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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Nov 18. 2024

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

짧은 리뷰

두 권의 책을 읽었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일란 파페가 쓴 <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백선 옮김, 틈새책방, 2024)는 2014년에 나온 책인데 2023년 10월 7일 이후 자행된 학살 국면에서 국내에도 번역된 듯하다.  서방과는 다른 시선으로 중동 지역의 정치를 연구해 온 학자 질베르 아슈카르가 쓴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팔레스타인 평화 연대 옮김, 2024)은 10월 7일 이후 아슈카르가 쓴 아티클들과 2009년 아슈카르가 한 인터뷰를 모은 책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란 파페는 (특히 서방국가들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잘못된 사실을 신화라 명명하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과거와 현재를 다룬다. 이 열 가지 목록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이스라엘의 핵심문제를 파악할 수 있다. 역사학자답게 열 가지 신화가 왜 잘못되었는지를 풍부한 역사적 근거로 반박해 나간다. 열 가지 신화와 그에 대한 일란 파페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


잘못된 신화: 과거

팔레스타인은 빈 땅이었다. 이스라엘 교육과정을 통해 전파되는 시온주의 도래 이전에 팔레스타인은 황량하고 메마른 땅이었다는 신화와는 달리 19세기 팔레스타인은 근대화와 민족 국가화 과정이 진행 중인 풍요롭고 비옥한 지중해 동쪽 세계의 일부였다.(52쪽)

유대 민족에게는 땅이 없었다. 이 신화는 사람이 없는 땅 팔레스타인이라는 신화와 한 쌍인데 이 또한 거짓이고, 영국의 제국주의적인 충동이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새롭게 일어난 시온주의의 문화적 지적 비전과 일치하면서 팔레스타인을 식민지화하는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69쪽)

시온주의와 유대교는 같다. 일란 파페는 19세기 중반 유대 문화생활을 표현하는 핵심적이지 않은 한 형태로 시작된 시온주의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상세히 보여준다. 유대인 박해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유대인 사회 내에서도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했다는 사례, 유대인 공동체 내부에서 시온주의에 대한 다양한 반대의 목소리를 보여주어 이 신화를 깨뜨린다.  

시온주의는 식민주의가 아니다. 시온주의는 독특한 것이 아니라 정착식민주의의 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114쪽) 정착식민주의는 팔레스타인, 아메리카, 남아프리카공화국, 호주 등지에서 진행된 식민 운동으로 처음에만 일시적으로 제국에 의존하고, 천연자원을 탐하는 게 아니라 땅 자체를 차지하려 한다는 점에서 고전적 식민주의와는 다르다. 특히 새로운 정착지를 차지하기 위해선 이미 그 땅에 살고 있는 이들을 대량학살, 인종 청소 등의 방식으로 제거하는 이른바 '제거 논리'가 식민주의 프로젝트를 주도하는데 일란 파페는 이때 작동하는 것이 바로 인간성 말살이라고 말한다.(113쪽)

1948년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고향을 떠났다. 자발적 이주란 말뿐이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128쪽) 1948년 사건은 종족 청소 작전이며, 이스라엘의 종족 청소 정책이 시사하는 바를 국제 사회가 인식하고 해결하지 않는 한, 다시 말해 팔레스타인인의 추방을 회피한다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해결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155쪽)

1967년 6월 전쟁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전쟁이었다. 1948년에 시작된 식민주의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선택한 것이 바로 1967년 6월 전쟁이었다.


잘못된 신화: 현재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유일한 민주 국가다. 1967년 이전 이스라엘은 난민을 총살하고 이스라엘 인구 1/5에 해당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기본권과 시민권을 부정한, 절대로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지금의 이스라엘 또한 인종 차별 국가 또는 정착민 식민지 국가이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오슬로 신화. 오슬로 협상이 공정하고 평등한 평화 추구의 과정이 아니라 패배하고 식민지화된 민족이 타협에 동의하는 과정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고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해결책을 억지로 모색해야 했다.(219쪽)

가자 신화. 하마스는 테러조직이 아니며 이스라엘은 파타를 견제하기 위해 1987년 하마스가 출범할 당시 도움을 주기까지 했다. 또한 이스라엘군이 가자에서 철수한 것은 평화를 위한 계획의 일부가 아니었으며, 가자 전쟁 또한 자기 방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잘못된 신화: 미래

'두 국가 해법'이 유일한 길이다. 현재 상황에서 두 국가 해법은 불가능한 전망이다. 약탈품을 더 공정하게 나눈다고 해서 유대인이나 팔레스타인인에게 정상적인 삶을 보장할 수 없다. 약탈과 강찰을 끝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


일란 파페의 책이 지난 75년의 세월 동안 이어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학살에 대해 역사적인 분석을 했다면, 질베르 아슈카르의 책은 2023년 10월 7일 이후 이어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학살에 대해 정치적인 분석과 전망을 보여준다. 질베르 아슈카르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군사 행동 이면의 정치적 의미를 반제국주의의 맥락에서 분석한다.  


