽)이 된다. 


신념과 정체성이 이렇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이 책을 읽기 전에는 해보질 못했다. 많은 진보 활동가들이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상대방은 모르고 자신만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가르치듯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이게 얼마나 위험천만한 말걸기였는지를 새삼 깨닫는다. 나와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할 때 더욱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나는 그저 반대되는 생각을 말했더라도 상대방은 그것을 자신과 자신의 그룹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에. 



진보와 음모론, GMO의 경우 


어쩌면 가장 흥미를 갖고 읽은 챕터가 바로 진보주의자와 음모론을 다룬 챕터일 것이다. 저자는 음모론이나 과학부정론을 연구하기 위해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어 직접 대화를 나누는 방법을 택하는데, GMO에 대해서도 평소 회의적인 인식을 가진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이를 정리했다. 다만, 지구평면론자들과는 달리 GMO에 회의적인 사람들은 (아무래도 진보적인 사람인) 저자가 평소에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들이라는 점이 좀 달랐다. 주변에도 지구 평면설을 믿는 사람은 없지만 GMO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이 챕터가 더 흥미로웠던 것 같다. 


두 명과의 대화가 소개되는데 둘의 GMO에 대한 반대의 정도도 사뭇 달랐는데 내가 읽기로는 저자는 이 둘 다 음모론자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판단한다. 먼저 식품회사 경영자인 린다는 자신의 업장에서 비GMO만을 취급하는데, 그녀가 GMO를 신뢰하지 않는 까닭은 과학적인 이유보다는 좀 더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즉, 영양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식품이 아니라 몬산토와 같은 거대 기업이 이윤 추구를 위해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만든 제품이기 때문. 그녀는 과학에 대해서도 "이 연구를 진행하는 자금을 누가 대지?"라는 질문을 늘 던진다고 한다. 반면 환경생물학자인 테드는 GMO에 대해서 좀 더 완고했다. 테드는 GMO가 인간의 건강에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반대로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태도를 완고하게 보이며 저자와 논쟁을 이어간다. 저자는 이 대화를 이렇게 기록한다. 


"GMO를 둘러싼 대화에서도 나는 그를 설득하지 않았고, 그도 나를 설득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결론이 있다. 공감, 존중, 경철은 우리가 서로의 믿음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획득하는 유일한 덕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신뢰와 상호 존중의 맥락은 이 대화를 가능하게 한 유일한 요소였다."(304쪽)





나는 대화를 나눌 때 종종 입장보다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옛날에는 나와 같은 입장인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나와 같은 입장인 것보다는 서로 다른 입장이더라도 어떤 태도로 대화에 임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신뢰, 존중 같은 것들이 존재하는 관계에서는 서로 의견이나 입장이 다르더라도 얼마든 대화가 가능하다. 불필요한 갈등 비용을 줄일 수 있고, 서로를 존중하기 때문에 과도하게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무리하지 않는다. 반대로 신뢰와 존중이 결여된 관계에서는 서로 다른 지점을 참아 넘기지 못해서 싸우거나, 반대로 무리하게 입장을 동일하게 만들기 위한 과정이 거칠게 일어나기도 한다. 


음모론이나 과학부정론에 대해 공부하려고 읽은 책인데, 읽고 리뷰를 쓰고 나니 결국 '나는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어떻게 대화해야 하나'를 고민하게 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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