하마스가 주도한 작년 10월 7일의 알-아크사 홍수 작전에 대한 아슈카르의 비판은 무척 흥미롭다. 아슈카르의 분석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측면보다는 정치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에 집중한다. "무장 대립을 통해 팔레스타인 인민이 민족 해방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발상은 비합리적"이며 "하마스의 전략은 유대계 이스라엘인의 민족주의적 통합을 오히려 부추길 것이며 시온주의 국가가 팔레스타인인의 권리와 존재를 한층 심하게 억압할 구실로 활용될 것"(28쪽)이라는 것이다. 마치 "9/11이 부시 행정부의 숙원 사업이던 이라크 침공의 정치적 조건을 창출했다면 10월 7일은 가자 재정복의 정치적 조건-네타냐후가 오랫동안 갈망했으나 너무 무모했고 공개적으로 논의에 부칠 수 없을 정도로 도가 지나쳤던-을 창출했다"(41쪽)고 말한다.


그렇다고 아슈카르가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에 논리적 타당성을 주는 것은 아니다. 아슈카르는 "수십 년 동안 팔레스타인 인민이 무엇을 견뎌 왔는지를, 1967년에 점령되고 2005년에 이스라엘 군대가 병력을 철수한 이래 가자 지구가 어떻게 지붕 없는 감옥-주기적으로 이스라엘이 벌이는 살인적인 '사냥'turkey shoot의 표적이 되는-이 되었는지"(16쪽)를 분명하게 반복해서 말한다. 또한 하마스의 무장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저지른 폭력의 이미지가 서방 언론에 홍수처럼 도배되는 동안 이스라엘이 가자 민간인에게 자행한 대규모 공격은 규탄은커녕 보도조차 되지 않는다며 서구 언론의 인식과 행태를 강하게 비판다.


아슈카르는 911 테러 당시 쓴 자신의 글을 인용하며 기계적인 양비론을 경계한다. "서로 다른 야만은 정의의 저울 위에서 같은 무게를 지니지 않는다. 야만이 '정당한 자위'의 도구가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야만은 정의상 그 자체로 언제나 부당하다. 그렇더라도 두 종류의 야만이 출동할 때 억압자로 행동하는 강자의 책임이 더 크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비합리성을 표방한 사례를 제외하면 약자의 야만은 거의 언제나 강자의 야만에 대한 대응이었고 이는 충분히 논리적이다."(27쪽)


아슈카르는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이스라엘과 군사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합리적인 전략이 아니라면서 대중저항에 입각한 비무장저항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1967년 이래 이스라엘 국가에 맞선 팔레스타인의 투쟁을 돌이켜 본다면 가장 큰 효력을 발휘했던 것은 1988년의 소위 투석 혁명 Revolution of the Stones, 즉 1차 인티파다였다는 것이죠. 이때는 화기, 자살 폭탄, 로켓 등은 전혀 쓰이지 않고 대중 동원만이 활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로서는 가장 두려운 방법이었죠. 이스라엘인들을 끔찍한 정치적 곤경에 빠뜨렸으니까요."(88쪽)


대중 저항은 팔레스타인인들만의 몫이 아니다. 아슈카르가 생각하기에 이스라엘 국가를 외부에서 파괴하는 건 가능하지 않지만 이스라엘 내부에서 파열을 일으키는 것은 가능하다. "시온주의 국가를 상대로 유효한 승리를 거두려면 국제주의가 꼭 필요합니다. 이 방안 말고 시온주의 국가를 패배시킬 합리적 전략은 존재하지 않아요. 이스라엘 사회 자체 내부에 주된 파열을 일으킬 필요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회의 주요 분파가 이스라엘 정부의 호전적인 정책에 적극 반대하고, 정의, 자결, 모든 차별의 종식에 기초한 지속적인 평화적 해결책을 위해 싸워야 하는 것이죠."(90쪽)


대중 저항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슈카르의 통찰처럼 "이것은 단순한 군사적 쟁점이 아니며 더 주요하게는 정치적 사안"(33쪽)이기 때문이다. 10월 7일 이전에도 "이스라엘 군인들은 광범위한 도시 지역을 초토화할 수 없었다. 물론 파괴력이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필수적인 정치적 조건들이 부재했기 때문이다."(35쪽)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공언한 목표는 실행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대규모 폭력을 낳을 것이다. 이는 정치적 악재로 작용할 수밖에 없으며 전쟁 수행 자체도 그로부터 영향을 받을 것"(33쪽)이라는 것이다. 이는 앞서 인용한 국제주의, 이스라엘 내부 균열과도 이어지는 문제의식이다. 물론 1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을 보고 있자면 네타냐후는 정치적 악재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비극을 완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런 통찰이 힘을 잃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폭력의 스펙터클 이면을 보는 것이 통찰력이다. 폭력이 작동하는 정치적 맥락을 살피지 않는다면 우리는 폭력이 닦아놓은 낭떠러지로 향하는 길을 전력질주 하게 될 뿐이다. 아슈카르의 통찰은 거대한 폭력에 맞서 저항하는 사람들이 꼭 새겨야 하는 말이다.



두 책의 미덕


두 책 모두 좋았다. 이스라엘의 학살이 어떻게 지속되어 왔는지를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설명해 주니 이 비극을 좀 더 분석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특히 좋았던 것은 두 저자의 태도였다. 일란 파페와 질베르 아슈카르는 명확하게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입장이다. 이스라엘의 식민지배와 군사점령, 인종청소와 학살을 강도 높게 비판하지만 진영논리에 빠지지 않는다. 미제와 싸우기만 하면 독재정권이라도 상관없다는 입장을 가진 이들을 종종 본다. 혹은 나이 드신 지식인들 가운데서 굉장히 러시아 편향적인 시선으로 러시아-우크라니아 전쟁을 바라보는 분들도 여럿 있다. 미국과 서방 언론의 발표를 의심하면서(당연히 의심해야 한다. 미국 정부의 입장에서 쓰인 기사들은 진실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발표는 왜 진실이라고 믿어버리는 경우를 여럿 봤다. 나는 이것이 진영논리에 빠져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작금의 진영론은 주로 '누구의 편'으로 형성되기보다는 '누구는 절대 안 돼, 너무 싫어'라는 안티 테제로 구성되는 거 같다. 미국이 싫어서 러시아의 전쟁 범죄를 눈감거나, 러시아가 싫어서 우크라이나의 전쟁 범죄를 모른 척하는 것이다.  


어떤 시선으로, 어떤 철학과 사상을 가지고 한 사안을 바라보는 것은 중요하다. 기계적인 중립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정치적으로는 결국 강자의 편을 들지만 아닌 척하는 비겁함일 따름이다. 명확한 입장은 사건에 개입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하지만 그 입장을 정하는 기준이 진영론 이어서는 곤란하다. 특히나 전쟁이나 군사적 충돌의 경우 거의 백 퍼센트의 확률로 양쪽 모두 정의롭지 않다. 나는 포로로 잡힌 러시아 군인들을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성적으로 학대하는 영상이 담긴 다큐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 독일과 맞서 싸운 연합군의 군인들은 나치를 무찌르고 독일로 진격해 들어간 뒤 독일 여성들을 강간했다. 우리가 이런 전쟁범죄들에 대해 온전하게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우리의 입장이 발 딛고 서야 하는 기준은 누군가의 편, 혹은 누군가의 반대편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권 같은 보편 가치여야 한다. 물론 민주주의나 인권 또한 정치적 맥락에 따라 쉽게 오염되거나 악용되기도 하지만(대대로 전쟁을 일으키는 이들은 민주주의나 인권을 들먹인다. 푸틴은 네오 나치를 무찌른다며 우크라이나를 쳐들어갔고 하고 조지 부시는 독재자 후세인으로부터 이라크인을 구하기 위해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 그것은 그것대로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이지 그러한 오염과 악용 가능성 때문에


그런 면에서 일란 파페와 질베르 아슈카르는 아주 선명하게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주면서도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이게 어쩌면 지식으로서 너무 당연한 태도여야겠지만, 요즘은 이런 태도를 만나는 일이 점점 힘들어지기 때문에 이런 입장과 태도가 더욱 귀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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